눈을 깜빡이며 깨어난 쿤은 자신이 처음 보는 방 안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앞서 지나온 토굴의 모습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철제 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면들에는 하나같이 알 수 없는 문자가 빼곡했다.
“응? 일어 남?”
그때, 아도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치에서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꽤나 궁색 맞은 자세. 그러고 보니 엉덩이 걸친 곳조차 없었다. 기둥과 바닥. 그리고 중앙에 있는 묘한 형태의 상자가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어떻게 된 거야?”
“골렘. 사망. 문. 열림.”
“마법사의 연구실 같은 건가?”
“다름. 이곳. 봉인지.”
“봉인?”
쿤이 허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찬 바닥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더니 뻐근했다. 하지만 큰 고통은 없었다. 부러진 팔도 멀쩡해져 있었다. 아도란이 치료해 준 걸까? 의문을 품으며 뭉친 근육을 풀어냈다. 툭툭 치며 심호흡을 했다. 아직까지 물약을 먹고 난 후유증이 전부 가시지 않아서 속이 울렁거렸다.
“저거. 프리실라가 지키던 거.”
“프리실라? 그건 또 누구야?”
“친구. 동문.”
아도란이 읽던 책을 불쑥 내밀었다.
글자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중간에 박힌 사진 하나는 알아 볼 수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사람과 적발의 미인. 하나가 아도란이라면 다른 하나는 프리실라라는 여성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동문이라면……같은 계열의 마법사라는 거야?”
“응. 아마? 기억이 희미. 우리. 불렀어. 최후의 문.”
“최후의 문? 마법사 집단 치고는 특이한 이름인데?”
“긍정. 나도 이상. 하지만 스승이 지음. 어쩔 수 없음.”
“스승? 너한테도 스승이 있었던 거냐?”
아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쿤이 잠시 생각하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법이라는 학문은 누군가의 가르침 없이는 전해지기 어렵다. 독학? 하늘을 쪼개버릴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다. 아도란의 악명과 행동을 보고, 예상하지 못했을 뿐 그도 누군가에게 마법을 배운 것이다.
“그나저나 이 상자는 뭐야? 이게 봉인이라는 거냐?”
“봉인. 프라실라의 능력.”
“마법사가 봉인한 거라면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겠지?”
“쿤. 아는 거.”
“……내가 아는 거라고?”
쿤이 미간을 좁히며 상자 근처로 다가갔다.
상자는 열 수 있는 홈이 하나도 없었다. 통짜로 주조해서 만들어 낸 듯 모든 부분이 이어져 있었다. ‘꽤나 단단하게 봉인하고 싶었던 모양이군.’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아도란이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이거.”
짧게 답하며 아도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상자 겉면으로 금이 쭉 가더니 사방으로 갈라졌다. 뭔가 예고라도 하든가. 쿤이 깜짝 놀라서 두 걸음을 물러났다.
“어?”
하지만 상자 안에서 나타난 물건에 비하면 아도란의 행위는 애교에 불과했다.
아득할 정도의 혐오감과 함께 등장한 물건.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바로 검은 돌이었다.
아도란이 지키고 있던 것보다는 크기가 훨씬 작았지만 모양, 색, 느낌. 모두 다 같은 성질을 지닌 검은 돌이었다. 묘한 글자를 새긴 은색 체인으로 칭칭 동여 맨 채,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봉인. 프리실라 나와 같은 명령.”
“명령? 아! 그러니까 누군가가 너와 프리실라한테 이 돌을 지키라고 명령 한 거구나?”
“긍정. 기억이 희미. 몇 가지 떠오름. 최후의 문. 마법사들. 각자 돌 지키러 감.”
“어째서? 너희는 무슨 이유 때문에 이 돌을 지키려 한 거야?”
“몰라. 기억 안 남.”
아도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속이려 드는 걸까. 쿤이 슬쩍 진실의 돋보기를 꺼내서 그를 비춰 보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아도란 솔직하게 말 해 줘. 정말로 그 이상 생각나는 게 없어?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기억 안 남. 아도란 머리. 복잡.”
“음……”
돋보기에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나타났다.
적어도 지금 말 하는 내용에 거짓은 없는 듯 했다. 쿤이 돋보기를 다시 집어넣고는 사슬로 묶인 검은 돌을 바라봤다.
‘검은 돌을 봉인하려는 집단이 따로 있다는 얘기인가? 마법사라면 독특한 능력이 있었을 테니, 미리 이상을 감지했을 수도 있고……’
세상에 뿌려진 검을 돌을 봉인하기 위해서 마법사들이 움직였다.
그 중 하나가 미친 마법사 아도란인 점은 상당히 의아하지만, 인력난이라 생각하면 그것도 이해 할 만 하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생각하던 쿤이 잠시 동작을 멈췄다.
검은 돌이 뿌려지고, 마법사가 봉인하러 움직였다. 이 선후 관계. 하지만 반드시 이렇게 됐을 거라 장담 할 수는 없다.
‘마법사가 검은 돌로 이단을 봉인한 거였다면? 이단의 힘이 커져서 돌을 부수고 나온 거면? 그 파편을 다시 봉인하기 위해서 마법사들이 따로 움직인 거라면?’
검은 돌은 일종의 통에 불과하다.
아무 이유 없이 이게 뿌려지고 그 안에 이단이 깃든다는 것은 조금 억측이다. 차라리 이 안에 이단을 가뒀다가 모종의 이유로 부서져 흩뿌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봉인을 위해 움직인 마법사가 있으니 전후 과정도 이것이 더 타당하고.
‘하지만……’
아도란도 그렇고, 이 프리실라라는 마법사도 그렇고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실패했다. 봉인. 그 단어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럭저럭 구색은 맞출 수 있겠지만, 말 그대로 가둬두는 것이 한계. 지금 이 상자도 타인의 접근을 막고, 골렘과 마법 함정으로 주변을 방어한 것에 불과하다. 찾아온 것이 쿤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면 아마 지금의 봉인도 파훼됐을 터.
‘마법사는 이단을 막고 싶어 하지만 수단이 부족하다.’
봉인이 아닌 제거를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도란도, 프리실라도. 이단으로 이한 이상 현상을 알고, 그것에 대비 하려고는 하지만 결정적인 수단이 부족한 집단이다.
‘어쩌면 이들과는 동료가 될 수도 있겠군.’
쿤은 이단을 정화 할 수 있다.
당장은 일신의 안위 때문에 임시병통으로 검은 바위를 두고 왔지만, 시간만 넉넉했다면 천천히 정화를 해서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을까. 목적이 같은 거라면 서로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도란. 프리실라라는 마법사 말이야.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있어?”
“몰라. 급히 떠남.”
“쯧.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없음. 흔적. 잘림.”
쿤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도란이 아닌 정상적인 마법사와 만날 수 있다면 이단과 대항하는 다른 집단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고, 여러 가지로 편해진다.
하지만 찾을 수 없다고 하니……
“아도란, 다른 물건은? 숨겨 둔 보물 같은 거 없어?”
챙길 건 챙겨야지.
무료 봉사는 사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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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은 연구실을 뒤진 결과 오두막의 망령이 죽은 이유를 알아 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골렘 때문이다. 아도란이 해석해 준 바에 따르면, 골렘은 정기적으로 마법사의 마력을 주입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만월이 뜬 날 달빛을 받아 이를 충전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는 오두막을 감싸는 마법 역시 약해진다. 오두막의 망령은 운이 없게도 이것을 지켜보다 변을 당한 것이다.
“달빛을 받는 골렘은 마치 보석과 같이 빛난다. 본질은 흙과 돌인데도 말이지. 안타깝군.”
“골렘. 회복 중엔 침묵. 망령. 훔침. 걸려서 사망.”
“인과응보라 그건가? 하긴, 보물 사냥이라는 것도 걸리면 사망이요, 안 걸리면 부자니 비슷하다고 해야겠네.”
복잡할 것 없이 그냥 운이 없던 것이다.
쿤이 쓰게 웃으며 챙겨온 물건을 정리했다. 급히 떠난 탓인지 연구실 안쪽에 물건이 꽤 남아 있었다.
“하지만 조금 아쉽군. 차라리 연구실을 우리가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골렘 사망. 연구실 봉인.”
“뭐, 이 정도 건질 걸로 만족해야지.”
골렘이 죽은 순간부터 봉인지는 자체적으로 폐쇄되는 구조였다.
그걸 막아 둔 것이 아도란. 같은 학파의 마법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이 부분은 기억하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검은 돌과 마법사의 물건들을 들고 나올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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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제작술
프리실라가 저술한 골렘 제작법. 기초부터 심화 과정까지 자세하게 쓰여 있다. 정독하는 것으로 스킬 등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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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인 스톤
마력을 저장 할 수 있는 물체. 열처리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바뀐다. 기본은 돌의 형태와 같아, 스톤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아케인 스톤을 가공하여 마법사의 표식을 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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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실라의 검은 장갑
아케인 스톤을 고열로 녹인 뒤 마법적 처리를 가해서 장갑으로 짰다. 실이 교차하는 방식이 마법의 구동 회로가 된다. 두 가지의 마법을 담고 있으며, 하루 사용 횟수가 정해져 있다.
- 불타는 손(καίγοντας χέρια)
장갑에 실린 마법으로 발화시킨다. 순간적으로 강철조차 녹일 수 있는 고열을 만들 수
있다. 시전 시, 보호 마법이 같이 발동하여, 시전자를 보호한다.
하루에 한 번 사용이 가능하다.
- 염동력(τηλεκίνηση)
시야에 닿는 물건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지능에 의거하여 개수와 무게가 달라진다. 최대 10분간 유지가 가능하다.
하루에 다섯 번 사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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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도구인 플리실라의 검은 장갑이야 그 가치를 말 하는 게 입 아플 정도이고, 아케인 스톤도 쿤이 아는 바에 의하면 손톱 만 한 것이 금화 열개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즉, 두 가지만 해도 쿤은 말 그대로 보물을 퍼 올린 것과 다름없는 일.
하지만 정작 마음에 드는 건 첫 번째 [골렘 제작술]이었다.
골렘의 구동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첫째는 마력. 아케인 스톤을 변형하여, 골렘 구동을 위한 마력을 담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단 아도란이 있으니 넘어 갈 수 있다.
두 번째는 마법사의 의지.
즉, 사념이다. 골렘이 얼마나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이느냐는 이 사념의 질에 따라 결정이 된다. 능숙하지 못한 마법사는 단지 걷기만 하는 인형을 만들 뿐이고, 뛰어난 마법사는 기사 못지않은 골렘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쿤은? 그에게는 네크로맨시 능력이 있다.
망령의 제어는 마법사의 사념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상, 네크로맨시의 상위 능력 중 [죽음의 기사]를 만드는 것이 이와 비슷하니 응용해서 다룰 만 하다. 다만, 원념으로 힘을 내는 죽음의 기사와는 다르게, 쿤의 경우는 망령의 수와 결집도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망자의 부탁. 성공하면 망령의 힘 일부를 얻을 수 있다고 했지?’
힘이 누적되고, 그것을 골렘에 응용시킬 수 있다면 열 기사 안 무서운 존재를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마법사의 골렘은 경원시 되었을 지언정, 그것을 부정하다 말 하는 이는 없다. 역시 모든 건 겉보기가 중요 한 법.
시체를 잔뜩 세워서 싸우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멋지게 조각한 골렘이 일어나서 포효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만약의 경우 사용 할 수 있는 수단이 또 하나 생겼네.’
준비는 아무리 많이 해도 넘치지 않는다.
네크로맨시에 골렘 제작술.
신의 은총을 느끼고 있다.
#
[보, 보, 보물이다. 보물이다!]
쿤은 오두막으로 돌아와 지하실의 망자와 대화를 했다.
부서진 골렘의 파편을 보여주니 어찌 알아봤는지 희열에 찬 목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리 좋을까 싶지만 망자라는 건 사실 생전의 단편이 남은 존재. 온전한 사고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다.
[망자의 부탁을 달성했습니다. 망령지수가 누적됩니다.]
“망령지수?”
상태창을 살펴보니 [네크로맨시(5)]라고 표기가 바뀌어 있었다.
옆의 숫자 5가 망령지수를 의미하는 것. 하지만 그래서 이게 뭘 말하는 걸까. 자세한 설명을 위해 표시를 눌러봤다.
***
망령지수
망령의 힘을 인원수로 대비하여 표시한 지수. 1의 망령지수가 한 사람 분의 망령이 가지는 힘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망령의 총량을 의미하며, 이렇게 표시되는 망령은 사기를 띄지 않는다.
***
“뭐?”
마지막 단락에 나온 말이 쿤의 눈길을 끌었다.
‘사기를 띄지 않는다.’ 사기는 말 그대로 죽은 자의 기운을 의미한다. 이것이 없다는 말은 이미 죽은 자의 집착을 벗어나, 순수한 영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망령지수를 쌓아서 부리는 망령은 생에 집착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건가? 정화된 영? 죽음 저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의 존재와 같은 건가?’
삶과 죽음.
스틱스 강 저편의 존재에 대한 탐구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삶을 신으로. 죽음을 신으로. 숭배와 배척의 기간도 길었다. 하지만 결국 인류는 삶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를 규정짓지 못했다. 단지,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가 나눠져 있다는 사실만을 인지했을 뿐.
죽은 자가 사기를 띄지 않고 있다는 말은, 그 경계조차 넘어섰다는 걸 의미한다.
‘서 준경’이라는 신의 힘은,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조차 넘나 들 정도인가? 균형을 의미하는 그 신위가 그토록 높다는 건가?
쿤은 한 동안 생각에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어쩌면 서 준경 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르겠어.’
대신이라 불리며 추앙받은 아스모포스조차 이런 능력은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신.
어쩌면 정말로 위대한 존재의 부름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손등에 입을 맞춘 쿤이 무릎을 꿇었다.
땅에 머리를 댄 그의 자세는 더 없이 경건했다.
※작가의 말
*쿤의 성격은 변한 것이 맞습니다. 많이 부드러워졌죠. 초반과 달리 농담도 하고, 여유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준경과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변한 겁니다.
* 아도란은 사실 직무유기 중.
* 골렘. 망령. 장판. 슬슬 각이 나오는군요.
* 연재 100화가 되었습니다. 자축. 짝짝짝!
그 동안 달려 올 수 있게끔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특히, 내용 오류나 오타. 글의 미흡한 부분을 지적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글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노력하고 노력해서, 재미있는 결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러분 사, 사, 사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