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이 거한을 처리하고 목책으로 이동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 된 후였다.
세이혼과 늑대문양의 문신을 한 남자가 어깨를 맞댄 채 웃고 있었다. 그가 말 하던 족장이자 친구인 남자 같았다.
“란. 다친 곳은 없니?”
“네! 쿤 삼촌이 잘 지켜 줬어요.”
“그래, 다행이다. 쿤, 수고했다.”
“그쪽 만 할까. 아주 제대로 날뛰어 주었군.”
오면서 보았던 시체들을 떠올리며 쿤이 흐리게 웃었다.
일격필살. 살검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세이혼이 죽인 자들은 다른 시체와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었다. 죽은 자의 모습만 봐도 얼마나 무서운 광경이었을지가 짐작 가능했다.
“호오. 그대가 하얀 악몽의 친구인가?”
“하얀 악몽?”
“부족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부족장이 세이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했다.
악몽.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쿤이 가볍게 웃고는 그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야만인이라 걱정을 했지만, 사둠타 부족의 사람들보다 살가웠다. 일단, 같이 싸움을 한 사이라는 인식이 강한 모양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일행은 안내를 받아 부족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목책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지나갔다. 목책은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견고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단단한 나무를 엇갈려 댄 뒤, 굵은 넝쿨과 밧줄로 사이를 이었다. 제국의 요새에서 사용하는 목책보다도 더 견고한 형태였다.
‘이런 목책이 필요한 일이 있나?’
바운티 헌터를 예상하고 지었을 리는 없고, 의문이 머리를 맴돈다.
어쨌든 당장 알 수는 없는 일. 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계속 걸었다. 싸움이 끝난 것을 알았는지 부족의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무리를 환영했다. 몇 몇은 이방인인 쿤 등의 모습을 경계했지만, 대다수는 부족장과 함께 오는 사실에 웃음을 보내주었다. 호전적이라는 세이혼의 설명과는 다르게 굉장히 살가운 모습이었다.
“하얀 악몽!”
그때, 누군가 세이혼의 이름을 불렀다.
“하얀 악몽!!”
“하얀 악몽!!”
반복적으로 이름이 번졌다.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공포와 숭배의 모습. 족장이 앞에 있음에도 숨기지 않았다. 그가 머물렀던 1년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쿤은 상상이 갔다.
‘란이 있기 전과 후의 차이일까?’
자식이 생기면 사람은 변하는 법이니까.
지금껏 보아온 세이혼의 모습은 사실 란이 태어나고 난 뒤 유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
“어이, 조심해.”
그렇게 지나가는 찰나, 라라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곁에 있던 쿤이 냉큼 팔을 잡아서 부축했다. 얼굴이 붉고 눈빛이 조금 탁했다. 즉시 이마에 손을 올리니 열이 상당했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던 터라 안색을 살피지 못해서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
“라라. 괜찮은 거냐?”
“괘, 괜찮아요. 그냥 살짝……”
“어이!”
살짝이라는 말과 함께 라라의 몸이 아래로 푹 늘어졌다.
쿤이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뺨을 툭툭 쳐 보지만 반응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그가 세이혼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앞서 가던 세이혼이 이상이 생겼음을 알고는 족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친구를 따라가라.”
이내 쉴 곳이 안내되고, 쿤은 라라를 업은 채 뛰어갔다.
몸이 불덩이 같았다.
#
“패럴 꽃 뿌리를 씹은 것 같다고 했습니까?”
쉴 곳에 라라를 뉘인 뒤 부족의 치료사라 불린 여자가 들어와 쿤에게 설명을 했다. 패럴 꽃의 뿌리를 씹은 것 같다고. 체질이 약한 사람이 과하게 섭취하면 열이 나고 의식을 잃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
“혀끝이 보라색이고,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으로 봐서는 맞는 거 같습니다. 일단 약을 먹였으니 조금 쉬면 열은 가라앉을 겁니다.”
“그 패럴 꽃은 뭐하는 겁니까? 딱히 특별한 것을 섭취한 기억이 없는데……”
“목적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역시 근육을 주무르는 효과라고 해야겠죠.”
“근육을 어째요?”
“잘 빻아 물에 섞은 뒤 필요한 부분에 바르면 필요한 만큼 이완시킬 수 있습니다. 한 두 시간 정도는 그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죠.”
쿤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바운티 헌터들이 후드를 벗겼을 때. 라라의 얼굴이 이상했던 것을 떠올렸다. 패럴 꽃 뿌리를 씹어서 얼굴에 바른 것이다. 앞으로 튀어나갈 때부터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어쩐지 발음이 조금 이상하다 싶더니……
최고참, 최고참 노래를 하더니 이런 무리한 일까지 벌였다.
“그럼, 쉬세요.”
“으음. 감사했습니다.”
치료사가 나가고, 쿤이 라라의 옆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열이 가라앉았는지 그래도 조금 안색이 편안해져 있었다. 땀으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떼어냈다.
‘부담을 주었나……’
딱히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녀를 중급 신관으로 선택 한 건 아니었다. 루루였어도 상관이 없는 일.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생각보다 깊이 받아들인 듯 보였다. 여정이 이어지는 중간중간 시간 날 때면 약초를 찾고, 무언가를 혼자 조제하는 듯 보이더니 그 모든 게 이런 사태를 대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제국의 황녀인데 말이야.’
생각하던 쿤이 슬쩍 웃었다.
그런 취급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다. 방울군도에서 도망 칠 때는 대소변 보는 것까지 피부로 느끼지 않았던가. 고귀함으로 포장하기에는 이미 보고 들은 게 너무 많았다. 아마 몸 부대끼며 굴러먹던 사창가 계집까지 전부 포함해서 가장 밀접한 사이가 된 여자가 아닐까?
첫 만남의 억지와 종착지에 대한 두려움을 제외하면 그녀를 보는 감성은 놀랍게도 따듯했다. 철없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짐 덩이 같은 감정에 짜증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부정적이지 않다. 노력하는 모습이 있고, 군소리 안 하고 배우려는 열의가 있다. 곱게 자란 여자가 도보로 여행을 하며 아픔을 호소하지 않은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다.
만약 이런 일로 만난 것이 아니라면, 여동생처럼.
아니, 그보다는……
“쿤 오빠!! 언니 어때요?”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루루가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마른 헝겊이 다른 한 손에는 김이 올라오는 스튜가 들려 있다. 양 손에 물건을 들고도 잘도 문을 찼다 싶다.
“지금 잠들었다. 조용히 하고 있어.”
“괜찮은 거죠?”
“네가 목소리만 낮추면.”
입가에 손가락을 올린 뒤, 쿤이 다시 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냥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
라라가 어느 정도 안정세에 들어가고 난 뒤, 쿤은 세이혼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족장과 함께 한 잔을 했는지 얼굴이 붉었다. 란은 옆에서 이 반찬, 저 반찬 집어먹기 바빴다. 라라가 쓰러진 뒤 깜짝 놀라 눈물을 왕왕 보이더니, 괜찮아 지는 모습을 본 뒤는 이 모양이다. 회복이 빠르다고 좋아해야 할까? 쿤은 가늠이 안 갔다.
“오오, 왔는가. 그래, 하얀 악몽에게 칭찬 받은 남자와도 한 잔 해야지.”
“악담은 안 했나 모르겠군요.”
“배우는 게 빠르다고 아주 칭찬이 대단해. 우리 부족 놈들은 하나같이 걸레짝이 돼 포기하기 일쑤였는데, 아주 재주가 대단한가 봐. 하하하.”
이곳에서도 수련의 장을 열었던 모양이다.
쿤이 작게 웃고는 술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놋쇠 그릇에 뽀얀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부족 전통주네.’ 세이혼이 귓말로 일러 주었다. 냄새가 큼큼하고, 딱히 당기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래도 신세지러 들어온 마당에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니 쿤이 눈 딱 감고 마셨다.
“크아……!”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굉장히 독했다. 식도가 다 타들어 가는 느낌. 머리가 빙빙 돌고 눈알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족장이 껄껄 거리며 웃고, 세이혼도 옆에서 코를 벌름거렸다.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조금 취한 모양이다. 평소보다 움직임이 컸다.
“삼촌, 안주. 안주~”
그나마 란이 정상이어서 다행.
양고기를 양념에 절여 구워 둔 것을 나무로 찍어서 건넸다. 우걱우걱 씹어 넘기니 타들어 가던 목구멍이 조금 괜찮아 지는 기분이었다. 나름 술이라면 지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건 상당히 과했다.
“파하하. 앙크투의 남자라면 어미 젖 때면 먹는 게 이 술이네. 그리 약해서야 어디 물건 달고 난 남자라 하겠나?”
“끄응. 저는 이 부족 사람이 아닙니다만?”
“그거 변명으로는 참 편한 말이군. 안 그런가, 하얀 악몽?”
“남자가 주량으로 정해지지는 않으나, 주량이 남자를 만들기는 하지. 아직 쿤에게는 이른가 보네. 하하.”
이 인간 분명히 취했다.
쿤이 세이혼을 슬쩍 째려 본 뒤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지고 살면 남자겠는가. 그래도 한 번 먹었던 거라고 이번에는 몸을 뒤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냉큼 주는 란의 안주를 받아먹고는 빈 잔을 바닥에 세게 내려놓았다.
“크으음. 생각보다 세지는 않군요.”
“파……파하하하! 이 친구야, 보라고. 그래, 끼리끼리 어울리는 게 맞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도 나와 대작할 때 딱 이런 모습이었어!! 하하하!”
시뻘게진 얼굴로 쿤이 허세를 부리자, 족장이 목청이 떨어져라 웃어댔다.
주변으로 듬성듬성 둘러앉아 술을 들이켜던 부족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왜 웃지?’라며 발끈하던 쿤은 놋그릇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단박에 이해 할 수 있었다. 눈과 코가 빨간 것이 삼일은 내내 술을 마신 사람 같았다.
‘젠장……’
아무래도 이 술은 호기로 마실 만 한 게 아닌가 보다.
쿤이 어지러운 머리를 부르르 떨고는 세이혼이 건네주는 물을 마셨다. 찻잎이라도 띄운 건지 향이 좋았다. 찬 기운이 들어가자 그제야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간만에 기분이 좋군. 역시 거하게 싸운 뒤 마시는 술은 세상천지 어느 별미와도 비할 바가 아니야.”
“나이 먹어도 그 성미는 변하지가 않나 보군.”
“하하. 앙크투의 남자로 태어나 싸울 수 없다면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 것이 낫지. 이 작은 나뭇가지만 하나 들 힘이 있다면 언제나 같을 거네.”
투쟁을 갈망하는 부족.
거짓이 없고, 그 열의는 뿌리깊이 내려오는 전통과 같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런 이들이 목책을 두르고 밖으로 나서지 않은 채까지 지키려 했던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저주받은 마법사.’
쿤이 물을 몇 모금 더 마셔 정신을 맑게 한 뒤 이곳까지 온 목적을 꺼내들었다.
“족장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무엇인가? 하루에 뒷간을 몇 번이나 가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답 해 줄 수 있네.”
“바운티 헌터들에게서 지키고자 했던 인물. 그 자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크으음. 술 맛 떨어지게 굳이 그걸 지금 물어야겠나?”
“일전을 치르고 들어왔으니, 지금이야 말로 적기라 할 수 있죠. 같이 피를 본 사이인데, 설마 숨기지는 않겠지요?”
쿤이 같이 싸운 전우라는 점을 강조했다.
앙크투 부족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 약했다. 역시나, 족장의 얼굴이 대번에 난감해졌다.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한참을 끙끙 거리더니, 병에 담긴 술을 한 번에 털어 놓고는 입을 열었다. 입김이 뜨거운 것이 전설 속 드래곤의 불길 같았다.
“쯧. 외부인에게 이런 걸 털어 놓는 게 달갑지는 않지만……맞네. 우리가 한 사람을 보호하고 있지. 아니, 보호라기보다는 거처를 제공하는 것이라 보는 게 맞겠어.”
“거처라……대체 누구이기에 싸움까지 불사 한 겁니까?”
“이름을 들어봤을지도 모르겠군. 그의 이름은 아도란. 미친 마법사 아도란이네.”
“아도란!!!”
“아도란!!”
쿤과 세이혼이 동시에 반응했다.
드물게 커진 눈동자가 적잖이 놀랐음을 증명했다.
“끄응. 역시 알고 있군.”
“정말입니까? 정말로 그 미친 마법사 아도란이 이 마을 안에 있는 겁니까?”
“사실이네. 내가 숨겨서 뭐 하겠어? 그 빌어먹을 늙은이 덕에 손해 보는 게 한둘이 아니거늘. 선대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썩 꺼지라고 말을 했을 텐데……”
툴툴거린 족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술이 남은 잔을 찾아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밀려오는 얼굴이었다.
“세상에. 그 아도란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아도란. 미친 마법사라 불리는 이 인물의 이야기는 이미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국이 아직 제국이라는 이름을 달기도 전. 신화적 존재의 이름이 간혹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그 광기를 드리우곤 했었다.
달빛이 싫다 하여 새카만 어둠을 칠 주야 동안 내린 이야기나, 시끄럽게 우는 개구리가 마음에 안 든다 하여 이를 모두 돌로 바꾸어 버린 일들은 악명의 시작에 불과하다. 전장에 홀연히 나타나 수천 명을 술 취하게 만들고, 풀을 뽑아서 입에 틀어막기도 했다. 여자만 모인 부락에 들어가 남자의 성기를 본 딴 구조물을 만들기도 했다.
선악의 구분을 떠나, 종잡을 수 없는 그 행동에 사람들이 파악하기를 포기하고 미친 마법사라 불렸다. 경원시하고 두려워하며 자연재해와 같이 여기는 존재. 하지만 그 역시 시간에는 이길 수 없었는지 차츰 이름이 들려오는 간격이 길어졌고, 최근까지 세간에서 아도란의 석자가 나온 적은 없었다.
그것이 벌써 수년 전……
쿤과 세이혼의 놀란 얼굴이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작가의 말
마법사 아도란 등장.
이제 얼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