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호흡 사이로 줄어드는 거리.
쿤의 어깨가 지근거리의 병사를 후려쳤다. ‘컥!’소리와 함께 몸이 휘청거리고 틈이 벌어졌다. 팔꿈치를 역으로 쳐 부러뜨리고 손에서 풀려나는 검을 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베었다.
핏물이 얼굴에 튀었다.
병사는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가는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무너지는 시체를 발로 걷어 찬 뒤 좌우로 검을 베었다.
어깨와 허리.
붉은 선이 그어졌다. 환상에 허우적거리는 병사들은 쿤의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이는 영구적이지 않다. 라라가 던진 것은 [미친 꽃망울]이라는 이름의 물약. 일시적으로 환각을 유도하는 힘이 있었다. 효과는 강하지만 지속시간은 짧다.
“크, 크아아아!!!”
비명소리와 검이 어깨로 떨어졌다.
전진해서 팔을 쳐 내고, 턱을 후려갈겼다. 머리가 들리고 목이 눈에 들어왔다. 장작을 패듯 장검을 휘둘러 그대로 베어냈다. 장검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다. 핏물과 함께 잘린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네노오옴!!”
“……!”
그 순간, 고함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델포이. 눈이 시뻘건 것이 환상을 억지로 깨고 나온 듯 보였다. 정신력이든 집착이든 대단한 부분이었다. 쿤이 검을 비스듬히 들어 일격을 방어했다.
“큭!”
둔탁한 충격이 몸을 흔들었다.
굉장한 강검. 힘을 흘렸음에도 충격이 대단했다. 그나마 상대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 제대로 맞았다면 검 째 베였을 확률도 있었다.
‘세이혼은?’
지금은 그의 힘이 필요하다.
쿤이 곁눈질로 살폈다. 그는 이미 장내로 들어온 병사의 태반을 베어내고, 문가에서 서성이는 적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결판이 날 거 같았다.
“오너라, 망자들이여!!”
하지만, 델포이와 검을 대면서 베사미어를 놓치게 돼 버렸다.
그녀가 바닥을 기어 후면으로 도망치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네크로맨시를 숨기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은 모양이다. 검은 기운이 손끝을 타고 퍼지더니 점점이 사라져갔다.
신성 대지의 축복은 이단의 힘을 정화한다.
네크로맨시가 음험한 능력임은 분명하지만, 정화의 대상에는 들지 않은 것. 이내 괴이한 울음소리와 함께 방문 쪽으로 일단의 무리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검은 로브……!’
앞서 소환했던 해골과는 다른 존재들.
하나하나는 그리 대단 할 거 없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위협적이다.
“시, 시체? 어떻게 된 거야!?”
“뭐야 이거? 교단의 일꾼이라는 놈들이 모두 시체잖아!”
다만, 다급히 불러왔기 때문일까.
그들 중 일부의 모습이 밖으로 드러났다. 썩어 문드러진 얼굴에 방 안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병사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델포이의 명령을 따랐지만, 아예 눈 먼 장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크……! 멍청한 늙은이.”
“시끄러워!!! 다 죽여 버리겠다! 감히 이몸을 능멸해!? 네놈들은 죽음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어둠 속에서 배회하거라!!”
까만 어둠이 바닥으로 몰려왔다.
네크로맨시의 능력. 이단이 제거되고 난 뒤에는 오히려 신성 대지의 축복을 무시하고 들어왔다. 이판사판. 막 나가자는 모습이었다. 역정 내는 델포이도 무시하고 있었다.
챙그랑……!!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베사미어의 몸이 휘청거렸다. 깨진 약병과 녹색 물. 뒤에 서 있던 라라가 무언가 던진 것이다. 시큼하고 텁텁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우……우웨에에에엑!!!”
그리고 곧바로 베사미어가 허리를 굽히며 속의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라라가 던진 것은 [썩은 시궁창]이라는 이름의 물약. 쿤이 도감에서 발견하여 라라에게 알려 주고, 따로 만들어 둔 물건이다. 효과는 아주 단순해서 악취를 내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마법사나 네크로맨서처럼 무언가 집중을 해야 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매우 효과적이다.
이를 증명하듯, 바닥을 기어오던 어둠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문 밖을 배회하던 검은 로브의 무리가 동작을 멈췄다. 주인인 베사미어의 명령이 없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세이혼!!”
“음……!”
이때가 틈. 쿤이 다급히 외쳤다.
세이혼이 옷을 올려 입을 막은 채 뛰어 들어갔다. 갈피를 못 잡아 허둥거리는 병사가 그를 막아섰지만, 성난 호랑이의 돌진을 개구리 한 마리가 막을 수는 없다. 안면에 터지고 나가떨어졌다.
“우……우우에에엑! 우엑!!”
베사미어가 위기를 느끼고 눈물과 토사물을 토해내며 손을 흔들어 봤다. 하지만 이에 망설일 세이혼이 아니다. 아름다운 선을 그녀의 몸 위로 그었다. 자글자글 이어진 주름과 당황으로 얼룩진 눈. 아직 죽음을 체감하지 못한 머리가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처박혔다. 자신이 토해놓은 토사물 위로.
풀썩. 풀썩.
동시에 검은 로브의 무리들 역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들을 구축하던 힘의 근원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시체는 시체로. 썩은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매워갔다. 가뜩이나, 썩은 시궁창 물약으로 오염돼 있던 방 안이 더욱 지독하게 변해버렸다.
“병사들은 들어라!! 방금 쓰러진 베사미어는 악독한 네크로맨서!! 델포이와 손을 잡아 나를 해친 장본인이다! 눈에 있다면 보고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라! 너희가 상대 할 자는 이들이 아니라, 저 배신자 델포이다!!”
기다렸다는 듯, 아이린이 외쳤다.
아직 회복이 안 되어 몸이 엉망일 텐데도 목소리에서 힘이 넘쳐났다.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에, 남아있던 병사들이 당황을 했다. 진실임을 깨닫고 당황을 했거나, 줄을 잘못 선 것을 알아 당황했거나. 어느 쪽이든 상황을 주도하고 있던 델포이의 입장에서는 안 좋은 일이었다.
“멍청한 소리를 귀 담아 듣지 마라! 저것들까지 전부 저자들의 농간이다! 나를 따라라! 승리하는 자에게는 금화를 내리겠다!”
“그, 금화!?”
“금화라고?”
돈에 좌우되는 우매한 인간들 같으니.
쿤이 이를 갈았다. 여관에 두고 온 짐만 찾아 올 수 있다면 보석을 뿌리며 회유 할 수 있을 텐데. 몇 개라도 숨겨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아쉬움에 혀를 찼다.
“주머니.”
“……!”
그때, 바닥을 뚫고 불쑥 올라오는 머리 하나.
아도란이었다. 쿤이 대경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어쩐지 재밌어 하는 말투로 답을 하고는 주머니 하나를 툭 던졌다.
절그럭. 보석 굴러가는 소리가 큼직하게 들려왔다.
“멈춰! 선민관을 도와 악도를 처치하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보상을 내리겠다.”
당황스럽지만, 어쨌든 수단이 들어왔으니 일단 써 먹어야지.
쿤이 보석을 바닥에 뿌리며 외쳤다. 세이혼이 승기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문밖에도 아직 병사가 많은 터에 적을 늘려서 좋을 건 없다.
“보, 보석이다!”
“세상에 저 루비를 봐!”
병사들이 언제 휘황찬란한 보석들을 본 적이 있겠는가.
눈 튀어나올 표정으로 떨어진 보석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때가 결말을 지어야 할 때. 쿤의 행동을 받침 삼아 아이린이 외쳤다.
“선민관의 권한으로 말한다. 배신자 델포이를 잡아라!!”
하나 둘 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있다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 편 가름에 중요한 것은 결국 이득이다. 어차피 절대충정을 발휘하는 이들도 아닌 터. 한 번 돌아서는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었다.
델포이의 얼굴이 악귀마냥 일그러졌다.
“네년이!! 핏줄 하나 타고난 것으로 선민관이 된 주제에 나를 몰아내려고 해!?”
“시끄러워! 당장 저 배신자를 처리해라!”
“네년은 죽이고 간다!!”
델포이가 바닥을 차고 튀어나갔다.
목표는 당연히 아이린. 먹이를 노리는 짐승과 같은 눈빛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 둘이나 있다.
세이혼이 정면에서 검을 맞대고 쿤이 옆으로 쳐 들어갔다.
충돌에 델포이의 몸이 휘청거리고 틈으로 쿤의 검이 스쳐갔다. 갑옷조차 입지 않아 옆구리가 베였다. 핏물이 베어 나오자 그의 얼굴이 더욱 악독하게 일그러졌다.
“그아아아아!!”
굉장한 힘.
세이혼의 몸이 살짝 떠올랐다. 그대로 밀쳐내고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검격을 쿤이 몸을 숙여 피해냈다. 머리카락이 몇 개 잘려서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단이 아니라서 징벌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 하지만……’
쿤이 몸을 빼며 외쳤다.
“가속 물약!”
“여, 여기요!”
뒤에서 날아오는 느낌이 난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약을 잡아 입구를 입으로 땄다. 블루베리 향과 비슷한 냄새. 시선을 델포이에게 둔 채 그대로 넘겼다. 알싸한 맛과 함께 눈앞에 흐려졌다.
‘집중. 집중.’
가속 물약. 일시적으로 육체의 모든 반응을 가속시키는 물약이다. 움직임, 반응속도, 연산속도 등. 모든 것이 상승한다. 하지만 효과가 짧고 이 순간적인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용이 쉽지 않다. 더군다나 재료 역시 흔하지 않다. 요새까지 오는 와중에도 겨우 한 병을 만들었을 정도.
[냉정한 사고] - [집중 사고] - [하푼식 감각수련법]
순식간에 특기들이 반응했다.
혼란을 냉정한 사고가 바로잡고, 가속되는 반응을 집중 사고가 제어했다. 육체의 움직임은 하푼식 감각수련법이 조율했다. 사람은 평소와 조금만 달라도 이질적인 느낌을 받고 적응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쿤은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특기들이 있다.
가속으로 일그러진 시야가 본래의 상태로 돌아오고, 이미 다루던 것처럼 육체의 반응이 손끝에 잡혔다.
‘쓰고 나면 탈력감에 무력화 되는 것이 단점이지만……’
적이 하나만 남았다면 이보다 좋은 물약은 또 없다.
쿤의 몸이 지면을 차고 앞으로 튕겨나갔다. 바람과 경물이 밀리고, 일그러진 델포이의 얼굴 주름이 하나하나 시야에 잡혔다.
“너으어어어어……”
벌어지는 입술과 일그러져 들어오는 목소리.
뭐라는 걸까. 알아듣기 어렵고, 알아듣고 싶지도 않다.
날에 닿는 저항감.
생을 끊어내는 단말의 쾌감을 몸으로 느끼며 울림의 통을 잘라냈다.
뜨거운 피가 얼굴을 적셨다.
#
델포이가 죽고 난 뒤 상황은 정리되었다.
아이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상, 요새의 결정권은 모두 그녀에게 있었다. 델포이와 베사미어의 수작질에 뒤로 밀려났던 관리들이 속속 튀어나와 정리를 도왔다. 일행을 안내했던 문관들도 이에 속했다.
일행은 영웅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쫓기는 입장에서 그것을 너무 누리는 것도 안 좋다. 세이혼의 말을 들은 아이린이 최대한 조용하게 일 처리를 해서 입을 따라 도는 소문은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이 되었을 때……
“란아……”
아이린과 란이 만났다.
그녀는 힘겨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란의 얼굴을 계속 매만졌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보듯.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모? 이모 맞죠?”
“……응. 그래. 아이린 이모라고 부르렴.”
떨리는 말끝으로 그녀는 답을 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만지고, 어깨를 다독였다. 어루만지는 손길은 멈추지가 않았다. 계속 그러는 것이 불편 할 만도 할 텐데 란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되레 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닮았군.’
쿤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는 순간 그것을 느꼈다.
매우 닮은 생김새. 란이 아이린 언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아마 란은……
‘아이린의 딸이겠지.’
세이혼의 극적인 반응과 베사미어가 말 한 딸에 대한 언급.
란의 흑열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린이 노력했던 것은 딸에 대한 반응이라 보는 것이 옳았다. 어째서 처제라 부르고, 그 사실을 란에게 숨겼는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확실했다.
“후우. 그보다 어찌 된 거죠? 오라버니가 돌아오다니……”
그렇게 만남의 시간이 끝나고, 아이린은 선민관의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힘겨운 듯 등을 침상 끝에 기댔다. 상황을 정리하고, 요새를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아직 단 한 마디도 묻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알아야 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말하자면 꽤 긴 이야기야. 괜찮겠어?”
“그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라면……얼마든지 괜찮아요.”
꿀이라도 바른 듯, 세이혼을 대하는 아이린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어째서 떠나보냈던 걸까? 쿤의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어쨌든, 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세이혼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란이 아팠던 일 부터, 쿤을 만나서 쫓기게 된 것. 신성한 존재를 알게 되고, 그 힘으로 흑열병을 치료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 것까지.
요새에 도착하기 전 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란을 대할 때나 간혹 보여 주었던 모습이다. 사람 따라 대하는 게 다른가? 쿤이 살짝 섭섭함을 느꼈다.
“굉장히 힘들었겠어요……”
“나야 괜찮아. 란이 고생을 했을 뿐.”
“우리 란이, 힘들었을 텐데도 잘 참았구나? 장한데?”
“란 보다 아빠가 힘들었어요. 란은 참을 만 했어요!”
“그래, 그래.”
괜찮다는 듯 당차게 말 하는 란을 보며, 아이린이 물기 찬 목소리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틋하면서도 조금은 먹먹해 지는 모습이다. 분위기를 탔는지 라라와 루루의 눈도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이러다 단체로 울겠다 싶어 쿤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괜찮다면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만.”
“아……그래요. 이름이 쿤이라고 했죠? 저 둘을 데리고 공화국 수도로 가야 한다고 했나요?”
“네. 쫓기는 입장이라 도움이 필요합니다. 요새의 선민관이라면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에서도 검문 없이 지나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맞아요. 마침 얼마 후면 공납품이 올라가는 시기이니, 그 편에 함께 움직이면 될 거 같네요. 다만 한 가지……”
그녀가 시선을 돌려 라라와 루루를 바라봤다.
둘이 황녀임은 이미 토로했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 과연 세이혼이 장담 한 것처럼, 이를 알고도 도와 줄 것인가.
쿤은 내심 긴장이 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굴락의 팔이 움직이고 있다면 수도로 간다 해도 안심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다행이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도움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었다.
쿤이 몸을 바짝 세우며 귀를 기울였다.
“의회는 불안해하고 있어요. 이미 두 번의 선거를 모두 공왕에게 내 주게 됐죠. 시민들은 공화국의 모습이 예전 공국 때와 달라졌다는 것을 잘 체감하지 못해요. 어차피 같은 사람이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이대로 시간이 가면? 어쩌면 과거의 공국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빌미가 될 수 있는 두 황녀를 어떻게든 처리하고자 하겠군요.”
“제국의 배신자까지 연결되는 이야기라면 벌여 둔 판이 보통은 아닐 겁니다. 수도의 병권은 전시가 아닐 경우에는 의회가 쥐고 있어요. 황녀의 종착지를 공화국 수도로 상정하고 있다면……상대도 그곳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을 겁니다.”
수도에 도착한 다음.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급해서 수도로 가는 일만 고려했을 뿐, 아이린의 말 대로, 도착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공왕과 접선 할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굴락의 팔과 연결되지 않은 중앙 관료를 만나야 한다.
“도움을 요청 할 공왕 파 쪽 인물은 없습니까?”
“글쎄요. 연줄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제 선에서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다고 대뜸 편지를 전달했다가 이야기가 의회 쪽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노출이 될 뿐이고.”
“음. 어설픈 세력은 도움이 안 될 테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어 있겠군요.”
“지금과 같은 시기라면 더더욱. 쉽지 않을 겁니다.”
도움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말.
“하지만, 다른 길을 선택 해 볼 수는 있습니다.”
“다른 길? 고견이 있다면 말을 해 주십시오.”
아이린이 눈을 반짝였다.
베사미어에게 맥없이 당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 자체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아니, 짧은 이야기로 맥락을 짚어내는 모습은 괜히 선민관에 위치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가기 힘들다면 오게 해야죠.”
“오게 한다?”
“두 달 후, 공화국 창립 기념일이 있습니다. 전후로 일주일 동안 공화국 전역을 돌면서 지역민들과의 만남을 가지죠. 이때라면 의회의 눈을 피해서 접촉 할 수 있을 겁니다.”
“경비가 삼엄하지 않을까요? 굴락의 팔이 주변을 지킨다든지……”
“아뇨. 이 행사만큼은 공왕이 직접 인원을 선별하여 움직입니다. 의회의 눈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되는군요.”
즉, 공왕도 외부 행사를 나갈 때는 의회를 안 믿어 측근으로 인원을 꾸린다. 그렇다면 의회의 눈을 피해서 접선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가 될 터. 수도로 진입하여 의회의 경비를 돌파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아 보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다.”
“저도 이편이 나을 거 같아요.”
세이혼과 라라가 찬성했다.
루루를 보니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도란이야 무슨 생각인지 모를 모습으로 방구석에서 쪼그려 앉아있는 중. 일행의 대부분이 찬성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리겠지만……이게 더 안전하겠군.’
쿤이 한참을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악을 피하기 위한 길임은 분명해 보였다. 무리해서 잡힌 뒤에 이건 좀 아닌가 싶어 후회를 하면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상황은 정리했고, 다음을 위한 계획도 구상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
“혹시 믿고 있는 신이 있습니까?”
포교. 딸 구할 종교니 닥치고 믿어라.
속마음은 숨긴 채 쿤이 부드럽게 물었다.
※작가의 말
역시...약빨이 최고얌.
* 오늘은 검수 시간이 짧아서 오타가 걱정이네요. 발견하시면 슬쩍 말 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