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지나고 쿤은 루루와 함께 경작지를 태우기 시작했다.
불이 번질 것을 대비해서 경계선을 긋고 했음에도 마른 날씨 때문인지 타오르는 모습이 굉장했다. 이대로 분지가 홀랑 다 타버리면 계획이고 뭐고 몽땅 다 망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쨌든 그렇게 깔끔하게 분지 위를 정리 한 뒤에는 힘으로 이를 엎었다. 여기부터는 힘 좋고 오래가는 쿤과 세이혼의 역할. 전날 부숴 두었던 나무판자 등을 사용해서 골고루 갈아엎었다. ‘이것도 수련이다!’ 라며 활활 타오르는 세이혼 덕분에 쿤은 때 아닌 고행의 길을 걸어야 했다. 덕분에 작업 속도가 빨라진 것은 다행이었지만, 수련 병은 좀 고쳤으면 하는 게 진심이었다.
경작지를 엎어 둔 뒤는 씨앗 뿌리기.
99개의 씨앗 중 절반 정도를 갈아 둔 곳에 뿌렸다. 나머지는 밀알과 옥수수로 채워 두었다. 전부 다 사용할까 했지만, 혹시 또 모르니 반절 정도는 남겨 두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여기부터 뿌려요?”
다음으로는 생명수.
[중급 생명수]. 요새에서 사용한 특급 물건에 비해서는 모자랐지만 그래도 일반 물 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래쪽 개울에서 퍼 온 물에 물약제조로 만든 약을 풀어서 경작지에 뿌렸다.
마지막은 쿤의 신성 대지의 축복.
이것을 사용하면 신성 점수는 1000도 안 남게 된다. 아도란의 보석 공물도 점차 가치가 줄어들어 이제는 한 자리수로 돌입한 상황. 수확물이 공물로 가치를 발휘하지 않으면 꽤나 점수에 허덕이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돋보기. 씨앗. 그리고 라라가 정령사가 된 일 까지. 모든 행보가 하나의 결과를 바라며 이어지고 있다. 농사를 통한 수확물을 걷는 것은 지금. 그리고 차후 있을 신앙의 전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일이었다.
농사를 짓고 그 일부를 공물로 바친다.
스스로 일궈 둔 물건의 일부를 신에게 바치고 은총을 내려 받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신상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부유한 자는 부유한데로, 그렇지 못한 자는 그렇지 못한 대로. 신이 가지는 이상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쿤이 비장한 얼굴로 축성지가 된 농지를 바라봤다.
정령의 불꽃으로 생기를 머금은 토양에 축복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생명수가 뿌려지고 있는 중이다. 씨앗마저 신의 손길로 내려온 것. 이에서 나오는 작물이 결코 범삼한 것일 리 없다.
“근데 쿤 오빠. 이 넓은 경작지를 누가 다 살펴요?”
하고보니 꽤 넓어졌다.
라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수련도 해야 하고, 물약도 매일같이 만들어 공급해야 한다. 그러려면 약초 채집도 해야 하는 것. 농사라는 게 물만 띡 뿌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닌 터. 그녀의 걱정은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걱정 마라. 생각 해 둔 방법이 있으니까.”
하지만 쿤은 걱정하지 않았다.
일꾼이 없다면 일꾼을 만들면 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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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시 총론]
잉크하톤 학파의 정수가 담겨있는 책이다.
쿤은 이것을 얻은 뒤 꽤나 깊은 고민을 했다. 네크로맨시는 대륙적으로 혐오 받는 학문이며, 산 자가 익히기에는 기본적으로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세이혼이나 라라 등에게 물었을 때도 하나같이 반대를 했다. 유일하게 긍정했던 것은 아도란 하나 뿐. 그는 자기가 익히면 안 되냐고 빙빙 돌면서 졸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쿤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힘은 결국 다루는 자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신성력이라도 나쁘게 쓰면 악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네크로맨시라도 바르게만 쓰면 신성한 힘 못지않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서 준경’신의 힘은 네크로맨시와 충돌하지 않았다.
적어도 몸담은 신앙의 기준에서 이는 불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고로 쿤은 총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정독을 했다.
***
네크로맨시(1단계)
- 망자와의 대화
- 망령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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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점수 500점을 소모하여 익힌 네크로맨시 스킬이다.
망자와의 대화. 그리고 망령제어라는 스킬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단계로 표시 된 걸로 봐서는 하푼식 감각수련법과 마찬가지로 경험치를 쌓으면 이를 승급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
망자와의 대화
생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 망자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분노, 원한으로 일그러진 망자는 시전자를 공격 할 수도 있다. 사용 시마다 생기를 소모하며, 체력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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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제어
망자의 혼을 이끌어 제어 할 수 있다.
죽은 시체나 뼈에 담아 일으키면 언데드가 된다. 특정 물건에 담을 수도 있다. 다만, 그 경우는 혼의 저항으로 시간제한이 존재한다. 하루를 넘지는 못한다. 사용 시마다 생기를 소모하며, 체력과 관계가 있다.
***
쿤이 라라에게 자신감 있게 말 한 것은 두 번째의 스킬 덕분이다.
망령제어. 죽은 자의 혼을 다루는 능력인데, 보통 네크로맨서는 이를 시체나 뼈에 적용시켜 군대를 불려왔다. 죽음 이후 편히 쉬어야 할 망자들이 억지로 부림을 당하여 전쟁에 사용되고 있으니 지탄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본디 이 망령제어는 길을 잃어 현생을 떠나지 못하는 망령을 제 갈 길로 안내하기 위한 능력이었다. 극심한 분노나 공포 등에 휘말린 망령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생을 떠돌게 된다. 이를 잘 다스려 가야 할 곳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 네크로맨시. 처음부터 그들이 사악한 의로도 탄생 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망령제어의 두 번째 설명에서 보면 알듯이 망령을 시체나 뼈가 아닌 사물에도 담을 수 있다. 이는 [리빙 아머]나 [리빙 소드] 따위로 불리며 네크로맨시의 악독한 능력 중 하나로 치부 받는다. 하지만 이 또한 잘못 전해진 것이다.
본래 망령 중 태반은 생전의 기억과 습성을 잃고, 부서진 힘 자체가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망자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신의 힘이 아예 통째로 정화를 하거나, 망자의 집착을 조금씩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 그 중 후자의 것이 바로 리빙 아머 같은 능력이다. 본래는 농기구 따위에 깃들어서 산 자를 돕는 것으로 현생에 대한 부정적 집착을 덜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악용하는 자들에 의해서 리빙 아머나 리빙 소드로 탈바꿈 된 것이다.
‘하기야 힘들게 익혔는데 농사나 도우라 하니 머리가 헷가닥 한 거겠지.’
힘 자체와 힘을 익힌 이들의 모순은 오래전부터 이어지는 굴레와 같다.
쿤도 네크로맨시에 얽힌 굴레를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이 사라진 이유와, 본디 가지고 있던 의도까지. 본디, 악인이 두드러진다고 베사미어 같은 놈들이 학파를 잇는다고 나서고 있으니 세간의 평가가 좋아 질 수 있겠는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뭐, 나만 잘 쓰면 그만이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세이혼과 루루가 수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라라가 물약을 제조하던 파랗게 물든 손으로 반기고 있었다.
“쿤. 결국 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가?”
“저녁에 한해서. 넓게 경계를 하면서 사용 할 거니 딱히 위험성은 없다고 보는데.”
“위험하다는 게 아니네. 다만, 네크로맨시라는 것은 부정적인 능력. 다시 한 번 재고해 봄이 어떤가?”
“그래요. 저도 네크로맨시는 좀 아닌 거 같아요. 그냥 잠 좀 줄이고 교대로 관리하면 안 될까요?”
세이혼이 참견을 하자 라라도 말을 덧붙였다.
역시 네크로맨시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총론을 정독하고 그 힘을 익히고 나서야 나도 이해를 한 부분이 있으니까.
“에이. 괜찮지 않겠어? 신 님도 막지 않은 힘이라면서? 쿤, 오빠도 그래서 하는 거죠?”
“루루가 어쩐 일로 옳은 말을 하는구나.”
“매일 하거든요? 하여튼, 신님이 허락한 힘이라면 괜찮을 거 같아요. 설마 오빠가 시체를 되살리고 그러겠어요?”
“이래봬도 연약한 남자라서. 비위 상하는 짓은 안 한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자, 라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혼도 비슷한 얼굴. 어차피 부정적인 인식은 사용하면서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럼……”
“나는?”
“응?”
그때, 어디선가 불쑥 아도란이 나타났다.
옷소매를 보니 살짝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축성지가 신기하다고 재잘거리더니 땅을 파다 온 모양이다. 늪지를 지낼 때는 깨끗하게 돌아다니더니, 이런 능력도 자기 마음대로인 거 같다.
“나는. 안 물어 봐?”
“넌 네크로맨시에 찬성 한다면서.”
“응. 찬성.”
“……그럼 되지 않았냐?”
“그래도. 나도 일원. 물어 봐.”
그제야 아도란이 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거 같다.
쿤이 표정을 미묘하게 했다. 나도 이 일행의 일원이니 그 대우를 해 달라. 이런 의미일까. 마법사가? 그것도 미친 마법사가? 선뜻 믿기도 어렵거니와, 실제로 동료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아직 없다.
‘도움 받은 건 분명 있지만……’
속내를 알기 어렵거니와 그 모습이 과연 전부일지 장담하기 어렵다.
동료로 인정하며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부분만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진실의 돋보기. 그걸 써야 하려나?’
3번의 질문으로 그의 속내를 얼마나 알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필요 할 수도 있다. 쿤이 한 가지 생각을 품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지금은 어쨌든 네크로맨시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나온 것.
“망령제어.”
스킬의 이름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기묘한 감각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끝에 실을 달아 인형을 조작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주변에 닿은 묘한 흐름 같은 것들이 이를 통해 전해졌다.
얼핏 느끼기에는 하푼식 감각수련법의 연장과도 같았다.
바람과 냄새. 소리 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퍼진 망자의 기운을 느낀다는 게 다를 뿐.
‘신기하군. 이 모든 게 망자라는 건가?’
세월에 따라 쌓이고, 정화되지 못해서 형체를 잃어버린 망자의 파편들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느껴졌다. 숨이 콱 막히고, 그 아득한 존재감에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망자라는 것은 삶이 끝나고도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 부랑자. 그 안에 깃들 가장 큰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닌.
그리움이었다.
삶에 대한 그리움.
누리지 못한 삶. 두고 온 가족. 잃어버린 사랑. 생전에 남기고 온 모든 것들이 그리움으로 바뀌어 짙은 늪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후우……”
숨을 내쉬고 아득한 감각의 고리에서 벗어나왔다.
네크로맨서. 그들의 행적을 좋게 보지 않는다 해도, 이 아득함을 이겨냈다는 점에서는 존경 할 만하다. 산 자가 죽은 자의 바다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종 특기로 강화 된 쿤 자신의 경우에도.
“일어나라.”
망자를 당겨서 농지 주변에 늘어 둔 판자 등에 손짓했다.
손끝에 달린 실이 늘어나 이어지는 것처럼, 눅눅한 망자의 일부가 그 명령에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판자 주변에서 맴돌더니 이내 쑥 하고 들어갔다.
“음……!”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반발감.
혼은 혼이 깃들 수 있는 곳에서 안착한다. 나무판자와 망령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 반발감이 시전자인 쿤의 몸을 흔든 것이다.
‘이건 얼마 안 가겠군. 두세 시간 정도인가?’
답답한 압박감을 무시 한 채 판자를 움직여봤다.
망자의 힘 덕분이지 판자는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라 그의 발치로 날아왔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었다.
‘판자가 아니라 농기구라면 조금 더 수월하게 움직이겠군.’
망령은 깃든 물체의 사용 흔적을 읽는다.
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판자가 아닌 호미나 괭이 같은 거였다면 조금 더 움직이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농사를 하기위해서도 그런 물건들은 필요 할 테니, 분지 중앙에 있는 마을로 가서 사 오면 될 거 같다.
투두둑……
힘을 풀자 허공을 날아다니던 판자가 모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망령은 일순간에 해체되어 다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갔다. 바다에서 물 한 컵 떠 낸 정도라 그 정도의 움직임은 티도 안 났다.
“방금 그게 네크로맨시였나?”
“일부를 사용해서 물건에 깃들게 한 거지. 어떤가?”
“흐음. 베사미어가 사용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군. 사기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고.”
“화, 확실히 그러네요. 시체가 없으니까 네크로맨시라는 느낌도 거의 안 들고.”
“날아다니는 판자!”
“판자.”
루루와 아도란의 말은 무시하더라도, 일단 받아들이는 일행의 반응은 썩 나쁘지 않았다. 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어도 일행이 거부하면 꽤나 불편 할 뻔 했다.
“그럼 이 힘으로 농지를 관리하겠다는 건가?”
“익숙해지려면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밤에 깨어서 교대로 일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잠은 언제 자려고 그러나?”
“총론에 의하면 익숙해진 뒤에는 망령만 깃들게 하고는 나는 쉬어도 된다고 하더군. 사람처럼 망령도 반복적인 일로 훈련을 시킬 수 있다고 하네. 뭐, 체력소모야 되기야 하겠지만 그건 물약으로 버텨 봐야지.”
“애완동물인가?”
“뭐……이렇게 해서 집착을 벗고, 갈 길로 갈 수 있다면 나쁜 취급은 아니겠지.”
쿤이 손을 탁탁 털며 물러났다.
네크로맨시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사용자의 체력. 첫 시동이라 그런지 살짝 어지러운 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먹어 둘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어제 먹던 사슴 고기가 남았던가?”
“네. 땅을 파서 묻어 뒀거든요. 아직은 먹을 만 할 걸요?”
“술이라도 한잔 하겠나? 떠나면서 챙겨 둔 와인이 조금 있는데.”
“뭐……한 건 끝냈으니 좀 마시는 것도 괜찮겠지.”
일 끝나고 돌아와 한 잔 걸치자는 가장들의 대화와 같다.
쿤이 씩 웃으며 들어가자, 라라와 루루가 돕겠다며 손을 걷어붙였다. ‘땀 냄새난다. 일단 먼저 씻고 와.’ 핀잔 섞인 배려에 쫓겨나기야 했지만.
“……”
시끄러워진 오두막.
아도란이 밖에서 한참 동안이나 그 안을 바라봤다.
※작가의 말
리빙 호미!!!
플라잉 괭이!!!
갈퀴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