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80화 (80/240)

라라의 음식과 차가 일 순을 돈 뒤, 세이혼이 돌아왔다.

“어떻게 됐지?”

거한이 묻자, 세이혼이 쿤 쪽을 한 번 바라본 뒤 답을 했다.

“일단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는 마련해 두었습니다. 무리를 뒤로 물리고, 대표 셋만 나오라고 하더군요.”

“셋만?”

“어이,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러다가 대장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속임수 아냐? 앙!?”

거한의 옆쪽. 째진 눈의 남자가 세이혼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베는 건 쉬운 일. 하지만 그래서는 일이 해결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멱살을 잡은 손등을 가볍게 눌러 풀어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째진 눈의 남자는 자신의 손이 자연스레 풀린 것이 이상한지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앙크투 부족이 호전적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명예에 민감합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한 말을 물리지는 않을 터. 무언가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게 있다면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흐음. 그쪽에서는 부족장이 나온다는 거냐?”

“네. 이런 일에서는 반드시 족장이 나섭니다.”

거한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측면에 있는 두건 쓴 남자를 불러 무언가를 속삭였다. 세이혼이 귀를 기울여 들으려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그러지를 못했다.

“잘했다. 뒤로 가서 네놈 일행과 함께 있어라.”

“……지금 풀어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흐흐. 웃기고 있군. 일 끝나는 꼴 보고 결정할 것이다. 잘 된다면 이 몸의 아량으로 풀어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네놈들의 목이라도 베어서 분풀이를 할 테다.”

“……”

억지에 가까운 말이지만 세이혼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 같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쿤 등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빠……”

“란아, 많이 걱정했지?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네! 란은 괜찮아요.”

세이혼이 란의 머리카락을 부슬부슬 쓸어 내렸다.

“회담이라 들었다. 정말인가?”

그런 둘을 잠시 지켜보다 쿤이 물었다.

세이혼이 란을 품에 안은 채 고개만 돌려서 답을 했다.

“어지간히 경계를 하더군. 다행히 옛 친구가 아직 족장으로 있는 터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네. 일단 대화를 상황을 해결하자는 말에 동의는 해 주었지. 문제는……”

“바운티 헌터들이 말 대로 따를지가 문제겠군.”

나지막한 쿤의 말에 세이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 해결하면 좋겠지만, 바운티 헌터들이 따를지는 미지수였다. 그들의 목적이 관건. 말로 해결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서로 피해가 나지 않은 부분에서 절충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협공은 제안해 두었나?”

“안을 소란케 하여, 외부를 허술하게 하는 것은 병법 중 하나니까.”

“란 등은?”

“회담이 시작되면 시선은 앞으로 쏠릴 거네. 야영지도 걷힐 테고, 무리의 중심이 이동되겠지. 무장을 한 채, 적에 대비한다면 우리를 중심에 두는 짓은 안 할 거야. 가운데를 두툼하게 하고 후위에 두어 포로로 취급하겠지. 그 정도라면 자네가 애들을 이끌어 안전한 곳까지 도망가기에 충분하네. 숲속이고 하니, 활도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겠지.”

술술 흘러나오는 세이혼의 말은 마치 앞일을 보고 온 듯 막힘이 없었다.

쿤이 차근차근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공의 제안이 가능하다면 바운티 헌터가 어찌 움직일까 하고 그도 생각했었다. 세이혼의 의견과 비슷하다. 적과의 싸움에서는 중진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하다. 선봉이 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것이 중진이기 때문. 포로를 후미로 빼고 중앙을 두텁게 할 확률이 높았다.

“그럼 그 사이로……?”

“뒤를 신경 쓰지 않고 있다면 헤집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하,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어요? 숫자가 이렇게나 많은데요?”

가만히 듣던 라라가 끼어들었다.

“난전상황에서 숲이라면 나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란만 안전하다면 헤집고 나오는 것에는 크게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라라가 품 안쪽을 뒤져서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세이혼에게 건넸다.

여행이 진행되는 중간중간 그녀가 약초 등을 말리거나 빻아 이렇게 보관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주머니가 신기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주머니를 내미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

“앞서 나눠준 차에 케라밀 잎을 섞었어요. 그냥 먹으면 단맛이 살짝 나는 약초에 불과하지만 페로 버섯 말린 가루와 같이 작용하는 다른 효과가 생겨나죠.”

“다른 효과?”

“간지러움을 동반한 발진이 생겨나요. 반응이 굉장히 극적이기 때문에 피부에 닿거나 호흡하는 순간 바로 작용 할 거예요.”

“호오.”

세이혼이 손에 들린 주머니를 바라봤다.

신발에 들어간 작은 돌멩이 하나도 전투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 하물며 간지러움을 유발하는 발진? 차를 먹은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당 부분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하. 불쑥 나서더니 그 때문이었던 거냐?”

“죄송해요. 의논할 시간이 없어서……”

“할 말이야 많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쿤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정리했다.

목책이 있는 방향에서 봉화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담을 알리는 신호였다.

#

바운티 헌터들이 뒤로 물러나고, 목책 앞으로 커다란 공터가 마련되었다. 앙크투 부족 사람들이 나와 자리를 선점하고 회담을 준비했다. 어찌 보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형태였지만, 바운티 헌터들은 거침없이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무리를 이끌던 거한과 찢어진 눈의 남자.

그리고 조금은 칙칙한 외모의 여자가 대표하는 셋으로 선발되어 위치했다. 앙크투 부족에서는 늑대와 비슷한 문신을 한 남자 셋이 나왔다. 모두 덩치가 산만했는데, 특히 중앙에 선 남자가 거한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몸을 자랑했다.

“큭큭.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는군.”

“무례한 이방인. 용건을 말해라. 너희의 얼굴을 길게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호오. 적극적이군. 그 배짱으로 버틴 건가? 우리는 분명 용건을 말 했을 텐데? 네놈들이 숨겨 둔 그자를 내 놓아라.”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부족의 명예가 달린 일.”

“어리석군. 그자가 너희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없음은 알고 있을 텐데? 왜 그리 고집을 부리는 거지?”

거한의 쏘아붙이는 말에, 족장의 얼굴위로 굵은 주름이 번졌다.

표정에는 꽤 많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짜증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보였다. 남자를 내어주지 않는 것이 순전히 자의로 인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그건 어차피 부족의 이야기. 그는 계절이 끝나는 순간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 뒤를 노려서 쫓는 건 너희의 자유. 하지만 그 전에는 절대로 내어 줄 수가 없다.”

“고집을 부리는군.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네놈들을 몰살시키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해 볼 테면 해 봐라. 앙크투의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네놈들의 살점을 씹어 뱃속으로 우겨넣어 주마.”

“지독한 야만인들 같으니……”

으스스한 족장의 기세에 거한이 한 풀 꺾인 목소리를 냈다.

잠시 고개를 뒤로 빼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손을 흔들었다. 마치 무언가 잘못 되었다 말 하는 듯.

“그래도 혹시나 했다. 멍청한 야안인 놈들과 말이 통할까 하고 말이야.”

“네놈……! 그 입을 이곳에서 찢어 줄 수도 있다!”

“큭. 항상 그런 식이니까 발전이 없는 거다.”

쿵. 거한이 발을 세차게 굴렀다.

무언가의 신호. 대치하던 족장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기습이다!!!”

족장의 측근이 다급히 외쳤다.

닫혀있던 목책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부족민들이 뛰쳐나왔다. 동시에 바운티 헌터 무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카우터를 따로 운용했군.’

사태를 바라보던 쿤이 상황을 이해했다.

기습적인 화살 공격은 밖에서 대기하던 스카우터의 소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궁술이라는 것은 그리 빼어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거리가 있는 만큼 명중률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 수를 낸 것은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다.

혼란을 불러 온 뒤, 적장의 머리를 베겠다는 의미.

거한이 셋 뿐인 대표 회담에 직접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즉, 거한은 자신의 실력을 굉장히 자신하고 있다는 말이다.

단숨에 족장을 베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어이, 너희는 뒤로 빠져라.”

“루크, 이놈들하고 뒤로 가.”

그리고 그 사이, 바운티 헌터들의 진형은 세이혼이 예측했던 대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쿤 일행을 뒤로 돌리고, 나머지 무리가 앞으로 이동했다. 목책 앞은 족장을 구하기 위한 부족민들의 난입으로 난전에 돌입. 힘 싸움으로 번지기 직전까지 와 있었다.

“쿤.”

그렇게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 세이혼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쿤이 허리춤에서 블루 비를 뽑았다. 여자가 포함된 무리. 무기까지 빼앗지 않고 포로로 취급했으니 얼마나 얕잡아 본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하긴, 애초에 그런 것을 노리고 낮은 자세를 위치했던 것이니 당한 이들만을 욕할 건 아니다.

“너는 살려두지.”

“……엉?”

루크가 얼빠진 얼굴로 돌아봤다.

쿤이 손잡이로 후두부를 강타 한 뒤,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좌우로 일행을 포위하고 있던 남자 둘이 순식간에 목을 베여 고꾸라졌다. 비명 대신 피 거품이 목 위로 번져 나왔다.

“네놈……!”

한 호흡이 흘러갔을 때, 조금은 강건해 보이는 남자가 이상을 눈치 채고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일행을 낮춰 봤을 때부터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가 진행되고 있던 것이다. 세이혼이 바람과 같이 날아 남자의 목을 베었다. 소리조차 없었다. 흩날리는 핏물은 마치 연극의 소품과도 같았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바람처럼.

세이혼이 무리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의 검이 닿는 곳에는 오직 죽은 자의 흔적만이 남았다. 다급히 대응하여 검을 붙여 보지만 제대로 상대하는 자는 없었다. 삽시간에 주변 열 명이 죽어나갔다.

“젠장!! 뒤에 멍청이들아!!”

“저 새끼들 뭐야!? 어이, 막아!!”

“8조랑 9조는 나를 따라와! 뒤에 저 새끼들부터 족친다!”

혼란이 번지고, 목책으로 이동하던 무리 중 일부가 떨어져 나왔다.

쿤이 세이혼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즉시 숲의 저편으로 달려 나갔다.

“엘, 너는 저놈을 쫓아라! 나는 이 건방진 새끼를 처리하겠다.”

“알겠습니다!”

개 중에 판단이 빠른 놈이 있었다.

무리를 나누어 하나는 쿤에게 붙이고, 자신은 세이혼에게 달려갔다.

그래서야 곤란하다.

세이혼이 힐끔 눈치를 본 뒤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라라에게 받은 물건이다. 마침 바람도 숲에서 공터 쪽으로 흘러가는 상황. 가루를 뿌리기에는 적합했다. 그대로 하늘위로 힘껏 던졌다.

푸화학—!

작은 돌멩이 하나가 허공에 뜬 주머니를 관통했다.

세이혼이 던진 것이다. 이내, 뿌연 가루가 바람을 타고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느낀 무리가 펄쩍 뛰며 거리를 벌려 보았지만 바람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이내, 장내의 인물 중 상당수가 가루에 노출되어 버렸다.

“아, 아악! 가, 가려워! 이거 뭐야!?”

“크아악!! 무, 물 가져와!!”

“젠장! 아아악!!”

효과는 라라가 설명 한 것 보다 대단했다.

삽시간에 발진이 돌고 피부가 벌겋게 변한 이들이 바닥을 굴렀다. 손과 막대기 등으로 마구 긁었지만 가려움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이런 잔재주를!!!”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인근에 남은 이들 중 스물 정도는 차를 마시지 않은 듯 멀쩡했다. 앞서 명령을 내리던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시뻘게진 눈으로 세이혼을 노려보더니 외쳤다.

“죽여!!! 저 새끼랑, 도망친 년 놈들 모두 죽여!!!”

혼란에 휩싸인 숲 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

외곽으로 빠지는 쿤을 따라온 적은 다섯 남짓이었다.

백 명이 넘는 무리 중 겨우 다섯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할 수 있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무려 셋이나 있다. 자칫하면 인질이라도 잡혀서 상황이 난감하게 흘러 갈 수 있었다.

‘하나씩 처리하자.’

울창한 덤불이 나왔다.

란 등을 숨긴 뒤, 숨을 고르며 근처 노송에 몸을 기댔다. 거친 숨이 귓가로 들려왔다.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와 거침없이 내지르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합주곡마냥 귀를 울렸다. 하푼식 감각 수련법. 매번 느끼지만 정말로 대단한 부분이 있다. 특히, 시야로 적을 확인하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준다.

“컥……!”

바로 이처럼.

쿤이 스쳐가는 적의 움직임에 맞춰서 단검을 찔렀다.

하급 은신에 세이혼에게 배운 요령까지 있는지라 그의 기척을 잡은 적은 없었다. 불쑥 튀어나오는 단검은 마치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 같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저기 있다!!”

다섯이 나뉘지 않고, 둘 셋으로 달려왔다는 점은 이런 면에서 훌륭하다.

쿤이 하나를 제거하는 순간 남은 인원이 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투박한 도끼를 양 손으로 잡은 채 장작을 패듯 쿤에게 달려들었다.

‘닿고……’

검과 도끼의 날이 부딪혔다.

거칠게 휘둘렀지만 닿는 모습은 마치 꽃 위에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 소리조차 부드럽다. ‘이익!’ 반사적으로 남자가 도끼를 거두었다. 그에 따라 쿤의 검도 따라 움직였다. 거리가 소각되고, 노출 된 목을 쿤이 찔렀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남자는 방어자세조차 취하지 못했다. 아마 도끼를 당겨 자신의 목이 베였다 생각 할 지도……

“왁슨!! 이 쥐좆같은 새끼!!”

화살 한 대가 빠르게 날아왔다.

쿤이 몸을 숙여 피하고는 재빨리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단검으로 찍고, 그 반탄력으로 몸이 솟구쳤다. 세이혼의 동작과도 유사하다. 오가며 배운 것이 그의 동작이니 어느새 닮아가고 있었다.

“어디 갔어? 이 새끼 어디 갔어!?”

“어, 어이! 위에!!”

평지 싸움에서 위를 염두에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허둥지둥 고개 흔드는 남자 뒤에서 다른 동료가 경고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바. 비호처럼 떨어진 쿤의 블루 비가 뒷목을 찢고 내려왔다.

“히익!!!”

다섯 중 셋이 죽은 것은 몇 호흡 되지도 않은 시간.

그제야 남은 이들도 쿤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상대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룹에 대한 충성심? 숫자로 세를 부풀린 이들에게 그런 건 없다. 하나가 몸을 돌리니, 이내 나머지도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흥……!”

추격해서 죽일 이유까지는 없다.

쿤이 넝쿨로 돌아와 란 등을 살폈다. 셋도 이제는 이런 싸움에 적응이 된 건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인에 마모되는 감성이 아쉽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이 된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손짓을 했다.

세이혼이 날뛸 수 있게 조금 더 안으로 숨을 생각이었다.

#

숲속에서 날뛰는 세이혼은 악령과 같았다.

밤 그림자 사이에서 튀어 나오는 공포의 한 조각. 꿈을 잘라먹고, 죽음에 저항하는 한 줄기의 동아줄마저 끊어갔다.

피와 시체가 강을 이루었다.

공포에 눌린 양떼는 본래의 목적조차 잊은 채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

백 명이 넘는 무리 중 절반이 죽었다.

그 중 스물이 넘는 이를 세이혼 혼자 처리했으니, 그를 보며 오금이 저려 바지춤을 잡는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허억……허억!”

“시, 시펄! 그 새끼 대체 뭐하는 놈이야!?”

잎사귀가 길게 늘어져 방향을 찾기 어려운 숲 속.

상처 입은 무리가 숨을 거칠게 고르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회담을 진행하던 거한이다. 난전이 이어지고 세이혼의 활약으로 전황이 어려워지자 일단 뒤로 몸을 뺀 것이다. 워낙 중구난방으로 도망친 덕에 주변에는 겨우 부하 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합니까? 애들도 반 토막 났는데……”

“이런 썅! 시끄러워! 애새끼들 뒈졌으면 공고 올리고 다시 모집하면 그만이야! 이번에는 두 배로 끌고 오겠어. 그 빌어먹을 야만인 놈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

그때, 무리의 앞으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느긋하게 단검을 돌리는 남자. 바로 쿤이었다.

“너……이 새끼!! 처음부터 우리한테 계획적으로 접근 한 거냐!?”

“소설 쓰고 있군. 멀리 있던 우리를 찾아 낸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긴 대장이라는 인물이 이 모양이니, 꼴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감히!! 죽고 싶은 거냐?”

“죽여? 네가 나를?”

쿤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상대는 셋이다. 하지만 셋 중 둘은 거의 넝마와 같았고, 그나마 몸이 성한 거한조차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쿤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성격이다. 승산이 없었다면 이렇게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크, 크윽!!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냐!?”

“앙크투 부족과 볼 일이 조금 있어서 말이야. 그쪽이 난장을 피우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사람을 낮춰 봐, 도구처럼 사용하려던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따위 헛소리로……! 내가 상처를 조금 입었다고 네놈 하나 이기지 못할 거 같으냐!?”

“죽어가는 맹수는 위험하다고 하지. 하지만 네놈에게서는 그런 냄새가 안 나.”

“네노옴!!”

노한 거한이 달려들었다.

사람 몸통 만 한 배틀 엑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만큼 힘이 대단했다.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귀를 다 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쿤은 당황하지 않았다. 경비대장부터 벤타까지. 상대한 이들 중 만만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세이혼에게 수련을 받고 있다. 숫자를 제외하고, 바운티 헌터 정도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소리와 풍압. 감각으로 거리를 재고 반걸음을 뺐다.

날 선 감각이 코앞을 스쳐갔다. 앞머리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눈빛은 미동조차 없이 상대를 응시했다.

궤적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산보를 나가듯, 자연스러운 걸음이 이어졌다. 거리가 사라지고 무기를 수습하는 거한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당황과 낭패감. 복잡한 심경이 뒤섞인 눈동자였다.

블루 비로 겨드랑이를 찌른 뒤, 고통에 주저앉는 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핏물과 함께 이빨 몇 개가 튀어 나갔다.

“어, 어어……”

“젠장! 이 새끼는 뭐 또 이리 세?”

남아있던 둘은 쿤에게 대항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리다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바운티 헌터의 의리라는 것은 이 정도. 그렇기에 쿤은 애초부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숫자만 제외하면 이들은 모래알 같다.

“그럼 몇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크아아아아!!!”

쿤이 겨드랑이에 박힌 단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발로 거한의 등을 밟은 채.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숲 속을 울렸다.

“어째서 앙크투 부족에 찾아 온 거지? 뭘 노리고 있는 거냐?”

기백이 넘는 인물들을 이끌고 자치령으로 선포 된 부족까지 쳐들어온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자치령을 건드려도 좋을 만큼의 뒷배를 지고 있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급한 일이라는 의미. 도망치는 길목에 이런 일이 우연하게 일어난다? 그럴 수도 있지만 쿤은 확실한 것을 좋아했다.

란 등을 숨기고, 도망치는 거한을 노린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내, 내가 말 할 거 같으……크아아악!!”

발악하는 거한의 목 뒤를 쿤이 세게 눌렀다.

그는 고문에 망설이거나 거부감을 가진 정도의 인물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비열해 질 수 있었다. 신과 만나고, 라라 루루 등을 거치며 성격이 조금 유해지기는 했으나 본질은 그대로였다.

“답하지 않는다면 네 몸을 하나씩 잘라 개먹이로 주겠다. 귓불이 씹히는 맛이 있다고 하던데? 눈으로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스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거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도가 ‘하급 위압’의 발동을 부추겼다. 이를 갈며 잠시 반항해 보다, 의미 없음을 깨닫고는 축 늘어졌다.

힘 빠진 목소리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한 남자를 찾아오라는 의뢰를 받았다.”

“의뢰? 현상금 명부에 적힌 인물을 찾으러 온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부탁을 받은 거다.”

“누구지?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려면 의뢰를 내린 인물이 제법 힘이 있어야 할 텐데.”

특히나, 자치령까지 건드리려면.

거한이 잠시 고민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답을 했다.

“로즈 백작부인이다.”

“……백작? 무슨 의미지?”

“흥! 그녀를 모르는 모습을 보니, 네놈은 공화국의 인물이 아니군. 장미 기사단의 주인이자, 제국과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승전보를 올렸던 위대한 장군을 모르는 거냐?”

“아……붉은 꽃의 장군. 장미 가시의 장군을 말 하는군.”

이는 제국까지도 잘 알려진 이름이다.

제국과 공화국의 전쟁 당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패전보가 들려올 때 유일하게 적을 격파하여 희망을 주었던 이들이 바로 장미기사단이다. 로즈 백작은 붉은 꽃의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게 들으니 더 이해가 안 간다.

아직까지 백작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만큼 공화국 내부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어울리지 않는 바운티 헌터를 풀어서 찾으려는 인물이 대체 누구란 말일까.

쿤이 몸을 낮추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장군이 찾으려는 남자가 대체 누구지?”

“크윽……! 우리도 자세한 건 몰라! 다만, 그 남자가 마법사고 재앙을 불러오는 인물이라는 것밖에.”

“마법사? 재앙?”

“그가 지금껏 머물렀던 지역에서는 모두 재앙이 들이닥쳤다. 기근이 오고, 사람이 죽어나갔어! 오늘의 일을 보니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은 거 같군!”

저주받은 마법사.

쿤은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신화 속 요정만큼이나 보기가 힘든 존재다. 성정이 괴팍하기 일쑤고,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한 곳에 잡아 두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 만큼, 신비와 이치에 깊게 닿아 있어 운명적 흐름이 스쳐가는 곳이라면 무조건 그들의 발자취가 발견되곤 했다.

신과 이단. 이 흐름에 마법사가 끼어있다는 것은 어떤 교차점이 존재한다는 말로도 해석 할 수 있다. 그 방향이 늦가을 하늘 위 구름처럼 종잡기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내가 말 할 수 있는 건 전부 말 했다! 이제 그만 나를 놔 줘!”

“아아. 그 전에 한 가지 더.”

“크윽!!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냐!?”

버둥거리는 거한의 얼굴을 살피며 쿤이 다시 입을 떼었다.

길 가다가 만난 바운티 헌터와의 우연적 사건은 끝이 났다. 지금의 질문은 조금 더 개인적인 것.

“혹시 믿고 있는 신이 있나?”

“뭐, 뭐!?”

“신 말이다. 종교. 너 같은 놈이라도 믿음은 가능한 거니까.”

“그,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역시 그런가. 아무래도 바운티 헌터들은 이단과는 관계가 없는 듯 보였다.

우연적 만남이라 신의 의지가 개인된 것이 아닐까 했는데, 이번에는 방향이 조금 다른 거 같다.

“허면 이번 기회에 알려주마.”

“뭐를……?”

“서 준경. 네가 빌어야 하는 신의 이름이다.”

“서 준경?”

[경험치가 증가했습니다.]

좋은 소리.

쿤이 그대로 거한의 목을 베었다.

※작가의 말

본래 두편인 것을 하나로 합쳐서 올립니다.

무료때와 같은 호흡으로 글을 써 왔는데, 유료는 조금 색을 달리 할 필요가 있겠더군요. 일단 길게 늘어지는 부분은 한 편으로 마감. 다음 편부터 조금씩 수정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 표시 전후로 화면 전환하는 부분에 공백이 너무 많다는 얘기가 있던데, 지금은 괜찮은가요?

* 자정 부근해서 한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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