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79화 (79/240)

쿤이 일행과 거리를 벌렸을 즈음, 바운티 헌터 무리가 앞으로 당도했다.

목책 앞 본진 병력은 남겨 둔 채 일부만 왔음에도 거의 스물에 달했다. 도망치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지만, 쿤이나 세이혼 둘 다 이것은 어렵다 판단했다. 다가온 무리 중 상당수가 궁수였다. 쿤과 세이혼은 모르겠지만 란 등은 탁 트인 들판에서 도망 칠 방법이 거의 없었다.

바운티 헌터 무리가 다가와, 빙 둘러서 포진을 한 채 세이혼을 노려봤다.

“어이, 뭐하는 놈인데 여기서 서성거리냐?”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일이 난듯하여 피하고자 잠시 머물렀을 뿐입니다.”

“여행객? 어떤 멍청이가 야만인 지역에서 여행을 다녀? 그걸 믿으라고 하는 거냐?”

“원체 외지에서 오래 살아 이리 돌아다녀도 견딜 만 합니다. 공화국 밖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죠.”

세이혼이 천천히 답을 했다.

“호오, 그럼 야만인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군.”

“……남들보다는 조금 더 아는 정도입니다.”

앞서 목책을 두고 소리치던 남자다.

멀리서 볼 때도 덩치가 크다 싶었는데, 세이혼에 앞에 서 있는 모양새를 보니 더욱 거대했다. 어쩌면 리자드맨보다도 크지 않을까? 좀처럼 보기 힘든 덩치였다.

“저 쓰레기 같은 야만인 놈들을 끌어 낼 방법이 있으면 말 해 봐라.”

“앙크투 부족을 말하는군요. 본래 호전적인 부족이라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데……이리 틀어박혀 있다는 말은 귀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겠군요.”

세이혼의 말에 남자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쿤의 화술이라도 옮아 붙은 건지 말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호기로운 부족이 이리 창을 꺾고 들어갔다면 어지간해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말로 풀어 가심이 어떻겠습니까?”

“말로? 저 무식한 야만인들이 말로 상대가 되겠어?”

“그들의 복색이나 행동이 우리와 다르다 하지만 깊이 이해하면 큰 차이도 없습니다. 제가 한 번 말을 해 볼 테니 기회를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뒤에서 지켜보던 쿤이 나직이 감탄성을 흘렸다.

상대와 대응을 하면서 스리슬쩍 앙크투 부족과 접촉 할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검 쓰는 모양새가 기가 막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언변도 상당했다.

“대장, 어찌 하실 거유?”

“에이, 뭔 대화유!? 그냥 확 다 불 질러 버리고 처 죽이면 되지.”

“새끼야, 태웠다가 그 놈도 죽어 버리면 현상금이 날아가는 거 몰라?”

“에이 씨.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부하들의 말이 오가는 와중에도 거한은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다 코끝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을 내린 모양. 소란이 뚝 끊기고 모두가 그의 입을 주시했다.

“뒤쪽에 숨겨 둔 것들은 가족이냐?”

“……그렇습니다만.”

“그럼 저들을 이곳에 두고 잡것들과 이야기를 해 보고 와라.”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입 닫아, 새끼야. 이 몸이 하라면 하는 거야. 아니면 여기서 목 위로 잘라줄까?”

세이혼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손등위로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여차하면 검이라도 뽑을 기세. 스산한 살기가 그의 발밑을 타고 돌았다.

“형님.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하하.”

그때, 쿤이 먼발치에서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수십의 바운티 헌터와 싸워야 하는 상황. 아무리 세이혼이 강하다고 해도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서 난전이 벌어지면 란 등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일단은 작금의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좋았다.

“응? 그래, 동생 놈은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네. 어떻게 할 거냐?”

“……그럼 사람들을 뒤로 물려주십시오. 제가 말을 해 보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말 해.”

“앙크투 부족의 특성 상, 이미 앙금을 가진 이들이 곁에 있으면 절대로 우호적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잠시면 되니 뒤로 사람들을 물려주십시오.”

“아 이 새끼가……”

“됐다. 그 말대로 해 봐. 제대로 안 풀리면 여기 있는 애들을 썰어버리면 되니까.”

거한의 시선이 란 등에게 닿았다.

세이혼의 몸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쿤이 눈짓으로 말렸다. 지금은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만약의 경우에는……’

쿤의 머리가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갔다.

#

세이혼이 앙크투 부족과 대면을 하기 위해 목책으로 향하고 남은 무리는 처음 나왔던 숲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놀랍게도 안에 병력이 더 있었다. 전부 합치면 거의 100명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아무리 바운티 헌터가 돈 필요한 뜨내기들까지 집어넣어 세 불리기를 좋아한다지만 이것은 과한 숫자였다. 대체 현상금이 걸린 인물이 누구이기에 이런 숫자의 사람이 움직인단 말일까? 쿤은 의구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쓸데없이 움직이면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릴 테니까.”

“아하하……당연한 말씀을. 용맹하신 분들 앞에서 어떻게 헛된 생각을 하겠습니까? 쥐죽은 듯 있을 테니, 없다 생각하시고 일을 보십시오.”

“커험. 그래. 뭐, 좀 아네.”

쿤을 맡은 쥐 눈의 남자가 헛기침 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쿤 등만 따로 남은 건 아니다. 주변으로 셋씩 한 조로 서른 명이 둘러쌌다. 나머지는 불을 피우고 짐에서 말린 고기 등을 꺼내 조리를 시작했다. 적과 대치하면서도 한 쪽에서는 능숙하게 야영지를 구축했다.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모습이지만, 이게 바운티 헌터였다.

그들은 밤잠을 지워가며 목표물을 쫓기 때문에 지점이 고착되는 순간에는 자연스레 야영지를 건설했다. 먹을 수 있는 순간에는 어떻게든 끼니를 채우는 것이다.

이내 고소한 냄새가 숲 속으로 퍼져갔다.

“으……”

“루루? 어디 아픈 거냐?”

“아, 아뇨. 냄새가 나다보니 배가 고파서요.”

생각해보니, 부족에 들를 생각으로 꽤 오랜 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라라와 란도 배가 고픈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밥 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쿤이 조금만 참으라고 다독였다.

“어이, 너희는 그 뭐냐. 가족이야?”

그때, 조금은 추레한 생김새의 남자가 일행에게 다가왔다.

흰 두건에 노랗게 물든 나무 주걱. 방금까지 요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쿤은 상대의 생김새를 보고 바로 파악했다. 이처럼 대규모의 바운티 헌터가 움직일 경우 요리사를 대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허리춤에 무기조차 없는 것으로 봐서는 딱 그런 경우로 보였다.

“이쪽은 형님 딸이고, 여기 둘은 제 동생입니다.”

“오……딸이라. 이런 오지까지 오기 힘들었을 텐데. 꼬마 아가씨 다리는 괜찮나?”

“괘, 괜찮아요. 란은 잘 걸을 수 있어요.”

“오하하하. 그래. 당차네. 아, 그리고 이거. 배고프지? 먹고 있어.”

조금 특이하게 웃은 그는 나뭇잎으로 싼 빵을 건넸다. 옥수수를 쪄서 만든 것으로 휴대하기 편해서 이렇게 가지고 다니는 이들이 꽤 많았다. 란이 얼떨결에 받아 든 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남자가 또 한 번 특이하게 웃었다.

갑자기 다가와 조금 경계하기는 했으나 나쁜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네, 네.”

“어이, 루크. 잡담하지 말고 와서 스튜나 제대로 끓여. 뭐야, 이게? 쓰기만 하다고.”

“향신료가 바닥났어. 어쩔 수 없다고.”

“쯧. 쓸모없으면 요리라도 제대로 해야지. 대장은 저딴 새끼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둬라, 인마. 저런 놈이라도 있어야 귀찮게 뒤처리 안 하지.”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남자, 루크가 얼굴을 붉혔다.

흔히 있는 일이다. 거칠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사람들 사이에 요리 하나로 끼어 든 인물은 섞이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은 무리 중 손재주 있는 인물에게 요리를 맡기는 게 보통. 전투력이 부족한 인물을 따로 둔 지금의 구성이 조금 특이한 거였다.

“쓴 맛이 나면 에푸루 가지를 섞어서 끓이세요.”

“……응?”

“라라?”

그렇게 루크가 돌아서려는 찰나, 라라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쿤이 깜짝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서는 것은 좋지 않다. 지금은 일단 아무 일 없지만 누군가 하나 그녀의 후드라도 벗길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에푸루? 붉은 색 꽃잎이 달린 그거?”

“네. 물에 넣어 끓이면 짠 맛이 올라오거든요. 향신료가 부족하면 그걸로 대체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가진 게 조금 있으니 드릴게요.”

“아……그쪽은 요리에 대해서 좀 알아?”

“아뇨, 그 정도까지는. 그냥 맛을 낼 수 있는 약초에 대해서 조금 알 뿐이에요. 텁텁한 빵을 씹을 거라면 란셸잎을 으깨서 같이 먹으면 좋아요. 단 맛이 나서 한 결 나을 거예요.”

쿤의 걱정은 전혀 모르는 듯 라라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루크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다 주변을 휘휘 보며 한 사람을 찾았다.

“롱. 이 여자 잠깐만 빌려가도 될까?”

“어이, 대장이 한 말 잊었어?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잖아.”

“나도 알아. 안다고. 근데, 이 여자가 나보다 맛내는데 일가견이 있잖아. 안 그래도 향신료가 딱 떨어져서 다들 나보고 욕만 하는데, 손 좀 빌리자고.”

“쯧. 그럼 먹을 만 한 게 나오는 거냐?”

“흐흐. 지금보다야 훨씬 낫겠지.”

루크는 그렇게 허락을 받더니, 라라와 함께 숲 중앙에 놓인 모닥불로 걸어가려고 했다.

“자, 잠시 만요. 굳이 동생가지 데리고 가야 할까요? 그냥 말 한 약초만 풀면……”

“양이란 게 있잖아. 잠깐만 빌려 갈 게. 이상한 짓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으음. 하지만……”

“오빠, 걱정하지 마요. 금방 다녀올게요.”

이리 말 하며, 후드 아래로 라라가 눈을 찡긋했다.

쿤이 미간을 좁힌 채 그 눈빛을 받았다.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어떤 생각이 기반을 두었음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중급 신관이 되어 책임감을 느끼며 저리 행동하는 거라면 어설픈 수에 실수를 불러 올 수도 있다.

지금은 바운티 헌터 무리 자체가 쿤 일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별 일이 없을 뿐. 괜히 관심이라도 쏠리게 되면 안 좋은 일이 벌어 질 수도 있다. 바운티 헌터는 지역 건달패와 한 끗 차이인 무리. 한 번 상황이 흘러가면 걷잡을 수 없다.

‘무모한 짓만 안 했으면 좋겠군.’

어쨌든 그렇게 루크를 따라간 라라는 한껏 쌓아 둔 모닥불 쪽으로 이동했다.

앳돼 보이는 소년 셋이 커다란 솥 주변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요리하는 루크의 보조를 맡은 신입으로 보였다.

“여기서 하면 돼. 맛내려면 뭐가 더 필요해?”

“아까 말 한 에푸루잎하고, 란셸 잎. 그리고 이런 스튜라면 헤일즈 꽃이 필요하겠네요. 보통 이 계절이면 흔하게 찾을 수 있는데……아! 저기 있네요. 주변에 있으면 좀 뜯어 주세요.”

라라는 능숙하게 루크에게 지시를 내렸다.

배낭에서 꺼낸 약초와 주변에서 찾은 것들을 배합해서 스튜와 조리하는 다른 요리에 풀었다. 한 층 그럴듯해진 냄새가 주변으로 풍겨갔다. 일 없이 늘어져 있던 다른 무리들도 냄새를 맡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왔다.

“오, 그럴싸한데? 루크 네가 한 거냐?”

“흐……한 번 먹어 봐라.”

“어디. 오! 괜찮은데? 어이, 와서 좀 들어. 아까 그 맹탕보다 훨씬 낫네.”

숫자가 더 늘어났다.

루크가 히죽히죽 웃으며 스튜와 말린 고기를 계속 건네주었다. 퍽퍽해서 씹기도 힘든 걸 물에 풀어서 부드럽게 만든 것이다.

“오~이 계집이 제법 재주가 있는 가 본데?”

“흐흐. 저 멍청한 루크 치우고, 이 계집을 데리고 다니자고 하자.”

“근데 저 후드는 언제까지 쓰고 있는 거야? 어이, 계집. 그거 좀 벗어 봐.”

사람이 늘어나다보니 루크 옆에 선 라라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녀가 약초로 향신료를 대체했다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그보다는 단지 여자라는 것에 눈을 빛내는 자들이 더 많았지만.

“아……얼굴에 흉측해서……”

라라가 후드를 더 깊숙이 누르며 답을 했다.

“에이, 썅. 그 낯짝이 얼마나 비싸다고 재는 거야? 빨리 안 벗어?”

“어이, 대장이 잘 지키고 있으라 했잖아.”

“야, 내가 뭐 배를 째기라도 한다냐? 그냥 얼굴만 좀 보자고!”

개 중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가 갑자기 손을 확 뻗었다.

라라의 후드가 뒤로 확 넘어갔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쿤이 크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얼굴이라면 3일 굶은 개 사이로 떨어진 고기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입술을 잘근 씹으며 난전을 각오했다.

“억! 뭐야, 이거?”

“얼굴이 왜 이래? 야야! 빨리 후드 다시 씌워!!”

그런데, 나오는 반응이 쿤의 예상과는 달랐다.

놀랍게도 벗겨진 후드 아래로 드러난 라라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흉측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달수를 채우지 못한 아이나, 어릴 적 병을 앓은 경우에 나타나는 외관. 혹시나 하고 기대하던 무리가 치를 떨며 후드를 다시 씌웠다.

“에이 썅. 입맛만 버렸네.”

말 그대로. 들고 씹던 고기마저 놓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라라가 후드를 깊이 누르고는 낭랑하게 ― 얼굴과 비교되어 더욱 예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럼 입가심으로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후드 아래로 가려진 그녀의 입술은 분명 웃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연합(3)편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죠엘과 준경의 대화에서 너무 밑지고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 자세를 바꾸고 거래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 죠엘이 준경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이미 준비되었던 부분입니다. 줄기차게 다른 인물의 등장을 암시해 왔었죠. 사실 독점하던 캐릭터가 무너지며 실망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쪽의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결국 아군과 적군의 등장이 불가피했죠. 위기와 대척점이 없으면 준경의 동기가 너무 약해지니까요 ^^;

* 여러 질책과 격려. 잘 받아 들이고 더욱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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