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다시 마을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혹시나 주의를 끌까 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는데, 의외로 말 거는 이들마다 거침없이 정보를 나누어 주었다. 꽤나 쌓인 게 많은 태도. 식료품 상인도, 대장간의 남자도. 심지어 옷을 정리하던 포목점의 여 종업원도 침을 튀기며 말을 했다.
검은 로브의 무리는 통칭 교단.
선민관이 초대한 치료사 중 한 명이 불러온 무리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선민관마저 병상에 눕게 된 이후로는 권력을 이양 받아 사람을 마구 다루니, 요새 내에서는 누구도 대항하지 못한다고 했다.
요새 인근의 상인들이야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며 살 만은 하지만, 남쪽의 농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징수를 하는 통에 상당수가 농지를 버리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덕분에 요새 안쪽의 사정도 나빠져, 상인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 교단의 행렬을 보며 한 목소리로 불평을 토로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정보를 정리 한 뒤 쿤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세이혼은 그새 요새를 다녀왔는지 이미 돌아와 있었다. 꽤나 힘들었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잠든 란의 발치에 앉자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어 내리고 있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쿤이 구입해 온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세이혼이 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을 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네. 집무실부터 개인 침실까지 검은 로브의 인물들이 점거하고 있어. 도무지 접근이 불가능했다. 주변을 돌아보고 나오는 게 전부였네”
“검은 로브라. 또 그들인가.”
“또?”
쿤이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벨로포사의 냄새를 쫓아 간 것부터, 그들의 정체. 그리고 탑을 부숴 나온 이단의 물건까지. 이해하기 쉽도록 잘 정리해서 늘어놓았다.
네크로맨서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던 그는 이단이 등장하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그들이 아이린을 해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이린? 선민관의 이름인가?”
“아아.”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세이혼이 의자에 몸을 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눈빛이 조금은 아련하게 젖어 있었다. 아이린. 처제라 하였으나, 단순히 그런 관계로 끝날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침대 맡에 놓인 물을 한 잔 들이키고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라니. 그런 존재가 아직 명맥을 이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째서 성에 출몰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야 내가 묻고 싶은 부분이다. 듣자하니, 네크로맨서의 수장은 치료사로서 요새에 초빙되어 왔다고 하던데. 짐작 가는 바가 없나? 선민관을 치유하기 위해서 왔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안 맞더군.”
“치료사……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르겠군.”
그때, 세이혼이 손뼉을 치며 탄성을 토해냈다.
쿤이 눈빛으로 물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란을 눈빛으로 살피며 답을 했다.
“어쩌면 란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란? 란이 어째서?”
“처제와 나는 입장 때문에 떨어지기는 했으나, 가끔 상인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긴 했지. 그 내용에는 란의 병세에 대한 내용도 있었네. 흑열병의 진행에 대한 것.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대신관을 찾지 못했다면 그녀가 다른 곳에 매달렸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치료를 위해 네크로맨서한테 의지했다?”
“설마 미리 알고 있었겠나? 아직 있는지도 모를 자들을. 숨기고 있었겠지.”
하긴 쿤조차 네크로맨서라는 것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옛 재앙의 일면이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 1 정도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으니까. 만약 이를 지적한 것이 아도란이 아니었다면 쉬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치료 목적으로 초대를 했다가, 거꾸로 수작에 당했다는 건가?”
“아마도. 다른 일에는 냉철한 아이지만, 란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못하니……”
“그럼 감찰관은? 감찰관은 요새 사정이 이러한데 뭘 하고 있는 거지? 선민관 혼자의 힘으로 요새를 흔드는 건 불가능 할 텐데?”
“상황이 이 지경이라면 아마 감찰관도 손을 잡은 거겠지. 지방의 유지와 거래를 해서 착복하는 감찰관은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네. 상대가 네크로맨서임을 알지 못하면 기회라 생각하고 있을 공산이 크네.”
돈이면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없다는 것일까.
쿤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혼의 말대로라면 네크로맨서 무리가 징수 권한을 자기마음대로 사용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쿤이 무릎을 툭툭 치며 생각을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허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민관의 도움이 필수적이잖아. 관문을 거치지 않고 횡단하는 건 란 등에게는 무리야.”
“처제만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있다면 암약하는 무리를 쫓아내는 건 문제도 아니네. 문제는 네크로맨서 무리를 뚫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과, 병세를 치유하는 것인데……”
“일단 벨로포사인가.”
“벨로포사라면 방법이 있어요.”
“음?”
그때, 아도란과 함께 라라, 루루가 안으로 들어왔다.
씻고 왔는지 머리카락이 촉촉했다. 후드 없이 돌아다니는 건 아마도 아도란의 힘 덕분. 쓰고 싶을 때만 쓰는 마법이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꽤 도움이 됐다.
그녀가 들꽃 향기를 풍기며 쿤의 옆에 앉았다.
“벨로포사는 장복하면 내장을 상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약성이 강한 것이 아니라 해독이 어렵지 않아요. 중독이 깊어 환각 유도로 수면상태에 있다 해도, 한 단계만 끊어주면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도 가능하죠. 문제는 상한 내장의 치료와 체력의 회복인데, 이는 쿤 오빠가 해결 해 줄 수 있겠죠?”
“아아. 마침 신께서 내어 주신 물건 중에 체력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있더군. 축복과 같이 사용하면 어렵지 않을 거다. 오면서 만들어 둔 물약도 넉넉하고.”
“그럼 됐네요. 해독약은 제가 만들게요. 두 분은 성으로 잠입해서 선민관의 신변을 확보해 주세요.”
“잠시만. 아직 벨로포사로 선민관이 쓰러졌다는 확신은 없다. 무리 중 하나한테서 냄새를 맡았던 것뿐이니까. 섣불리 판단하는 건 위험해.”
“음……그럼 저도 같이 가요. 상태를 확인하고 약을 조제하기에는 쿤 오빠 보다는 제가 나을 거예요.”
라라까지 잠입을 같이 한다. 쿤이 잠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가 않다.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아도란이 도와주면 안 되나요?”
그러자, 이번에는 루루가 말을 했다.
일행의 눈이 아도란에게 돌아갔다.
“아도란? 아! 하긴 그렇군. 아도란, 네가 우리에게 투명 마법을 걸어 주면 되겠어.”
“안 돼.”
“뭐? 어째서? 조금 전까지는 잘만 쓰고 다녔잖아.”
“기억 안 나. 까먹었어.”
“……지금 장난 칠 분위기가 아닌데?”
“진심. 기억. 안 나.”
아도란이 쿤의 정면에서 답을 했다.
평소처럼 빙글빙글 돌지도 않고, 바른 자세로. 시답지 않은 장난인가 싶었던 쿤도 태도가 가볍지 않음에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장난이 아니라면 더 안 좋다. 무슨 마법사가 마법을 잊는단 말인가. 아무리 미친 마법사라는 이명이 있어도.
“정말로 할 수 없어?”
“응. 못 해. 기억. 없으면. 대신. 다른 거.”
“다른 거? 다른 마법이 생각났어?”
“변형. 얼굴. 바꿀 수 있어.”
손가락으로 얼굴을 빙빙 돌리며 말을 했다.
외모를 바꿔 줄 수 있다는 의미. 쿤이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런 능력이라면 굳이 선민관의 신세를 안 져도 되잖아!”
“아……! 그러네요. 그냥 외모를 바꾸고 관문을 통과하면 그만이니.”
“와! 그럼 우리 이제 안 쫓겨도 되는 거예요?”
추격대에 아도란의 마법을 간파 할 수 있는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야 얼굴을 변형하면 더 이상 쫓길 이유가 없다. 검문이 있는 지역에서만 얼굴을 바꾸고 그대로 쭉 달려 공화국 수도로 진입하면 그만이다.
“오늘 만. 내일은 몰라. 나, 자주 잊어.”
하지만 뒤이어 나온 아도란의 말에 쿤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구겨졌다.
마법을 잊는다는 게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그런 거였으면 검은 바위는 어떻게 지켰나 싶다. 노망든 늙은이가 노송 그루터기에 앉아서 집 지키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미친 마법사한테 상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변덕인지, 치매인지. 수백 년을 살아 온 마법사이니 이런 우스운 상태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러니 심장을 내 놓은 채 일행에 따라붙는 기행까지 저지른 거겠지.’
쿤이 고개를 흔들었다.
“끙. 어쩔 수 없지. 그럼, 차선으로 가자고. 얼굴을 바꾸고 정문으로 간다.”
“정문?”
“선민관이 아프다는 건 요새 전역에 퍼져있는 이야기잖아. 병을 치료 할 수 있는 치료사로 접근하면 내치지는 않을 거다. 네크로맨서가 감찰관과 손을 잡고 권력을 휘둘러도 내부의 모든 사람을 손아래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잠입보다 정공법이라는 거군요. 하긴 그렇게 하면 저도 쉽게 들어 갈 수 있으니 낫겠어요.”
얼굴만 바꾸면 딱히 위험한 것은 없다.
설사 들어가 선민관의 병세를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정보를 캐 오는 기회로 사용 할 수 있다. 내일이면 아도란이 마법을 까먹을 수 있다고 하니, 망설일 수는 없었다.
“아도란 언제까지 기억 할 수 있을 거 같아?”
“글쎄. 나도 몰라.”
“끄응. 도움이 되는데도 한 대 치고 싶네.”
쿤이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사용해. 그리고 란하고 루루. 잘 지키고 있어.”
“잘 지켜. 아도란.”
고개를 끄덕인 아도란이 벌떡 일어나 빙글 돌았다.
하얀 빛이 방 안을 메워갔다.
#
“음? 거기, 누구냐? 당장 멈춰라!”
요새로 들어가는 문 앞.
갈색 튜닉위로 가죽 갑옷을 걸쳐 입은 병사 둘이 창을 내민 채 다가오는 무리를 경계하고 있다. 날이 이미 저물어 통행이 제한되는 시간. 날 선 창 위로 내리는 음울한 빛만큼 목소리에 경계가 잔뜩 담겨 있었다.
“어이쿠. 이거 놀라게 해 드렸군요.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습니다.”
“……누구지? 뭐하는 자들인데 이 시간에 문에 접근하는 것이냐?”
“테론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입니다. 듣자하니 요새의 선민관께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까 해서 찾아왔지요.”
문에 접근한 무리는 쿤과 세이혼. 그리고 라라였다.
등짐을 크게 지고, 나무로 깎은 지팡이를 쥐었다. 셋 모두 본래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루루나 란이 와도 알아보지 못할 모습.
경비가 잠시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물었다.
“테론이라면 그쪽 치료사 협회에서 온 거요?”
“하하. 간신히 이름만 올렸습니다. 수행 차 떠돌고 있는 몸이죠.”
“으음.”
테론은 공화국 남반구에 위치한 도시로, 대대로 치료사의 배출로 유명한 지역이다. 따로 협회까지 두어 치료사를 운용하기 때문에 타 지역에서 가지는 신뢰도가 꽤 높다.
“하지만 덜컥 믿을 수는 없소이다. 뭐, 증표나 이런 건 없습니까?”
“수행하는 입장에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대신 이거라도……”
쿤이 등짐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푸른 색 물이 담겨 있었다.
“보아하니, 그쪽 분은 몸이 정상이 아니군요. 밤마다 쑤시고 그러지 않습니까?”
“허어. 그걸 어떻게……”
“하하. 나름대로 배운 바 있으니 그 정도는 눈에 보이는 거지요.”
밤에 나와 경비를 서는 사람 치고 안 아픈 이가 있겠는가.
부드럽게 대하는 쿤의 모습에 경비 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화술의 힘은 이럴 때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쭉 들이켜 보십시오. 통증이 줄어들 겁니다.”
“크흠. 그럼, 어디……”
지목당한 경비가 물약을 받아서 쭉 들이켰다.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 멍청해 보이지만, 그만큼 테론의 이름과 쿤의 분위기가 많은 영향을 준 것이다.
“오……! 오오! 이거 괜찮군! 정말로 통증이 가라앉았어!”
“정말? 진짜냐?”
“속고만 살았나. 어제부터 욱신거리던 허리가 멀쩡해 졌어. 자자. 보라고.”
허리를 빙빙 돌리는 모양새가 당장이라도 여자 하나 끼고 침대로 뛰어들 기세였다.
쿤이 그에게 준 물약은 [통증 완화의 물약]. 비약제조 목록의 물약 중에 가장 상단에 위치해 있던 것이다. 사용되는 약초도 흔한 것들이라 바로 만들어 올 수가 있었다.
“아차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바로 안쪽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리를 빙빙 돌리던 경비가 머리를 통통 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모습을 보며 쿤이 확신했다. 적어도 요새 전체를 쥐락펴락 하고 있지는 않다. 그랬다면 선민관을 치료하러 온 사람을 대번에 축출했겠지.
조금 기다리자 요새 안쪽에서 몇 사람이 나왔다.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사무를 담당하는 문관 같았다. 일행 앞으로 와서 몇 마디를 하고는 바로 안쪽으로 안내를 했다.
일행은 들고 온 짐을 검사받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어차피 선민관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서 무기를 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부 여관에 두고 온 터라 딱히 걸릴 것은 없었다.
‘의외로 쉬운데?’
저항이나 위기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네크로맨서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요새의 다른 부분에는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았다. 아니면 그만큼 다른 이들이 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삐 걷는 문관들이 네크로맨서와 상관없는 인물이라면 후딱 선민관을 치료하여 그들을 내쫓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이곳입니다. 전 부터 몸이 안 좋아 보이시더니, 최근에는 아예 몸져누워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테론에서 오신 분들이라면 어찌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일단 환자를 봐야 알겠지요.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죠. 이 둘이 곁에서 보조를 할 겁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 해 주시기를.”
덩치 큰 경비 둘이 옆으로 붙었다.
치료사인 것을 믿어 진찰을 허락하기는 하지만 일단 선민관의 곁으로 붙는 것이니 경계를 하는 것이다. 어설픔과 세심함과 중간이라니.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쿤이 안으로 들어갔다.
“……음.”
연 녹색 베일이 내려오는 침상 위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파리한 안색. 쿤 뒤에 선 세이혼이 침음 성을 흘렸다. 처제라 한다면 가까운 사이였을 터. 병에 걸려 누워있는 모습이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침상으로 다가간 뒤 쿤이 라라에게 물었다.
“어때 보여?”
“눈 밑이 검고 안색이 파리하네요. 그리고……”
라라가 망설임 없이 옷을 걷어 복부에 손을 댔다.
“피부가 검게 변색되고 복부가 뜨겁네요. 적어도 도감에 실린 벨로포사의 영향과는 일치해요.”
“역시 벨로포사인가. 지금 바로 조제 할 수 있겠어?”
“네. 재료는 충분하니까요.”
라라가 등짐을 내려 약초를 꺼내기 시작했다.
쿤도 짐을 뒤지는 척 하면서 상자를 소환해서 연금술사의 그릇을 꺼냈다. 직접 비약제조를 사용하거나 라라에게 맡기든 준비는 해 둘 생각이었다.
“누가 마음대로 이곳에 사람을 들이라 했지!?”
그렇게 치료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검버섯 핀 얼굴에 고집이 가득해 보이는 눈매.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 노파였다. 나무로 만든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들어와서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 아. 베사미어 님. 이분들은 테론에서 오신……”
“시끄러워! 누가 네놈에게 물었나!?”
답하는 경비를 밀쳐내고 그녀가 일행에게 다가왔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은 보이는 나이보다 강성해 보였다.
“그래, 테론에서 온 치료사라고?”
“처음 뵙겠습니다. 미약하지만 테론에 적을 올린 람이라 합니다.”
“람. 람이라.”
노파의 눈빛이 쿤의 전면을 훑고 지나갔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도란의 변형마법이 얼굴을 바꾸고 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은 있으니까.
“흥.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린 님은 내가 맡고 있다. 네놈의 재주는 필요 없으니 썩 꺼져!”
하지만 상대는 쿤 등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에 남이 끼어든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 손짓을 하며 역정을 내었다.
“아이린 님의 상세를 확인했습니다. 벨로포사에 중독 된 것 같은데. 알고 계셨나요?”
“……벨로포사?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아이린 님은 상태는 벨로포사와 상관없다.”
“테론의 치료사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가요? 방금 확인을 했습니다만?”
“네놈이 지금 내 말에 반박하는 거냐!? 건방진 놈이 감히 어디서!”
그 순간, 노파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공격인가. 쿤이 긴장하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무기를 빼앗겼지만, 이 거리라면 상대를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다. 판단의 기로에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웅……!
하지만 그 판단보다 빠르게 찾아 온 것은 강력한 혐오감.
노파의 지팡이 색이 변하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강하게 때릴 정도의 혐오감이 느껴졌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네놈! 이 힘을 알고 있군!?”
노파가 말을 멈추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코끝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좌우의 경비를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나가봐라.”
“네, 네?”
“나가보라고! 내 말이 안 들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내가 아이린 님한테 전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 썩 나가 봐!”
역정에 경비가 머뭇거리며 방을 빠져 나갔다.
이내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일행과 노파. 그리고 잠들어 있는 아이린만이 남았다.
‘무슨 생각인거지?’
쿤은 상대의 의도를 짐작 할 수 없었다.
지팡이에 실린 것은 분명 이단의 힘. 그렇다면 상대가 네크로맨서라는 것? 하지만 그렇다면 왜 경비를 밖으로 내모는 것일까? 아무리 무기가 없어도 이쪽은 숫자가 셋이나 되는데.
“킬킬. 이런 곳에서 이 힘을 알아보는 인물을 만날 줄이야.”
“……무슨 소리지?”
“연기는 집어치워. 이 힘을 알아봤다는 것 자체가 이미 속삭임을 듣고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속삭임?”
상대는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
쿤이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를 한 상황이라면 굳이 해명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이단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이미 이곳은 내가 손에 넣었어. 선민관이 누웠다는 얘기에 숟가락 얹으려고 온 모양인데, 이미 늦었다고. 다른 곳이나 찾아 봐!”
“……이미 손을 써 둔 건가?”
“킬킬킬. 딸년 때문에 절절매는 계집 하나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지. 속삭임을 따라서 얻은 이 돌의 힘도 꽤 도움이 되었고 말이야.”
노파가 지팡이 끝에 달린 돌을 툭툭 쳤다.
‘저것이 이단의 근원인가.’ 쿤이 눈길로 훔쳐봤다.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세이혼에게 받았던 검은 돌과 상당히 흡사했다.
게다가 ‘딸’이라는 언급.
무언가 곧바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속삭임이 다른 말은 안 했나?”
쿤이 평정을 유지하며 다시 물었다.
“흥! 그 어설픈 유혹 말이냐? 도움을 주는 건 좋다만, 나는 내가 얻은 걸 포기 할 생각이 없어! 나는 내 방식대로 힘을 모을 거다.”
“그래서 이곳에 눌러 살겠다?”
“일단은 여기서 힘을 모은 뒤에 다시 한 번 대륙을……잠깐만. 너는 어째서 힘의 증표가 없는 거냐? 떠돌아다닌 것으로 보아, 아직 일체화 된 것은 아닐 테고.”
“……”
쿤이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작은 망설임을 감출 수는 없었나 보다. 노파가 훌쩍 뛰어 두어 걸음을 더 물러나더니 지팡이를 내밀며 외쳤다.
“네놈!! 나를 속였구나!!”
“나는 딱히 그런 적이 없는데?”
“흥!! 이 몸이 다시 네크로맨시의 위업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데 방해를 하겠다 이거군! 가만히 두고 볼 줄 아느냐!?”
“그러니까 나는 그런 적이 없다니까.”
뭔가 자기혼자 묻고 답하기를 즐겨하는 것 같다.
역정을 내더니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일어나라 망자들이여!!”
지팡이 끝이 빛나고, 바닥에 검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파가 품 안에서 하얀 색 가루를 꺼내 뿌렸다. 뼈 가루. 안개에 엮여서 둥글게 말리더니, 일렁임과 함께 해골로 이루어진 병사를 토해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것들보다는 약해 보이는군. 급조해서 그런가?’
쿤이 짧게 생각하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신성 대지의 축복.”
화악……!!
새하얀 빛이 바닥을 타고 번져나갔다.
검은 기운을 타고 일어났던 해골들이 단번에 부서지며 본래의 가루로 돌아갔다. 퍼석. 퍼석. 부서지는 소리만 요란하게 이어졌다.
“……어?”
노파가 벙찐 얼굴을 했다.
눈을 깜빡깜빡. 무언가 믿기지 않는다는 태도.
“이, 이럴 리가 없어! 일어나라 망자여!!”
그리고는 다시 해골을 소환했다.
가루가 다시 뭉쳐서는 벌떡벌떡 일어났다.
“신성 대지의 축복.”
하지만 쿤이 신성 대지의 축복을 사용하자 또 다시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네크로맨시로 인한 능력은 축복의 힘을 넘어서지 못했다.
“……”
“잡아.”
세이혼이 번개같이 튀어나갔다.
※작가의 말
* 아도란의 말투는 이유가 있습니다.
* 쿤이 한 실수는 이단의 상징에 대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준경도 저지르고 있는 실수죠. 처음 경비대장을 잡았을 당시, 펜던트가 공물로 넘어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쉬울 겁니다. 사실 이번 편에 답을 남길까 했는데, 관련 내용이 다음편에 있더군요. 고로 자세한 설명은 다음 편에!!
* 인벤을 공개해 달라는 분이 계셨는데...싹 정리해서 한 번 등장을 시켜야겠습니다. 결코 제가 잊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 네크로맨시와 이단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한 분이 있더군요. 소오름. 다만, 굴락이 아니라는 것이 함정!
그나저나...오늘 굉장히 많이 썼네요. 에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