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랙?”
“네. 그렇게 부른다고 해요.”
내 물음에 서율이가 답했다.
제작 발표회가 끝나고 난 뒤, 늦은 저녁을 처리하고 나오는 길이다.
“상류층 모임 같은 건가?”
“비슷해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 중반의 재벌 2세들이 모인 집단이죠. 리더는 남혁 씨가 맡고 있고, 이진혁도 최근에 합류했다고 알아요.”
“그 인간도 재벌 2세인가?”
“아버지가 연극판의 대부 같은 사람이에요. 워낙 인물이 출중하고, 연기가 좋아서 말이 안 나올 뿐이지 시작은 금수저로 했죠.”
이진혁이 가지고 있던 반지는 명백한 이단의 상징이다.
비교하자면 굴락의 펜던트와 비슷하다. 다만, 크기와 힘의 세기에서는 차이가 있다. 펜던트가 야구공이라면 이건 탁구공 정도.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기전 까지는 혐오감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차남혁과 이단의 상징을 가진 이진혁.
관계가 있을까 싶어 서율이에게 묻자 바로 답을 해 왔다.
“넌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냐?”
“그야 저도 들어오라고 제안을 받았으니까요.”
“재벌 2세와는 거리가 멀지 않아?”
“멀죠. 특별 취급이라고 얼마나 생색을 내든지. 솔직히 재수 없어서 거부했어요.”
잘 했죠? 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워서 머리를 쓸어 주었다. 한참이나 돌아다니고 해서 기름이 꼈을 법도 한데, 여전히 찰랑거렸다. 좋은 샴푸 쓰나 보다.
“근데 이진혁은 왜요?”
“나오는 길에 아는 척을 해서. 혹시 그쪽도 개척자일까 해서 말이야.”
“아, 개척자 맞아요.”
“맞아?”“네. 다만, 자신은 영화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싶다 해서 개척자 관련한 인터뷰는 거의 안 하죠. 했으면 아마 남자 쪽 섭외목록에 그 사람부터 올라갔을 걸요?”
차남혁과 이진혁.
둘 다 개척자이며 같은 모임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단의 심벌. 역시 세력 표시에서 내 반대편이 될 존재들은 이단인가? 차남혁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지만, 숨기고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렇다면 크랙이라는 무리 전체가 이단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단’이라는 존재가 세력 확장을 위해서 현대의 인물들에게 접촉을 했다면……베사미어의 표현을 빌려서 속삭임. 그렇다면 기반을 다진 인물에게 손을 뻗는 것이 아무래도 유리하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다.
베사미어의 경우 속삭임은 믿음에 대한 것으로 유혹을 했다고 한다. 광신적 태도를 가졌던 경비대장이나 벤타를 봐도 그것은 확실한 내용. 크랙이라는 모임의 인물들이 모두 그런 종교적 색채를 가졌을 확률은 높지 않다.
이단의 전파에 다른 방식이 있거나, 크랙이라는 모임의 일부가 종교적 성향이거나.
“어느 쪽이든 좋지는 않네.”
“응? 뭐가요?”
“크랙인가 뭐시긴가 말이야. 아무리 봐도 구리단 말이야. 라이오스 쪽이랑 연결이 돼 있는 거 아닐까 싶네.”
“아. 연줄의 통로로?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개를 끄덕끄덕.
전부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다. 믿을 수 없다는 생각 까지는 안 하지만 혹시나 라는 마음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괜히 알렸다가 엄한 경우에 휘말릴 수도 있는 거고.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말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삼촌. 제가 들어가서 싹 하고 염탐 해 볼까요?”
“염탐? 무슨 소리야?”
“저번에 했던 제안 말이에요. 들어가겠다고 하면 받아 줄 거 같은데. 무슨 짓 하는지만 알아내도 좋지 않을까요?”
“아서라. 위험해. 재벌 2세라는 것들이 어찌 놀 지 어떻게 알고 너를 보내냐?”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제 몸은 알아서 지킬 수 있어요. 그리고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인데 미친 짓이야 하겠어요?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도망가면 그만이고.”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미간을 좁히며 어찌 말려야 할까 망설이고 있자, 서율이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아가씨가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왜 이래?
“삼촌이랑 소향 언니가 회사 때문에 골머리 썩는 거 알고 있어요. 세주가 들어와 인원수를 채웠지만 그래도 힘들다는 것도요. 이게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어요. 혹시 또 알아요? 그쪽 애들이 술 먹고 툭 뱉는 소리라도 하나 주워서 올 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거냐?”
“하늘 사랑은……저한테도 굉장히 소중한 곳이에요. 삼촌이 그렇게 되고……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죄책감에 자괴감에. 게다가 개척자라고 알지 못하는 일까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도움을 준 게 소향 언니었어요. 저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돕고 싶다면서. 그래서 연을 맺어 지금까지 왔죠. 언니 아니었으면 아마 그 뒤로도 한참동안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나는 사고 전과 사고 후의 서율이를 알 뿐, 그 사이의 모습은 모르고 있다. 힘들고 괴로워했음은 분명하다. 그 뒤를 받쳐서 위로를 해 준 사람과 회사라면 애착을 가지는 게 당연하겠지
이번에는 어쩔 수 없나 싶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약속을 해야 해. 쓸데없는 곳에 따라가지 말고, 위험 할 거 같으면 바로 도망쳐. 사회적 시선을 고려해서 움직인다고 본질을 너무 간과하지 마. 어차피 아직 몇 년 살아보지도 못한 놈들이야. 술 먹고 제멋대로 놀다보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법이니까.”
“넵! 알겠습니다. 서율 요원, 이해했습니다.”
“장난치지 말고.”
“아잉. 안 어울려요?”
이 아가씨가 진짜로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앙탈부리며 팔에 안겨드는 모습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팔이 뿌듯한 것이 기분은 좋네.
괜히 헛기침 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
[굴락의 펜던트]
집으로 돌아와 인벤토리에 박아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지독한 혐오감이 몸을 강타했다. 이진혁의 반지에서 느껴지던 것은 비교 할 바가 아니었다. 아주 진한 것이 제대로 농축 된 느낌이었다.
멀리서 조리용 젓가락을 뒤집으며 살폈다.
펜던트 앞쪽 작은 걸쇠 부근을 툭툭 쳐 연 다음에 줄을 잡아 흔들어서 뺐다. 탁, 소리가 들리고 검은 돌 두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거였다니.”
심플하다.
이단의 힘을 몸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경비대장이나 벤타처럼 변형 된 신앙으로 괴물로 변신이 가능하다. 반명, 물건에 이단의 힘을 담을 때는 반드시 검은 돌이 요구된다. 이는 일종의 통. 세이혼에게 받았던 당시에 들어있던 힘은 이단의 것과는 완전히 상극이니 어느 하나만을 담는 건 아닌 듯싶었다. 즉, 빛이든 어둠이든 상관하지 않고 담아주는 그릇이다.
“이걸 이렇게 쥐면……”
혐오감을 누르며 검은 돌 하나를 들어 손으로 쥐었다.
새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열기가 손을 통해 전해졌다. 뜨거운 감자를 맨손으로 그냥 쥔 거 같다. 오만상을 쓰면서 참았다. 한 10여초 정도를 그렇게 버티자 열기가 사라지고 돌이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억지로 정화를 하면 돌이 깨어지는 건가?”
아도란이 지키던 검은 바위는 작은 부분이 정화되자 파편을 남겼다.
정화 정도에 따라 부서지기도 하고, 남기도 하는 거 같다.
부서진 파편을 손가락으로 뒤적뒤적 살펴봤다. 대부분이 가루였지만 조금씩 엉켜있는 파편도 있었다. 이를 집어 올려서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검은 돌 위로 올려놨다.
웅……
희미한 진동과 함께 파편이 검은 돌 속으로 스며들었다.
크게 티 나지는 않지만 조금 커 진 것 같기도 하다.
“예상대로군.”
언제부터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모르겠는데, 등장하는 검은 돌을 보면서 이것들이 개별적인 것으로 다가오지가 않았었다. 초승달과 보름달을 보고 다른 달이라 말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면 이해가 빠르려나? 하여튼 이단과 섞여서 등장하는 검은 돌을 보면서도 이것들이 땅 파서 나오는 개별적인 돌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도란이 지키고 있던 거대한 검은 바위를 보고 난 뒤 더욱 확신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돌들은 본래 하나였다……라는 가정.
“그 조각들도 합칠 수 있겠군.”
쿤이 베사미어가 만들어 둔 탑에서 베어낸 뒤 쟁여둔 파편들. 당시에는 손으로 정화를 하지 않고 그대로 검으로 베어냈다. 그래도 정수와 경험치는 그대로 들어왔으니 주체인 나만 활약하면 결과는 같은 거 같다. 그러고 보면 베사미어 지팡이에 박혔던 돌이 아쉽다. 그냥 정화를 한 뒤 부서진 파편을 치워버렸으니까.
뭐, 쿤도 눈치 챈 것 같으니 다음부터는 잘 모아 두겠지.
“문제는 그 돌이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사실……”
나야 공물을 통해서 전해졌다고 하지만, 이진혁은 어떻게?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 이단에 대한 공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는 힘들다. 만약 그들도 신으로 추앙받아 공물을 받은 거였다면 죠엘의 경전에 나왔겠지. 물론, 그녀가 정보를 감추었을 확률도 있지만, 매일같이 고백의 영향권에 넣어 대화를 나누는데 그럴 거 같지는 않다.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것은 바로 게이트.
게이트를 통해서 검은 돌을 채취해서 들여오는 것이다. 아니, 이단의 전파 자체가 검은 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즉, 개척자 중 일부가 검은 돌을 발견했고 이를 들여왔다.
그 과정에서 이단의 힘이 현대에 퍼졌고, 일부가 수용하고 있다. 마치 원주민에게 종교를 전파하듯 신문물을 통한 연결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내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이단의 기운을 추적하고 처리할까? 이건 절대적으로 무리다. 개척자나, 개척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의 인물을 끌어들여 세력을 이루는 것과 달리, 개별적으로 이를 다루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들이 이단의 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모아 그룹을 이룬다면 이와 비슷한 것으로. 그들이 검은 돌을 들여와, 이 힘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면 이를 억제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는 서율이가 확인을 하러 갔고, 남은 하나가 문제다.
“먹이는 거지.”
화분과 씨앗. 그리고 물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쿤이 오염된 경작지를 정화시키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먹는 것이 필수다. 안 먹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 먹을 것에, 이단을 정화 할 수 있는 힘을 싣는다면 어떨까?
정화미. 정화보리. 정화고구마?
뭐……이름은 조금 그래도 대강의 의미는 이러하다. 축성지를 이루고, 생명수로 씨앗을 발아시켰을 당시 힘의 일부가 씨앗에 계속 남아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축성지의 기운은 이단에 저항하는 힘. 즉, 정화의 힘이다. 미약하지만, 누적해서 먹게 되면 그 힘이 이단의 힘을 정화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약화라도 시키든가.
물론, 조건이 까다롭다.
일단 500의 신성점수를 소모해서 축성지를 펼쳐야 한다. 그리고 그 땅 위로 특별한 생명수를 뿌려야 한다. 생명수는 정화수를 만들다가 튀어나온 일종의 레어 아이템. 다시 만들자고 덥석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칭호. 연금술사의 그릇. 행운.
삼박자에 낮은 확률을 꿰뚫는 특별한 기연까지 더해져야 간신히 나올 수 있는 물건이다.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일단 지금은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의 실험.
“팔자에도 없는 농사를 지게 됐군.”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라도 가야 할까?
화분을 보는 내 생각이 깊어졌다.
#
“그래서 씨앗을 사고 싶다는 건가?”
“네. 살 수 있나요?”
한참 동안을 씨앗과 씨름하던 나는 한 가지 생각에 머리를 쳐야 했다.
다른 것들은 전부 특별한 물건을 쓰면서 왜 씨앗은 평범한 것을 쓰려 했나? 씨앗도 특별하면 좋지 않은가?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벨을 찾아왔다.
2번째 방문. 예의 어지럼증을 느끼고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양 측 세상에 지나치게 영향을 주지 않을 물건이라면 이 정도가 있겠군.”
***
이름 : 로토의 씨앗(99)
가격 : 정수(5) / 500점
능력 : 땅에 심으면 로토가 나온다. 물과 햇빛을 많이 요구한다. 그늘진 곳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
이름 : 헤그시아의 씨앗(99)
가격 : 정수(5) / 500점
능력 : 땅에 심으면 헤그시아가 나온다. 관심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란다.
***
“작물에 대한 설명은 없는 건가요?”
이름만 가지고 선택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작물이 가지는 특성이 도움이 돼야 살 이유가 있다. 쌀이나 보리와 같은 작물이면 그냥 사다가 심으면 그만이지, 포인트를 낭비 할 이유가 없다.
“자네가 하려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함이겠지?”
“정말 다 보고 있군요.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헤그시아를 추천하네. 헤그시아의 경우 자네 세상의 쌀과 흡사한 모양과 맛을 가졌지. 다만, 관리를 하지 않아도 잘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질기고 토양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나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알아듣겠지?”
당연하다.
축성지에 정화수. 혹은 생명수를 뿌려서 작물을 재배하는데, 토기를 빨아들이는 힘이 강하다는 건 그만큼 신성력을 많이 머금는다는 의미. 이단을 견제하기 위한 물건으로는 이보다 좋은 게 없다.
“근데 쌀과 비슷하다고 그랬죠? 맛은 어때요?”
“음. 내 입장에서 자네 세계의 입맛을 표현하기는 힘들다네. 하지만 적어도 실망하지는 않을 거네.”
“뭔가 미묘하게 장사꾼 같은 말투네요.”
“장사꾼이니까. 하하.”
살까 말까.
고민이 되지만, 어차피 장기전을 생각하면 시도해 볼만한 일이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구매를 결정했다. 수확해서 맛없으면 찾아와서 난장을 피우겠다고 다짐하면서.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살 물건이 있어요.”
“오 또 말인가? 이거 우수고객으로 등록을 해야겠군.”
“말만 하지 말고 할인도 좀 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조금 더 사면 고려해 보겠네.”
농담 따먹기 조금.
그리고 본론을 꺼내들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샀어야 할 지 모르는 물건.
너무 늦게 떠올린 감이 없잖아 있다. 아도란을 통한 점수의 수급이 넉넉해 졌을 지금이야 말로 망설이지 않고 구입해 둬야 할 시기 같다.
“재미있는 선택이군. 아니, 자네 입장에서는 최선인가?”
남은 점수를 탈탈 털어서 원하던 물건을 구입했다.
※작가의 말
농사...농사를 짓자!!!
타노스가 되는 거다!!
* 아아 라는 감탄사가, 긍정의 경우에는 일본식 표현이었군요.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앞으로 사용을 자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