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을 더 머물고 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사이 마을을 이루고 있던 엘본의 무리들 역시 이주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제 적의 머리가 사라졌으니 본단으로 돌아가 그들의 자리를 회복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조금 더 이르게 일행에게 작별을 건넨 사람이 있었다.
“움-타는 돌아간다. 동굴의 리자드맨은 전부 사라졌다. 이곳의 리자드맨도 다 떠나간다. 족장은 좋아 할 거다.”
“가서 그대로 전해. 부탁했던 일은 모두 처리했다고.”
“움-타 기쁘다. 그래서 이걸 준다.”
움-타가 줄곧 매고 다니던 등짐을 풀러 서는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나무로 만든 물건이었는데, 조각된 표면이 꽤 그럴듯해 보였다. 적어도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그런 물건은 아니었다.
“이게 뭐지?”
“족장이 주었다. 동굴의 리자드맨들을 모두 처리하면 주라고 했다.”
“호오. 그래도 양심은 있었군.”
일종의 보상.
대뜸 조건부터 걸어 마뜩치 않았던 사둠타 부족의 족장이었는데, 이렇게 대가를 챙겨주면 또 인식이 다르게 박힌다. 쿤이 스리슬쩍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단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팔뚝보다 짧은 단검이었다.
날이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잡이에 그려진 기묘한 문양이나 광채가 흐르는 날. 일견하기로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오래전에 마을에서 죽은 모험가의 물건이다. 우리는 이런 무기를 안 쓴다. 네가 가져라.”
“마침 잘 됐군. 여분의 단검도 떨어져 가던 판이었는데.”
쿤이 잡아서 휘둘러 봤다.
적당히 무게감이 있고, 손에 착 감겨들었다. 근처에 있는 짚을 한 줌 쥐어 베어 보았는데 소리도 없이 잘렸다. 날 역시 잘 갈려 있었다.
“그리고 족장이 그랬다. 단검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고. 우리는 모르지만 알아내면 잘 써라.”
“아티펙트라는 건가?”
“모른다. 족장이 말 한 거를 따라했을 뿐이다.”
움-타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쿤이 단검을 다시 한 번 찬찬이 살폈다. 아티펙트는 특별한 힘이 실린 도구를 총칭하는 단어다. 마법일수도 있고 주술일수도 있으며 신성력일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이런 물건은 절대로 흔한 것이 아니다.
‘좋은 걸 구했군.’
몇 번을 더 흔들어 보고는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혹시 이름은 있나?”
“음. 족장이 블루 비라 불렀던 걸로 기억한다.”
“블루 비라. 괜찮은 이름이네.”
블루 비는 맹독을 가진 벌로 유명하다.
단검의 특성 상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 중요 할 터. 그 특성을 드러내기에는 적합한 이름이다. 꽤나 마음에 들었다.
쿤이 허리춤을 툭툭 치며 웃었다.
#
움-타가 사둠타 부족으로 돌아가고, 쿤 일행도 엘본의 무리와 헤어졌다.
사둠타 부족장이 약속대로 추적자들을 따돌려 주었다면 며칠 정도의 여유는 있다. 하지만 그래도 서둘러서 움직이는 것이 좋다. 엘본의 무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즉시 앙크투 부족으로도 이동을 시작했다.
“세이혼. 앙크투 부족은 어떤 이들이지?”
숲의 경계를 따라 평원을 걸으며 쿤이 물었다.
“기본적으로 외부에 매우 배타적인 부족이네. 사냥을 업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매우 호전적이기도 하지. 특별한 경우 없이 외지인이 접근하려 한다면 곧바로 공격을 받을 거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 건가?”
“하푼이 해체되고 공화국 안을 떠돌아다닐 때, 인연이 되어 1년간 머문 적이 있네. 당시에는 란도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지.”
“배타적인데 용케도 그렇게 했군.”
“호전적인 무리인 만큼 힘에 대한 숭배 의식도 강하지. 당시의 부족장과 사소한 일로 싸우게 됐고, 그를 제압했네. 덕분에 마을 안쪽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받을 수 있었지.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전과 같지는 않겠지만……그래도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 거네.”
확실히 세이혼의 힘이라면 숭배받기에 충분하다.
“저기, 세이혼 삼촌. 근데 그 부족에는 꼭 들러야 하나요? 그냥 이대로 쭉 가서 공화국 내륙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루루와 두런두런 말 하며 걷던 라라가 물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힘찬 얼굴. 중급 신관으로 올라서고 난 뒤 무언가 자신에게 변화를 주려는 것 같았다.
“변방부족들과의 경계선에 선 마을들은 모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굴락의 팔도 있겠지. 일단은 부족 사이로 이동해서 북단에 위치한 레스터 요새까지는 가는 게 현명하다.”
“레스터 요새요?”
“오래전에 북부 잉골라 왕국과 전쟁 당시 새워진 요새지. 지금은 그냥 변방의 도시가 돼 버렸다. 그곳에 내……처제가 살고 있어. 도움을 받아 내륙으로 갈 수 있게 해 줄 거다.”
처제라는 말에 쿤과 루루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화국내에서 쫓길 당시 도망 칠 수 있게 도움을 줬던 게 바로 처제다. 그녀의 입장 때문에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지금은 어쩔 수 없군.”
“입장? 공화국의 요직에 있는 건가요?”
“당시는 수석 서기관이었고, 몇 년 전에 선민관으로 임명 된 것으로 안다.”
“선민관이면 도시를 총괄하는 위치 아닌가?”
공화국 체제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쿤도 선민관 정도는 알고 있다.
보통 도시 토박이 유력인사 중 하나에서 뽑혀, 의회에서 파견한 감찰관과 함께 도시를 양분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감찰관은 조언과 보고와 역할이 주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도시를 다스리는 것은 선민과의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굴락의 팔을 피해 수도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거네.”
“하지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선뜻 도움을 주겠나?”
“……줄 거네. 그 점은 분명하니 걱정 할 필요 없다.”
잠시 주저하며 답을 하기는 했으나, 말끝은 명확하다.
따로 사정이 있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란을 업고 고개를 돌리는 그의 표정이 너무 무거웠다. 쿤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멈췄다.
딸 가진 아버지의 사정은 캐묻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지금은 믿자. 쿤이 속으로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루루와 라라도 그제야 신경을 끊고, 펼쳐진 들판으로 눈을 돌렸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아려오는 발바닥만큼이나 광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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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경계를 따라 나흘 정도를 걸었을까.
불룩 솟은 돌산이 하나 나왔다. 주변은 우거진데 특이하게도 산만 삭막했다. 잡초도 보이지 않아 황량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초입 부근에 나무로 만든 목책이 일자로 늘어서 있었다.
“여기가 앙크투 부족이 사는 곳인가?”
“음.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하지만 이 목책은 처음 보는 것이군.”
“싸움이라도 있었던 건가?”
멀리서 봐도 목책은 꽤나 많이 상해 있었다.
군데군데 불에 탄 흔적도 보였다. 외지에 있는 부족이 목책을 두고 누군가와 싸운다. 어떤 일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적대적인 부족이라도 있는 건가?”
“글쎄. 앙크투 부족이 호전적이기는 하지만 경우가 없는 이들은 아니다. 외지인이 침범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싸울 일은 별로 없을 텐데……”
분위기가 묘하다보니 일행이 쉬이 다가가지 못했다.
목책은 돌산과 숲 저편까지 이어져서 꽤나 넓은 영역을 가두고 있었다. 얼핏 봐도 부족민이 있는 지역은 전부 막아 둔 것 같았다. 부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목책 중앙에 있는 문을 통과해야 할 듯 보였다.
“어? 쿤 오빠 저기요.”
그때, 주변을 둘러보던 루루가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목책이 이어진 숲 부근이었다. 꽤 숫자가 돼 보이는 무리가 슬금슬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쿤이 즉시 일행을 뒤로 물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했다.
“미개한 야만인 놈들아!! 당장 문을 열고, 그놈을 내 놓아! 아니면 부락을 통째로 태워 버릴 줄 알아라!!”
나타난 무리 중 머리가 벗겨진 거한이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는 쿤 일행이 있는 곳까지 들렸다. 전형적인 도발과 협박. 싸움의 흔적은 이들 때문이었나. 쿤이 눈을 빛내며 유심히 바라봤다.
“그 동안은 이 몸의 넓은 아량으로 참아 주었을 뿐이다!! 계속 버티겠다면 너희의 씨를 말리는 것도 불사하지 않겠다!!”
“닥쳐라!! 이 쓰레기같은 놈아!!”
그때, 목책위로 누군가 불쑥 올라왔다.
쿤이 눈매를 좁히며 얼굴을 살폈다. 30살을 갓 넘었을까.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얼굴에는 거친 형태의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저들이 앙크투 부족이네.’ 세이혼이 옆에서 설명을 해 주었다.
“쓰레기? 크하하하! 이 버러지 같은 야만족들이 자치령이라는 이름으로 배를 불리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대장, 쓸데없이 말 하지 말고 통째로 구워버리죠!”
“키키키. 살점을 베어내어 불에 구우면 맛이 좋을 거 같아!”
“흐흐……먹을 만 한 계집들도 안에 있으려나? 야만족 계집들이 그렇게 쫄깃쫄깃하다던데.”
“이……!!”
한 마디 응수에, 비웃음과 끔찍한 협박이 뒤를 따라왔다.
목책위로 얼굴을 내민 앙크투 부족의 남자는 분을 참지 못하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적어도 말로는 목책 밖의 인물들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삼촌, 무슨 일일까요?”
“보아하니 저들은 바운티 헌터 같군.”
“바운티 헌터요?”
“현상금을 쫓는 개들이지. 고약하고 더러운 놈들이야. 되도록이면 상종하지 않는 게 좋다.”
쿤이 짧게 설명하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돌산 쪽 목책. 대화하는 무리와는 동떨어져, 몇 사람이 그 위를 타 오르고 있었다. 주의를 분산시키고 목표를 타격하는 전술. 너무나 전형적인 것이었다.
“앙크투 부족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세이혼이 쿤과 같은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찢어지는 비명과 들리고, 목책을 타고 올라가던 남자가 아래로 추락했다. 목책의 중간 부분으로 창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는 그대로 목이 꺾여 즉사했다.
“이런 썅. 누가 야만인들 멍청하다고 그랬어!?”
“아이고, 젠장. 신입 하나 뒈졌네.”
“캬하하하하! 밤중에 네 거시기 안 빤다고 죽인거 아니냐!?”
“시끄러워. 반반해서 아끼던 놈인데. 쓰벌. 저 잡것들을 전부 다 태워 버리겠어.”
사람 하나 죽은 것은 바운티 헌터들에게는 큰 일이 아니었다.
바운티 헌터는 큰돈을 버는 직업.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죽어 나가든, 목표를 달성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쿤 역시 용병질로 연병하던 입장이라 그들의 사고를 잘 이해하고 있다.
광견과 들개 정도의 차이.
“세이혼, 다른 방향으로 접근 할 방법은 없나?”
쿤이 시선을 떼고 물었다.
어떤 이유로 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상관 할 것은 아니다. 그냥 피해서 부족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
세이혼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 지형 상 목책을 저리 둘렀다면 다른 곳으로는 무리다. 그렇다고 안으로 잠입하는 것은 공격의 의사로 비춰질 수도 있고……”
“음. 그럼, 이대로 마을을 빗겨가야 하는 건가?”
“곤란하군. 보급 문제도 있거니와 안에서 구할 것이 필요했는데 말이야.”
“구할 것?”
“이대로 야만인들의 영역을 지나다 보면 검은 늪지대에 다다르게 된다. 본래라면 빙 둘러 가야하지만 그곳은 또 숲 레인저들이 지키는 영역이지.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어. 물건을 챙겨 늪을 건너는 것이 최선이다.”
쿤이 미간을 찡그렸다.
늪은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늪 관련한 의뢰에서 고생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혀를 몇 번이고 차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 갈 방법을 찾아야겠군.”
“저들도 밤이 되면 쉴 테니, 그 틈에 접촉을 해 보는 것이 좋겠네.”
“밤이라. 바운티헌터들은 밤 귀가 밝은 편인데……하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겠군. 그럼 뒤로 조금 물러나……”
“어이! 너희는 뭐하는 놈들이냐!?”
그리 상황을 정리하며 쿤이 물러나려는 순간.
먼 거리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 위. 바운티 헌터 무리가 뭉친 숲 속 나무위에 한 사람이 올라가 있었다. 굉장히 거리가 멀었는데도 그는 똑바로 쿤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스카우터군.”
스카우터는 용병이나 바운티 헌터. 일정 규모 이상의 무리에서 필수적으로 포함시키는 이들이다. 먼 거리를 보고, 사전에 정찰하는 것을 주 업으로 삼기 때문에 가끔은 이렇듯 생각지도 못한 거리에서 위치를 발견 하곤 한다.
“쿤, 애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라.”
바운티 헌터 무리가 일행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작가의 말
* 바운티 헌터는 평균적으로 일반 용병보다 약합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흔적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