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게 펼쳐진 길 위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무언가 볼 만 한 거리도 있는 걸까. 바구니를 맨 여성부터, 코 흘리는 아이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개를 기웃거리기 바빴다.
“어이, 나도 좀 받자고. 혼자만 그리 챙겨서야 쓰나?”
“어허, 이 사람. 받고 싶으면 줄 서라고. 저기 서인에 손도장 찍는 건 안 보이나? 자네 농지부터 확인해야 나눠 줄 거 아닌가?”
“어, 어? 그랬나? 허허. 거 참. 난 또 그냥 달라면 주는 줄 알고.”
몇 사람이 멋쩍게 무리의 뒤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둥글게 서서 구경하는 무리를 제외하고 상당수는 길게 늘어서 줄을 이루고 있었다. 선두에서는 정리 된 책장에 손도장을 찍으며 무언가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다음. 어……그래. 젠토 뒷집에 살던 한슨이었지? 네 토지 대장이……아. 여기 있군. 자, 손도장 찍어라.”
“이거만 뿌리면 작물이 그냥 쑥쑥 자라는 거 맞지요?”
“속고만 살았나.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저 아래쪽에 임시 예배실 만들어 뒀으니 그쪽으로 가 봐. 교단 분이 설명을 해 줄 테니까.”
“서 준경 교……몇 번 들었지만 역시 아직 어색하네요.”
“뭐, 오래전에 있던 신이라니까. 그래도 이럴 때는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곳이 최고야. 믿고 자시고 가서 기도나 좀 드리고 은총이라도 내려 달라고 빌어라. 거, 은총 조각이라도 떨어지면 네 총각 딱지도 뗄 수 있을지 모르잖냐? 응?”
“누, 누가 총각이래요!? 아저씨, 농담도!!”
새빨개진 얼굴의 한슨이 쿵쿵 거리며 멀어져갔다.
물론, 손 들린 씨앗 주머니는 놓지 않았다.
“그럭저럭 잘 돼 가는군. 재고는 어때?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어?”
“거의 바닥났어요. 한 번 더 할 수 있겠어요?”
“남은 걸 다 쓰고 털자. 슬슬 출발 준비를 해야 하니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쿤과 라라였다.
행렬 중앙에서 나눠주는 것은 씨앗이 담긴 주머니. 이 씨앗은 땅의 지기를 회복시키는 힘이 있어, 농번기에 상한 땅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쿤과 라라는 아이린에게서 신앙의 전파를 허락받은 뒤, 포교의 일환으로 이를 사용하였다.
사실 이 씨앗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연금술사의 그릇으로 물약을 제조하던 중에 우연하게 나타난 특등급의 생명수 덕이었다. 본래 만들려고 한 것은 [정화수]. 사기가 암암리에 퍼진 농지를 정화하기 위해서 제조 목록에 있던 것을 겨우겨우 재료를 챙겨 만든 것이었다.
헌데, 그것이 칭호와 행운. 연금술사의 그릇이 가진 증폭 효과로 대단한 물건이 탄생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생명을 샘솟게 하는 물. 다만, 본래 의도가 땅의 정화였기 때문에 식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효과가 없었다.
쿤은 이것을 두고 한 동안 고민하다가 가장 간단한 답을 내 놓았다.
땅을 정화하면서 농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 바로 씨앗이었다. 아도란에게 받았던 보석을 공물을 더 바쳐 신성점수를 확보한 후에 축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씨앗을 심고 생명수를 부었다.
축성지와 생명수의 영향을 받은 씨앗은 곧 발아가 되었고, 쿤은 이를 캐서 농부들에게 나눠 준 것이다. 축성지를 벗어났기 때문에 본래의 것보다는 효율이 떨어지지만 생명수의 힘은 제대로 받았기 때문에 씨앗의 능력은 예상대로 나타났다.
씨앗을 심자 사기로 오염된 땅이 회복되고 주변에 있던 시든 작물들이 활력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농부에게 작물이 살아나는 것보다 더한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나눠주는 사람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서 준경]
쿤은 홍보의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씨앗에 실린 힘이 서 준경이라는 이름의 신에게서 전해졌음을 알리고, 제단의 건설을 홍보했다. 교리는 균형. 주는 것만큼 받는다. 일 한 만큼의 대가가 돌아온다. 간단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교리를 설파하고, 남는 신성점수로는 다치고 병 걸린 이들을 치료했다.
세이혼은 지나치게 일을 크게 벌이는 게 아닐까 걱정했으나, 쿤은 그럴수록 담대하게 나가야 한다고 말을 했다. 외모를 바꾸고 란을 요새에 두어 숫자를 다르게 했다. 신앙의 전파는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닌 터. 타 교단에서 이에 관심을 가질지라도, 본래 일행의 모습과 연결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그 덕에 교단의 홍보는 제대로 됐다.
오가며 ‘서 준경’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덕에 경험치가 시끄러울 정도로 자주 쌓였다. 누적된 양이 상당했는지 단계도 하나 올랐다.
***
이름 : 쿤 타이 / 서 준경(다섯 번째 단계) 종족 : 인간
칭호 : 이단 심판관(이단에 대한 징벌)
이단 수집가
제약사
힘 : 19 민첩성 : 16
체력 : 22 지능 : 16
스킬 : 맹약, 인고의 시간, 상자 소환, 비약제조
특기 : 중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집중 사고), 하급 은신, 하급 행운, 하급 화술(고백), 하급 위기 감지, 하급 청력, 중급 체력 단련, 중급 힘 단련, 하급 민첩성 단련(+), 학생의 자세, 정리의 달인, 하급 위압, 하급 요리(+), 하푼식 감각 수련법(1단계), 강화신체, 발굴, 약초꾼의 후각
축복 : 하급 신관의 축복, 하급 상처 치유의 축복(+), 하급 질병 치유의 축복(+)
하급 성기사의 축복, 신성 대지의 축복, 능력의 축복
제단 : 샤타콤, 앙크투, 레스터 요새
신성 점수 : 510
루루(하급 신관) +
하급 축복 개방 - 50
라라(중급 신관)
개인 스킬 : 치유의 손길
개인 특기 : 약초꾼의 후각
개방 스킬 : 하급 축복 개방 - 50
란(하급 신관) +
하급 축복 개방 - 50
세이혼(하급 성기사) +
신성한 힘 개방 - 50
아도란(하급 신관)
하급 축복 개방 - 50
***
이것이 그 결과 변화된 상태.
능력의 축복이라는 것이 하나 생기고, 질병치유와 상처치유가 승급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요새의 사람들에게 전도 겸 치료행위를 했더니 경험치가 충분하게 쌓인 것이다. 덕분에 보석을 넘겨 얻었던 신성 점수가 다시 바닥나기는 했으나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스터 요새는 인구 표기가 5000이나 되는 지역이다.
아라콤은 950이고, 앙크투는 750이다. 둘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다. 제단의 건설만 완성된다면 신앙점수의 획득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 미래를 위한 투자. 할 때는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좋았다.
“와!! 와아~!!”
“불이 날아다녀!! 세상에 저거 어떻게 하는 거야!?”
“아저씨 마법사에요? 마법사죠!? 네?”
쿤이 그렇게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있을 때, 임시 예배당 부근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아도란 앞으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불꽃이 하늘을 날고 꽃이 날개를 달고 펄럭였다. 마술같이 보이는 마법. 쿤이 방해하지 말고 앞에서 재롱이나 피우라 했더니 저러고 있는 중이다.
매일같이 마법을 잊고, 매일같이 마법을 떠올린다.
그게 아도란의 모습이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신비를 쫓은 덕에 기억에 넘치는 마법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이를 망각시켜 미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물론, 그것을 판단했을 당시에 이미 미쳐 있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잊어야 하는 마법사. 이 설명 자체는 지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차이를 느끼게 하였다.
“그럼 복 많이 받으세요!! 안나 신도님!”
예배당 문이 열리고 나이 찬 숙녀 둘과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나왔다.
주근깨는 루루였다. 숙녀 들이 숙이는 허리의 수 만큼 같은 숫자로 인사를 하고는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서 준경’이라는 교단의 교리를 설파하라고 자리를 만들어 놨더니 하루를 끙끙 거리며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늘어놓고 있다.
영웅담은 자신이 제일이라나.
어차피 각색할 경전조차 없으니 새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쿤이 걸어온 길을 덜고, 덧대어 나름대로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어차피 대다수의 창생신화 역시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허풍 좀 많이 더했다고 양심에 걸릴 건 없었다.
“아, 오빠!”
신나게 인사하더니 이제야 발견한 모양이다.
루루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요새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하고 머문 것이 이제 5일째. 그 동안 쫓긴 반동인지 쉬는 사이에 얼굴이 많이 폈다. 뭐, 지금 것이 진짜 얼굴인 것은 아니지만.
“아예 눌러앉을 기세인데?”
“헤헤. 항상 듣기만 하던 걸 남에게 해주니까 이렇게 즐거운걸요. 기회가 되면 악기도 하나 배워 바드나 돼 볼까 해요!”
“바드치고는 목소리가 궁색하지 않나?”
“윽! 아빠는 내 목소리가 제일 예쁘다고 했어요!”
“어련하실까. 그보다, 짐 꾸려서 나와라. 슬슬 출발 할 채비를 해야지.”
“아……벌써 출발해요?”
루루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긴 여정 끝에 숨을 돌렸으니 아쉬운 것도 이해를 한다. 하지만 벌써 오일 째. 이 이상 머뭇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다. 추적자가 요새로 방향을 잡지 못했다 해도, 범위를 좁히기 전에 빠져나갈 필요성은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슬슬 주변 눈치도 있고 하니……’
감찰관이 죽고, 그 내용은 수도로 전달되었다.
그 사이 업무는 예하의 문관들이 처리하게 돼 있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정치를 해 온 사람들. 선민관과 남다른 관계인 듯 보이며, 포교까지 하는 무리를 그리 달갑게 보고 있지 않다.
신앙과 정치가 분리된다고는 하지만, 밥그릇 빼앗으러 온 무리로 선을 그어 버리면 뭐를 하든 고깝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씨앗을 나눠주는 것도, 제단을 세우는 것도 이래저래 눈치를 주고 있다. 지금에야 상관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 불만이 다른 방식으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드는 건 사양해야지.’
제단의 건설과 포교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지금 이 시점이 떠나기 딱 좋은 시기라 할 수 있다.
“가자. 가는 길에 류트라도 하나 사 주마.”
“진짜요!?”
늘어진 루루를 다독이며 요새로 걸음을 돌렸다.
#
선민관의 집무실에 도착하니 안쪽에서 세이혼과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쿤이 걸음을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엿듣는 게 좋은 취미는 아니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꼭 이렇게 빨리 가셔야 하나요?”
“아도란이 그렇게 말을 하더군. 변형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이 오늘 까지라고. 내일이면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게 될 터. 내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는 걸 알잖아.”
“하지만……가면이나 후드로 가리고 있으면 되잖아요. 이미 오일이나 있었는데 며칠 더 있는 다고……!”
“아이린. 내 작은 새여. 그럴 수 없음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아직도 그날의 일로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을 터. 이대로 남는다면 네게 해를 끼칠 뿐이다.”
“아……어찌하여 그 일이 오라버니의 잘못이란 말인가요?”
“잘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오라버니!”
“그만, 됐다. 지금은 떠나는 것이 좋겠지. 운이 좋아, 란아의 병이 치유되고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이 지워진다면 그때가 되어 다시 한 번 만나 보자꾸나.”
그렇게 말 한 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쿤이 손짓을 한 뒤 라라 등과 함께 조금 뒤로 물러났다. 이내 문이 열리고 세이혼이 얼굴을 드러냈다. 지치고 힘든. 그리고 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방으로.”
하푼식 감각법에 정통한 그가 밖의 기척을 놓쳤을 리 없다.
짧게 말 하고 앞장서는 그의 뒤를 쿤 등이 따라갔다. 일행 사이로 말없이 발자국 소리만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세이혼의 방에 들어왔을 때, 그가 문을 닫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떠나게 되면 말 할 기회를 잡기 어려우니 지금 이야기를 하지.”
“불편하면 굳이 안 해도 괜찮다.”
“아니, 괜찮다. 란을 구해준 것도 너고, 아이린이 무사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도 너다. 은인이라 단순히 부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빚 졌어.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감추는 것 없이 온전히 너를 대하고 있음은 증명하고 싶다.”
세이혼이 진지하게 답을 하고는 벽난로 위에 올려둔 위스키를 꺼내들었다.
향이 진하고, 독하다. 잔에 따르고 하나를 들어 쿤에게 건넸다. 거부 할 수 없는 분위기. 그가 받아서 한 입 마시고는 구석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루루와 라라는 어찌 할 바 몰라 눈동자만 굴리다, 손짓하는 아도란을 따라 구석 양탄자 위에 쪼그려 앉았다.
“자네라면 눈치 채고 있겠지만, 란은 아이린의 딸이네.”
“……네!?
“헉!”
놀란 건 라라와 루루 뿐.
쿤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 눈빛. 그 동안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아이린과 만난 것은 벌써 13년 전이네. 하푼이 해체되고 추격대에 쫓겨 변방을 전전하고 있을 때였지.”
“앙크투를 지나쳐서 온 건가?”
“아아. 오랫동안 신세를 졌으나, 결국 그들과는 완전히 융화 될 수 없었지. 얼굴을 숨기고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곳으로 들어왔었네. 변방이기도 하고, 북부 왕국과도 닿아 있으니 여차하면 도망가기 쉬울 거라 생각했던 거지.”
세이혼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 아이린 언니와는 어떻게 만났어요?”
구석에 박히 벽지에 난 곰팡이처럼 웅크려 있던 루루가 물었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이야기는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세이혼이 힐끔 그녀를 보다 턱을 올리며 답을 했다.
오래된 일을 떠올리며.
“추격대를 따돌리고, 상처 입은 몸을 치료하고 있었을 때였지. 공무를 배우기 위해 지방을 돌던 그녀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이.”
“아……”
“남다를 것도, 특이할 것도 없었다. 상처를 치료하며 같이 있는 시간이 늘다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지게 된 거니까. 그때만큼은 추격대도 잊고, 젊었을 때로 돌아가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아이린의 언니와 하게 된 거군요.”
쿤이 이야기에 끼어들고, 세이혼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가 고개를 흔들고는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말을 했다.
“같이 있던 걸 들키게 된 거지.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어. 그녀도 아이린처럼 잘 대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과분한 애정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내 정체를 알게 된 거지.”
“도망자인 것을 알았던 거군요.”
“그래.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가 변하기 시작했다.”
세이혼이 위스키를 잔에 넘치도록 담은 뒤, 그대로 들이켰다.
독한 술로 무언가를 잊고자 한 것일까. 눈가가 붉었다.
“그녀는 내 정체를 말하지 않는 것을 대가로 결혼을 요구했어. 집요할 정도로. 어떤 설득도, 회유도 통하지 않았지. 친동생인 아이린이 울고불고 매달려도 꿈쩍하지 않았어.”
“독한 사랑이군.”
“독하지. 아주 독했어. 아이린과 함께 도망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내 처지를 생각하니 그것도 쉽지 않더군. 그래서 망설였지. 어쩌면 그 선택이 가장 좋았을는지도 모르는데. 후회는 항상 뒤늦게 찾아오지.”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란은요?”
루루의 물음에 세이혼이 쓰게 웃었다.
“이래서 인생을 두고 한 길 앞을 예측 할 수 없다 말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수락하고 절망에 허덕일 때, 아이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세, 세상에! 그걸 알았으면 가만히 안 있었을 텐데……”
“아니. 놀랍게도 그녀는 침착하더군. 도리어 이렇게 말을 했어. 자기가 아이를 키우겠다고. 아이린의 아이를. 란을 자기가 맡아서 키우겠다고 한 거야.”
“그, 그럴 수 있나요?”
“글쎄. 지금에 와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물어 볼 수도 없지만……아마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온전히 손에 넣고 싶어 했던 거 같다. 실제로 그녀는 란에게 매우 잘 대해주었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무렵에도.”
독심일까 정말 사랑일까.
가지지 못했던 한 가지마저 독점하려는 여자의 마음을 쿤은 이해하지 못했다. 세이혼이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 병을 탈탈 널어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그렇게 란이 엄마의 얼굴을 인식하는 나이가 됐을 무렵, 요새의 사람들 중 일부가 나를 알아봤다.”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요?”
“아아. 처음에는 소문으로. 그 다음에는 확신으로. 마지막으로는 검과 창으로.”
“아……! 그래도 그 동안 같이 지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 사람들을 탓 할 일은 아니지. 공화국 령 수배지 전단에 떡하니 붙어있는 사람인데. 그때까지라도 버틴 게 운이었지. 뭐, 어쨌든 그렇게 된 이후 결국은 나도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이라면……요새에서 도망치고자 한 거군요?”
세이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에 했어야 할 선택.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한 번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나와 란. 그리고 아이린. 셋이 도망치고자 한 거야. 하지만 하늘이 우리를 싫어 한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 하지 못했던 선택의 여파인지. 도망치던 우리 앞에 그녀가 나타났지.”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실랑이와. 몸싸움. 처절한 감정의 편린이 오고갔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이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눈 꼬리 끝에 달린 것은 눈물일까. 란을 구하기 위해 몸 던졌을 때의 처절함은 아니지만, 가슴 깊숙이 박힌 아릿함이 엿보였다.
“그녀는. 외벽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고, 소란에 몰려온 병사들에게 우리는 포위당했지. 아무리 내가 강해도 둘을 모두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무리. 아이린이 남아 사람들을 제지하고 있을 때, 나와 란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아! 어떻게 해. 그대로 생이별을 한 거예요? 지금까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혼은 빈 위스키 병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붉고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지금과 같다. 다시 공화국 내부를 전전하다 너희를 만나게 된 거지. 사실, 흑열병을 치료하고자 함도 있지만, 혹시나 너희를 돕는 일이 내 목에 걸린 죄명을 씻어내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다. 어쩌면……우리 가족이 다시 뭉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루루는 이미 울고 있고, 라라도 훌쩍이는 중이다.
“란은 어찌 할 생각이지?”
“란은……”
쿤이 물었다.
사정이 이리하다면 세이혼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 하지만 란은 다르다. 이미 몇 년이나 흘렀고, 성장한 그녀를 두고 과거를 찾는 사람이 있을 거 같지는 않다. 험난한 여행길에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은 좋지 않다 생각한 것이다.
“아이린에게 맡겨야지. 병이 재발한다고 해도, 일단 이곳에서 대처 할 수 있을 테고. 더 이상 따라오며 고생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음. 그렇다면 그녀를 중급 신관으로 올리고, 생명력 관련된 능력을 부여하지. 제단 주변에 축성지를 마련해 두기도 했으니, 만약의 일이 일어나도 일단은 괜찮을 거네.”
“고맙군. 이래저래 모두 다. 이 빚은 어찌 다 갚아야 할 지 모르겠어.”
“빚이랄 것이 있나. 동료고, 가족이고 그런 건데.”
쿤이 세이혼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의 사정을 이해하는 순간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마음이 넘쳐 올랐다. 이리도 자신이 자상했나 싶지만, 거짓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승급에 들어가는 점수? 아깝지 않다. 그렇게 해서 란이 안전 할 수 있다면.
“삼촌! 꼭, 현상금 풀어서 돌아와요! 란도, 아이린 언니도 같이 살 수 있게 해 드릴게요!”
“그래요. 아직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공왕이 저희의 부친이라고 하잖아요. 반드시 그럴 수 있도록 노력 해 볼게요.”
“둘 다 고맙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구석에 박힌 아도란이 자기도 껴 달라며 빙글빙글 돌아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네 사람은 꽤나 오랫동안 끈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작가의 말
예약연재입니다. 잘 올라갔쥬?
이것으로 요새 편은 끝났습니다.
* 전편 아이란과의 대화 부분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으니 그냥 넘어가도 무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