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86화 (86/240)

하늘과 땅.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눈앞에 나타난 기묘한 모습에 말을 잃었다. 이건 대체 뭘까? 나는 조금 전까지 분명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손을 뻗어 바닥에서 올라온 풀잎을 만져 봤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에 위화감은 없다. 촉감도 그대로. 하푼식 감각수련법에 의거해서 전해지는 정보 역시 모두 여전했다. 지금 이 장소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걸까?

순간이동? 텔레포트?

“재미있는 상상이군.”

“……!!”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튕겼다.

허리춤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쿤이 아니라 단검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주먹만 그러 쥔 채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봤다.

“놀라게 한 모양이군.”

큰 키에 벗겨진 머리.

하얀 눈동자의 남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느낌이 굉장히 기묘한 인물이었다. 복색은 평범한 정장. 장소만 아니라면 회사원이라 생각 할 법 한 외관이었다. 눈이 하얗게 물들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가 천천히 걸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상당히 컸다. 190? 다만, 어깨가 넓은 편이 아니라 마치 전봇대를 하나 세워 둔 느낌이었다.

“소개를 잊었군. 아트록스의 벨 포드. 벨이라고 부르게.”

“벨……당신은 누구죠? 아니, 이 장소는 뭔가요?”

“아트록스. 이곳은 경계. 혹은 고리의 세계라 불리는 곳이네.”

“경계? 고리?”

의문에 미간을 좁히고 있자, 벨이 손을 흔들었다.

들판위로 의자와 테이블이 나타났다. 마법? 기가 막힐 광경이지만 의외로 놀랍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놀랄 마음을 포기했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잠시 둘러보다 손짓에 따라 순순히 그 위로 엉덩이를 걸쳤다.

“자네의 언어로 설명을 하지. 이곳은 아노스와 지구의 사이라고 볼 수 있네.”

“아……!”

“물론, 그 사이만 국한하는 명칭은 아니네. 세계와 세계.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경계의 표상이라 볼 수 있지.”

뭔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쿤의 세계인 아노스와 내가 사는 현대. 두 세계가 존재하니 경계가 있는 것도 이치상으로는 맞다. 다만, 그 사이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누군가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해 본 적 없다. 경계는 말 그대로……경계 일 뿐이니까.

여러 가지 낱말을 머릿속에서 굴리다 적당한 것을 골라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의 신……같은 겁니까?”

뭐만 하면 신이라서 이번에도 그런가 싶었다.

대머리 신은 조금 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느낌은 그럴싸하니까. 하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부인했다.

“신이라. 그렇기 부르기에는 내 모습이 조금 초라하군. 그냥 떠돌이라 생각하면 족할 거네.”

“그렇게 말 하는 사람 치고 만만한 경우는 거의 없던데요?”

“하하. 영화를 과하게 본 것 같군.”

답하는 그의 모습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묘한 상황에 묘한 외모. 이런 와중에 당황이 적은 것은 아마도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불신에 앞서 대화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사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특유의 아우라가 존재했다.

생각하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벨이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궁금할 거네. 왜 자네를 이리 불렀는지에 대해서.”

“……그것도 운전 중에 말이죠.”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이곳과 밖의 시간은 상당히 괴리가 심해서 말이야. 나라도 세밀한 조절은 어려웠다네.”

부드럽게 답한 그가 손짓을 했다.

테이블 위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이 나타났다. 부드러운 향이 코를 스쳐갔다. 마법……같은 광경이지만 이미 그런 면은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손짓에 따라 한 입 넘기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가능하다면 잎이라도 좀 얻어서 돌아가고 싶다.

“그럼 서로 바쁜 사이이니 돌려서 말 하지는 않겠네.”

“저도 직설적인 것을 더 선호합니다.”

찻잔을 내려놓고 그를 응시했다.

“자네와 거래를 하고 싶네.”

들려온 첫 마디는 조금 뜬금없는 것.

순간적으로 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잡아 질문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거래? 무슨 의미입니까?”

“음. 말 그대로네. 자네와 장사를 하겠다는 거지. 이곳은 경계의 세계. 근본이 없는 곳이네. 씨를 뿌려 싹을 틔우 듯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없지.”

“훌륭하게 만들어 냈습니다만?”

“그것들은 단지 흉내를 냈을 뿐이라네. 우리는 시작이 없어. 그렇기에 남의 것을 빌려와야 그럭저럭 흉내라도 낼 수 있다네.”

찻잔을 들며 말 해 보았지만 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근본이 없다는 말. 지금 내가 마시고 보는 모든 것들이 단순한 카피에 불과하다는 것일까? 경계라는 이유 때문에? 쉽게 와 닿지는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이군. 그럴 거라 생각했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어차피 같은 세계라면 차이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안과 밖의 이야기는 빛과 어둠처럼 분명한 부분이 있네. 하지만 경계는? 안과 밖이 없다면 생겨 날 수 없네. 세계와 세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의미가 뭉쳐 그림자로 엉겨 붙는 것이 바로 경계이지.”

“……”

“하하.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그냥 뿌리 없이 떠도는 보부상이라 여기면 되네.”

뿌리 없는 떠돌이 상인.

말끝에 묘한 아픔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 더 물어볼까 해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답을 듣는다 해서 내가 이해 할 거 같지는 않았다.

대신 실용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뭘 어떻게 거래를 하겠다는 말이죠?”

“어긋나지 않는 한도에서 자네의 정수를 사고, 가진 물건을 팔겠네.”

“정수? 이단을 해치우고 얻은 정수 말인가요?”

“그것도 있지만, 자네가 얻은 신성 점수도 역시 정수에 포함되네.”

내 시스템을 알고 있다.

처음으로 겪는 일. 당황스러워야 정상이지만 딱히 그런 마음은 안 들었다. 머리는 맑고 마음은 침착했다.

“정수와 점수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걸로 아는데요?”

“그건 단지 물을 담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네. 근본은 같아. 그 사실은 이미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게이트를 타고 이동하는 힘. 검은 돌에 스며드는 빛. 신성 점수. 결국 다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종의 것이 그리 반응한다는 것은 이상하니까. 단지, 정화하여 정수로 얻은 것을 점수로 치환 할 수 없었기에 긴가민가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정수를 받고 물건을 팔겠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말했듯이 우리는 근본이 없어. 다른 세계의 것을 얻지 못하면 의미 없는 형상의 나열일 뿐이지.”

“하지만 이 점수라는 것은 제게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함부로 양도 할 수 없음은 알고 있을 텐데요?”

“하하. 이 순간에도 흥정을 하려 함인가?”

가슴이 콕 찔렸지만, 표정은 단단하게 유지했다.

“후후. 이해하네. 자네의 사정 역시 알고 있으니까.”

“……싸움의 전말을 아는 겁니까?”

“뭐,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보고 듣는 일 뿐이니까.”

“그럼 그 정보를 정수로 사겠습니다. 거래라 하셨으니 이것도 포함되겠죠?”

물건은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중심을 꿰뚫는 정보는 판을 흔드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아쉽지만 그건 안 되네. 내게도 룰이라는 것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건네는 것이 다른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네.”

“하지만 물건을 팔면 그게 그거 아닙니까?”

“허용 선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지. 당장 자네에게 인류를 말소시킬 수 있는 무기를 판다면 그게 타당하겠는가?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거래를 하고자 함이네.”

“음……”

아쉽지만 타당한 말이다.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것은 저에게만 해당하는 제안입니까?”

불쑥 납치되어 왔지만, 중요한 건 결국 실리다.

지금의 이 제안이 나만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들어간다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벨이 흐리게 웃고는 답을 했다.

“이는 오직 그대와만 맺을 수 있는 거래네.”

“어째서죠? 지금 이 판에 끼어 든 이들이 더 있음은 알고 있을 텐데요?”

“후후. 이유는 스스로 알아내게나. 분명 한 것은 경계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자네뿐이라는 거지.”

나만 거래 할 수 있는 이유.

쿤과 직접 연결되는 사람이라서? 아니면 아노스에게 신으로 추앙받기 때문에? 몇 가지 짚이는 부분이 있기는 했으나 확신 할 수는 없었다.

뭐, 어쨌든 다른 이들이 해당 안 되고 나만 점유 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니까 됐다.

얻어 둔 정보를 머리에 차곡차곡 담은 뒤 다시 물었다.

“어째서 지금 접촉을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이곳에 올 수 있는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지.”

“자격? 레벨을 말 하는 건가요?”

“자세한 건 내 입으로 말 할 수 없네. 스스로 알아내야 더 즐겁지 않겠나?”

“메뉴얼도 안 받고 게임에 투입됐으면 치트도 좀 쓰고 합시다.”

투덜거리자 벨이 가볍게 웃었다.

뭐, 아주 중요한 일은 아니다. 넘기고 다음 질문을 준비했다. 어째서, 왜. 이유를 묻는 것보다 사실 더 중요한 일.

“그럼, 이제 물건 좀 봅시다. 어떻게 거래가 되는지 눈으로 확인 돼야 정할 거 아닙니까.”

“기다렸네.”

따악. 말이 끝나자 벨이 손가락을 튕겼다.

찻잔이 놓여있던 테이블이 사라지고 유리로 덮인 진열장이 나왔다. 그 안에는 온갖 물건들이 다 들어 있었다. 그것도 손톱 크기로 작게 줄어서.

“품목이 좀 많아서. 원하는 걸 고른다면 그쪽만 부각시켜 주겠네.”

“음……”

고민했다.

만약, 포인트나 정수를 소모해서 물건을 구입 할 수 있다면 어떤 걸 사야 이득일까? 쿤과 나의 상황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최선이다. 이왕이면 가격도 싸고.

검이나 갑옷 같은 것들은 쿤에게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현재의 내게는 무 쓸모. 그렇다고 자금을 채울 수 있는 돈을 받으면 그건 또 쿤에게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아. 잠시 만요. 만약 제가 지금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은 누구에게 들어가나요?”

“그대가 산 것은 그대에게.”

“그럼 쿤의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걱정 할 필요 없네. 자네가 나와 거래를 하게 되면, 넘겨 줄 수 있는 창구가 생길 테니까.”

“제 물건을 쿤에게 넘길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곳에서 산 물건에 한해서.”

조금 아쉽지만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래도 넘길 수 있는 창구가 생긴다는 거니까. 나만 쓰고 넘기지 못하면 그를 강하게 할 방법이 없어 곤란 할 뻔 했다.

다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와 진열장을 살피며 생각했다.

나와 쿤이 동시에 이득을 볼 수 있는 것. 육체를 강화시키는 포션도 괜찮고, 마법이 실린 아이템들도 눈을 끌었다.

그 중 몇 가지가 확 들어왔지만 가격이 과했다.

“1만 포인트? 터무니없이 비싸군요.”

“비싼 걸 보고 비싸다 하면 내가 뭐라고 하겠나? 자네는 거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거지 떼돈을 벌고 찾아 온 게 아니라네.”

“가슴 아픈 소리네요.”

현재 가진 정수는 둘. 그리고 포인트는 2710이었다.

일단은 두 조건에 맞는 물건을 선택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아, 그런데 정수는 어떻게 계산되는 거죠? 개당 하나로 계산되는 겁니까? 상대한 이단의 종류는 다른데?”

“음. 자네의 그분은 꽤나 디테일을 신경 쓰지 않는군. 자, 이러면 보기 편할 거네.”

딱. 벤이 다시 손을 튕기자 인벤토리에 표시된 정수의 모양이 바뀌었다.

[소형 정수 * 1, 정수 가루 * 1]

“가격 표시는 정수 가루를 기본으로 하고 있네. 단계별로 10배로 상승하니 계산을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럼 가지고 있는 정수의 양이 11이라는 거군요. 그냥 이대로 표시하면 좋을 텐데.”

“그건 내게 따지지 말게나.”

나와 연결 된 ‘그분’이라는 건가……

자연스레 지나간 부분에서 언급이 됐다. 역시 죠엘의 엘란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분’이라 칭해지는 존재에 의해서 지금의 상태에 놓인 것이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지만 확인 한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숨을 깊이 마시며 머리를 정리했다.

“포인트와 정수 위주로 정리해 줄 수 있나요?”

“흠. 이렇게 보면 좀 편하려나?”

벤의 손짓에 다라 커트라인이 정해졌다.

쭉 늘어선 물건들을 보니, 내가 게임을 하고 있는 건지 현실에 있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혹시 운전 중에 잠깐 졸아서 꿈을 꾸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일단은……”

***

이름 : 재생의 반지 - 9등급

가격 : 정수(5) / 500점

능력 :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 체력이 재생된다. 활기와 활력에만 반응하며, 상처와는 무관 하다. 체력 대비 회복 속도가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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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불굴의 동전 - 9등급

가격 : 정수(7) / 700점

능력 : 소유자의 정신에 불굴의 의지를 깃들게 한다. 좌절하지 않으며 정신계 능력에 대한 방어력이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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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연금술사의 그릇 - 9등급

가격 : 정수(10) / 1000점

능력 : 연금술사가 사용하던 그릇. 비약제조와 연금술의 효율이 증가한다. 비약제조 시

특별한 물건이 나올 확률이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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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운명의 화살촉 - 9등급

가격 : 정수(15) / 1500점

능력 : 바닥에 던져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12시가 대길, 6시가 대흉이다. 하루 동안 유지된다.

***

장비나 소모성 도구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지만, 이것들이 일단 눈에 들어왔다. 효과가 빼어난 것은 가격이 지나치게 높거나, 락이 걸려 있었다. 종족과 능력치 제한 템. 당장 쓸 수 있는 것들 중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앞의 둘은 착용하는 것으로 능력을 상승시키는 물건. 뒤의 둘은 사용하여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역시 선택.

“다 골랐나?”

깊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의 말

* 정수 가루 1개 = 신성점수 100

* 경계상인 벨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인물입니다.

그나저나 덥네요. 저는 눈꽃빙수나 후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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