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82화 (82/240)

“그 아도란이 맞다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쿤이 정신을 수습해서 물었다.

너무 유명한 이름에 잠시 놀라서 간과했던 부분. 아도란이 이런 변방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일까.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네. 다만, 선대의 약속에 따라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지. 거처를 제공하고, 목책을 쌓았네. 반년이 넘게 걸린 큰 공사였어. 정말 약속만 없었으면 잡아다가 저 밖으로 던져버렸을 거네.”

“목책이 아도란의 요구였다는 말이군요.”

“빼곡하게 둘러 두라 말을 했지.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모르네. 뭐, 이번에 온 잡것들을 막는 대는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아도란 정도의 마법사라면 허투루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에 깊이 관여되어 있고, 그 흐름을 읽어 미래의 일부마저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대상이 아도란이다 보니 무언가 있을 것이다! 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워낙 미친 짓을 많이 한 인물이라.

쿤이 머리를 흔들고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만나 볼 수도 있는 겁니까?”

“뭐……딱히 막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래야겠나? 그 미친 늙은이랑 만나서 좋은 일이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한 번 보고 싶군요. 미친 마법사 아도란이라니.”

호기심도 분명 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정말로 아도란의 등장은 신의 뜻과 상관이 없는 것일까. 미심쩍은 마음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한 번 보고 싶었다.

“정 그렇다면 내일 안내해 주겠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이 술이나 마저 비우자고.”

“하하. 이미 자네는 취한 것 같은데, 괜찮겠나?”

“어허! 이 몸을 뭐로 보고! 자, 다들 일어나라! 앙크투 부족의 힘을 보여주자!”

족장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술잔을 들고 거하게 외쳤다.

도란도란 모여 있던 부족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술잔을 세게 부딪쳤다. 쨍쨍 거리는 소리들과 웃음이 섞여 낭창낭창하게 울렸다. 시끄럽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소음이다. 세이혼이 크게 웃으며 쿤의 비어있는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끄응……누가 먼저 쓰러지나 봅시다!”

“하하하! 호기가 좋군!”

그렇게 몇 순이 돌았을까.

쿤은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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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두덩에 떨어지는 햇빛에 정신을 차린 쿤은 누군가 가슴을 벤 채 잠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족장이었다. 발치에는 세이혼이 쓰러져 있고, 허벅지를 벤 채 란이 잠들어 있었다. 주변을 보니 대동소이했다. 전날의 술판이 참 거했던 모양이다.

“끄으응……”

허리를 세우니 머리가 징징 거리며 울렸다.

맑은 공기를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주변을 살펴 떠 놓은 물을 찾아 넘겼다. 밤새 차게 식은 건지 식도를 타 넘어가는 감촉이 상쾌했다.

‘전투가 끝나고 전부 이 모양이라. 군이라면 한 소리 들었겠지만, 이곳에는 어울리는 모습이군.’

한껏 힘을 쓴 뒤, 전력으로 취한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마음 편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먹고 남은 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쓰러진 이들을 걷어차서 깨웠다. 족장에 이어 세이혼. 하나같이 멍 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첫 만남 제외하고 항상 칼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세이혼이라 지금의 얼굴은 꽤 재미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뒤척이는 란을 손으로 다독이는 것이 참 전문가적 아버지의 소양인가 싶어 감탄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아침나절의 흐트러짐을 정리하고 난 뒤, 쿤은 전날의 용건을 꺼냈다. 미친 마법사 아도란을 만나자는 것. 족장은 똥 씹은 얼굴을 했지만 약속은 약속 인 바. 거절하지는 않았다.

세이혼은 란과 함께 라라의 간병을 위해 남고, 쿤만 족장과 함께 따로 움직였다. 길가에 널브러져 있던 부족원 몇 명을 걷어차 깨운 뒤에 같이 동행했다. 비적비적 걷는 모양새가 취객들이 해장술 하러 가는 느낌이었다.

거주구를 지나서 돌산 쪽으로 조금 더 깊이 이동하고 나자 황량한 지역이 나왔다. 돌산과 마찬가지로 잡풀조차 보이지 않았다. 몇 걸음 돌아서면 초지가 바로 이어지는데. 마치 선이라도 딱 그어 놓은 듯 경계가 나뉘어 있었다.

“이곳이네. 더 들어가면 요상하게 만들어 둔 집이 하나 나올 텐데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거야.”

“족장께서는 안 들어가는 겁니까?”

“끄응. 그 늙은이와 만나면 소화가 안 돼. 나는 여기까지니 일 보고 나오게나. 여기 둘을 남겨 둘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부르고.”

양 쪽에 선 남자 둘이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아직 술도 안 깼는데, 미친 마법사 인근에서 경계를 서라는 것이 마뜩치 않을 것이다. ‘참 주먹구구식이구나.’ 쿤이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특이하군……’

족장과 떨어져 황무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던 쿤은 주변의 느낌이 조금 특이함을 감지했다. 사막의 황량함이라 해야 할까. 조금 전까지 밟던 초지의 생동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환경이 이리도 갑자기 변하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미친 마법사의 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쿤이 현실적인 성격인건 맞지만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다.

신비와 이적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옛 용병의 로망 중 하나였다. 쿤 역시 어릴 적 주린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달빛을 벗 삼아 그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현실의 각박함에 어느덧 술안주에서조차 밀려나기는 했으나,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황무지 땅을 조금 더 걷자, 연녹색 오두막이 나왔다.

쿤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찬란한 색은 죽어있는 황무지 땅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표면 처리를 어떻게 한 건지 햇빛을 사방으로 반사시키고 있었다. 다가가기 어려운 외관이었다.

“손님?”

그때, 하늘 위에서 누군가 툭 하고 떨어졌다.

쿤이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었다. 감각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눈앞에 상대가 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텅 비어버린 구멍을 보는 거 같았다.

“당신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을 늘렸다.

그리고 상대를 살폈다. 낡은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이 써 얼굴은 확인이 안 됐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고 목소리는 기묘했다. 정말로 이 사람이 미친 마법사 아도란일까. 쿤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아도란입니까?”

“아도란입니까?”

쿤이 잠시 멍하니 있었다.

“지금 제 말을 따라 한……”

“지금 제 말을 따라 한……”

두 번. 쿤이 아예 입을 다문 채 상대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후드 아래 검은 그림자 사이로 언뜻 웃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놀리는 것일까. 이게 미친 마법사의 인사법인가.

쿤이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한 번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쿤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아도란이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맞습니까? 맞다면 고개를 끄덕여 주십시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쿤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아도란이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맞습니까? 맞다면 고개를 끄덕여 주십시오.”

그대로 따라하며 끄덕끄덕.

역시 미친 마법사가 맞았다. 팔뚝에 소름이 조금 돋았다. 말을 듣고 따라한 것이 아니라, 동시간에 진행하고 있었다. 즉, 아도란은 무슨 말을 할 지 미리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수준 높은 마법사의 미래 예지인가. 쿤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따라와.”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말을 잇기도 전에 아도란이 끝을 자르고는 몸을 돌렸다. 조금은 황망하지만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쿤이 발을 떼어 그의 뒤를 쫓았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은데 걸음은 굉장히 빨랐다. 멀어지지 않게 발끝에 힘을 더 주어야 했다.

덜컹. 오두막 문이 저절로 열리고 아도란이 그 안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쿤이 뛰듯이 따라 들어갔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파동이 몸을 흔들었다.

파도에 휘말린 것 같기도 하고, 폭풍우가 치는 발에 쪽배를 타고 항해를 나선 것 같기도 했다. 머리가 울리고 속이 뒤집혔다. 전날 먹은 것들이 올라올 것 같았다.

“참아.”

윙. 아도란이 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연녹색 빛이 스쳐가니, 울렁이던 속이 금세 진정되었다. 어지러움도 더 이상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쿤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족히 3~4미터는 돼 보이는 바위였다.

색이 검고 윤기가 흘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꽉 막힐 정도로 무언가 대단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놀란 건 그 기운 탓이 아니었다.

크기만 달라졌을 뿐, 이 돌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아니, 본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만지고 다루기도 했었다.

“검은 돌?”

공물로 바치기 전의 잠시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쿤은 이 돌이 그것과 같은 물건임을 확신 할 수 있었다. 왜인지는 말하기 어려웠다. 그냥 느낌이 그러했다. 세이혼이 주었던 그 검은 돌이 바로 이 바위의 일부였다고.

“알아?”

“아, 아. 네.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이건 대체 뭐죠?”

“그리자. 오래된 것의 조각. 세상의 편린.”

단막단막 끊어지는 아도란의 말에 쿤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자가 바위를 지칭하는 건가요? 무슨 의미죠?”

“돌. 오래된 것. 틀. 용기. 빈 것.”

“틀? 용기? 무엇을 담기 위한 도구라는 겁니까?”

조금 빠르게 다시 물었지만 아도란은 답이 없었다.

대신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오두막 안을 빙빙 돌았다. 장난치는 아이와도 같고, 미쳐버린 여자의 걸음과도 같았다.

“너, 오는 거 봤어.”

“……제가 오는 걸 봤다고요?”

불쑥 아도란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미끄러지듯 지면을 타고 이동해서는 쿤의 앞에 섰다. 이렇게 있으니 확실히 체구가 작았다. 후드 사이로 고개를 기울이고는 빙빙 돌며 쿤을 살폈다.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 거침이 없었다.

“신기해. 넌 누구?”

“아, 저는 쿤이라고……”

“아니, 너 말고 너. 너는 누구?”

이건 대체 이해가 안 간다.

말도 단막단막이라 듣기 불편한데, 말의 의미는 더욱 모호하다. 쿤이 미간을 찡그린 채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흠. 이쪽. 만져 봐.”

그렇게 있으니, 아도란이 슬쩍 다가와 팔을 당겼다.

검은 색 바위를 만져보라는 말.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세이혼의 검은 돌도 딱히 이상은 없었으니 괜찮을 듯싶었다. 조심스레 손을 대 보았다.

기이잉—!

“크윽!”

무언가 굉장히 거칠고 뒤틀린 소리가 공간을 때리고 지나갔다.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거 같다. 쿤이 황급히 손을 때며 귀를 막았다. 소리는 한참이나 울리고 나서야 사라졌다.

그가 살짝 원망을 담아서 아도란을 노려봤다.

“응. 응. 역시. 너는 관계가 있네.”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이 돌은 뭐고, 당신은 여기서 뭐 하는 거죠?”

“돌. 위험. 막았어.”

“돌……이 위험해서 막고 있다는 겁니까?”

낱말을 이어 문장을 만들자, 아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책. 쿤이 바로 이어지는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도란의 말 대로 돌이 위험하다면 목책을 두른 것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함이 아니라, 안의 것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이혼의 돌은 괜찮았는데?’

차이가 있는 걸까?

쿤이 눈매를 좁히고 돌을 살폈다.

“아?”

그러다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바로 그가 손을 대었던 부분. 손자국 그대로 하얗게 변색이 되어서는 연기를 내고 있었다. 마치 불판 위에 올린 고기와 같았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아도란을 돌아봤다.

“아하하. 화났다.”

“……어?”

하지만 그는 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이 닿은 것은 돌의 저편. 검은 색 윤기 나는 단면 끄트머리에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잘못 본건가 싶어 쿤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꿈틀거리는 그림자는 이내 형태를 이루고 툭 잘려 바닥으로 내려왔다.

검붉은 피부에 날카롭게 솟은 갈퀴.

꼬리는 두 갈래로 갈라져 위협적으로 흔들리고, 주둥이에 달린 톱니 같은 이빨은 철도 씹을 듯 날카로웠다.

생김새로 표현하자면 사막 전갈과 닮았지만 크기가 달랐다.

세워두면 사람 하나는 그냥 넘어 설 것 같은 크기였다. 까득. 까득. 하는 마찰음과 함께 붉게 물든 눈동자로 쿤을 노려봤다.

“……나?”

왜, 나인가.

쿤의 의문이 다 가라앉기도 전.

검붉은 색 전갈이 바닥을 기어 달려왔다.

※작가의 말

님 어글 튀었어용

재밌게 보고 가세요.

오늘도 자정 즈음에 한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글이 잘 안 써진다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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