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73화 (73/240)

거리를 좁히는 쿤의 걸음은 강렬했다.

흙이 뭉개지고 파편이 뒤로 튀어나갔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그의 몸은 단순한 속도로는 세이혼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벤타와 세이혼의 접점 까지 시간 내에 당도 할 수는 없었다.

으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이혼의 몸이 왔던 방향의 반대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몸을 회복한 벤타의 꼬리. 기가 막힐 정도의 능력을 자랑하는 세이혼이라 해도 죽었다 단정한 상대가 기습을 가하는 상황에서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검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다행이지만 눈으로 본 힘이 있으니 안심하기 어렵다. 아무리 능력이 빼어나도 잘못 맞으면 죽는 건 당연한 이야기.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이가 갈렸다.

멍하니 세이혼의 모습을 지켜 본 게 실수였다. 그가 아무리 빼어난 실력자라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싸움 아니던가. 척척 해치우는 그의 모습에 방심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리석다. 준비와 방심하지 않는 자세가 목숨을 구해주는 가장 큰 덕목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리 했다는 사실이.

“캬라라라라!!”

“닥쳐, 이 새끼야!!”

화 난 채로 단검을 벤타의 어깨 위로 찍었다.

목을 관통하려 했지만 벌떡 일어나는 통에 실패했다. 쇠가 갈리는 저항감과 함께 피부에서 불꽃이 튀었다. 단검 자체는 질이 낮은 물건이 아님에도 반복해서 시도 할 만 상황이 아니었다.

즉시, 등을 차며 단검을 뽑아 몸을 뒤로 뺐다.

바람과 함께 커틀러스가 앞머리를 베고 지나갔다. 풍압에 볼이 덜덜 거리며 떨렸다. 눈이 다 빠져나올 거 같았다.

가볍게 돌아 좌우로 연달아 검격을 날렸다.

같은 시간에 몸을 돌린 벤타의 방패에 박혔다. 불꽃이 표면에서 튀었다. 승기는 물살과 같은 것. 놓치면 둑에 닿아 돌아오는 법이다. 쿤이 호흡을 집어 삼키며 폭풍같이 공격을 시도했다.

분노와 이단에 대한 징벌로 상승한 능력은 어마어마하다. 평소의 거의 2.5배. 힘도, 속도도. 그것을 반응하는 신경도 그러했다. 치고 긋고, 상대 공격을 회피하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세는 쿤 자신이 생각해도 대단하다고 외칠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치명적인 공격을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목을 베고, 허벅지를 베고, 팔뚝을 베었다. 단검 날이 안 보일 정도로 깊이 들어간 것도 꽤 있었다. 다만, 이것조차 치명적이라는 분류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세이혼이 목을 관통했음에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처럼. 초월적이라 생각 될 정도로 벤타의 재생력은 무시무시했다. 아무리 베어내도 단번에 목숨을 끊지 못하면 곧바로 회복하여 덤벼들었다.

‘빌어먹을 종의 차이라니……!’

일전에 싸운 경비대장과 벤타를 비교하면 종합 능력은 전자가 더 높다.

하지만 체구와 종이 가지는 능력에서 차이가 존재했다. 단검으로 일격에 벤타를 죽이려면 머리를 자르거나 심장을 후벼 파는 수밖에 없다. 허나 이것은 상대도 아는 바. 방패와 커틀러스가 그 부분만은 집요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주욱. 흙바닥을 길게 미끄러지며 쿤이 호흡을 정리했다.

벤타가 입을 징그럽게 찢은 채 웃고 있었다. 아찔할 정도의 혐오감이 가슴 바닥에서 치고 올라왔다. 죽여 없애고 싶다. 마치 모포 속으로 들어온 벌레를 대하는 것처럼. 발로 밟아서 짓이기고 싶었다.

‘대가 없는 결과는 어디에도 없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세이혼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지금의 싸움을 책임져야 한다. 결과를 낸다. 바닥을 기어 온 용병의 삶 속에서도 깨우치지 않았던가. 남이 아니다. 그것을 가져오는 건 결국 자신의 각오와 결단.

머리가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들끓는 분노와 혐오감은 마치 배경처럼 멀어져갔다. 생각이 또렷해지고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신. 운명. 예지.

어떤 것을 붙여도 결국에는 빌어먹을 땅바닥에서 목숨 붙이고 살아남는 것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다른 것들은 모두 지웠다. 지금은 적과 자신. 단 둘의 세계만으로 좁혔다.

흘러나오는 바람, 모래의 향기, 옅은 수분기, 미묘한 마찰음.

정보가 들어오고 분류되고 결과를 도출했다.

위기 감지, 하푼식 감각수련법, 정리의 달인, 냉정한 사고, 집중 사고. 그 동안 배워두었던 특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피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판단은 내려졌다.

눈꺼풀이 닫혔다 뜨이고,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모래 먼지 사이로 몸이 던져졌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허벅지가 지면에서 올라오는 힘을 전달했다. 근육이 파열 될 것 같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고통은 인고의 시간이 대신 받아 주었다. 싸움이 끝나면 한 동안 바닥을 기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 수 있다면 충분하다.

호흡 속으로 먼지가 끼어들고 멀게 보이던 벤타의 얼굴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흉물스러운 생김새. 붉은 빛의 돌 위로 검은 잉크를 떨어뜨려 놓은 것 같다. 전형적인 동화 속 악마의 얼굴이다.

“캬라라라라!!!”

고함소리와 함께 커틀러스의 날이 무겁게 떨어졌다.

팔 리치에 커틀러스의 길이. 대각선 궤적으로 들어오는 공세는 회피 기동의 범위 역시 늘어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신체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이를 피해 틈을 노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설사 힘으로 우위를 취한다 해도, 순수 체적에서 나오는 충격양은 무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버텨라……!’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몸뚱이뿐이다.

커틀러스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파고들었다. 용수철처럼 근육이 응축되었다 몸을 튕겨냈다. 사선으로 떨어지던 커틀러스가 바로 머리위에 도착했다.

카카카카칵!!!

단검을 교차하여 이를 받아냈다.

정면이 아닌 사선으로. 마치 뒤로 타 넘기듯 힘을 흘린 것이다. 하지만 무게에 속도까지 더한 커틀러스의 공격은 무겁다. 지금까지는 흘리지 못해서 이렇게 공격을 안 한 게 아니다. 이내 단검이 부서지고 검이 어깨부터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버텨라!!!’

벤타의 다른 손이 방어를 위해 방패를 들어 올리고 있다.

이대로 힘을 결을 타 몸을 빼면 결국 같은 결과. 타이밍 상 절대로 치명적 공격을 넣을 수가 없다.

부서진 파편에 손이 찢기고 어깨에 닿은 커틀러스가 몸을 파고들었다.

이대로라면 몸이 두 동간 나는 것도 시간문제. 하지만 모험을 한 것이지 자살을 한 것은 아니다. 고통은 인고의 시간으로 능력치를 부여하였고, 강화 신체로 인해 증가된 몸의 내구성은 커틀러스의 진입을 저지했다.

치익. 간발의 차이로 커틀러스가 뒤 땅을 치고, 쿤은 벤타와 근접 할 수 있었다. 고개만 들고 발뒤꿈치를 세우면 입맞춤이라도 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그렇게 로멘틱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달려 든 것이 아니다.

부서진 단검은 버리고 허리춤에서 새것을 뽑아 턱 아래를 찔렀다.

푸욱. 참 듣기 좋은 소리.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머리를 적셨다. 인간이었다면 이 일격으로 머리가 관통당해 죽었겠지만 리자드맨의 두형과 벤타의 크기를 고려하면 필사는 아니다. 즉시 벤타의 멱살을 잡으며 몸을 띄웠다.

손으로 끈을 잡아 거꾸로 매달리는 자세.

탄력이 정점에 오르는 순간 발을 힘차게 뻗어 턱에 박힌 단검을 걷어찼다. 손잡이만 나와 대롱거리던 것이 아예 안 보이게 들어갔다.

“커르르르르……”

피거품을 남긴 채 쓰러지는 벤타.

회생 가능한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허나, 이미 한 번 실수 한 전례가 있지 않은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다시 뽑아 목을 썰었다.

서걱서걱.

승리의 행위가 도축이라 기분이 조금 그랬지만 확실한 것이 좋았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단계가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상승했습니다.]

[축복이 개방되었습니다.]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이단 수집가 칭호가 추가되었습니다.]

[맹약을 달성했습니다. 신성점수 2000을 획득했습니다.]

마무리로 들려오는 즐거운 멜로디.

쿤이 안심하며 풀썩 쓰러졌다.

#

쿤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감촉에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지쳐 보이는 인상의 리자드맨이었다. 각각의 얼굴을 전부 구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 장로가 맞을 것이다. 그는 손을 가슴 위에서 올린 채 희미한 빛을 계속 주입하고 있었다.

“으음……”

“아! 깨어나셨군요!”

헛기침에 장로가 손을 때며 물러나자 사타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조금 지나자 라라와 루루. 붕대로 몸을 감은 세이혼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일단 죽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고통을 참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은가? 걱정 많이 했네.”

“끄응.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해. 그쪽은? 얻어맞고 날아가는 것까지 봤는데.”

“할 말이 없군. 방심했어. 현역이었을 때는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인데……”

“그쪽이나 나나 조금은 풀어져 있었다는 말이군.”

쓴 웃음이 입가에 달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그것에 매달릴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 방심을 하지 않으면 된다. 이단이라는 존재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생명력을 지녔음을 알게 됐으니, 그 점을 주의할 것이다.

“그보다 여기는 어디지?”

쿤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앞서 싸웠던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들이나 숲의 전경이 아니었다. 엉성하기는 하지만 지금 누워 있는 곳은 천장이 존재하는 집이었다.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답이 들려온 것은 문가였다.

고개를 돌리니, 꽤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리자드맨이 한 명 서 있었다. 발음도 어색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누구……?”

“이오라고 합니다. 엘본의 대사제직을 맡고 있습니다.”

“대사제? 본단의 인물들은 학살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표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아라콤 무리의 속셈을 간파하여 한 발 앞서 도망 나올 수 있었죠. 부근에서 만일을 대비하여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동굴 근처에서 말인가?”

“숲에 터를 잡고 있었죠. 사실 사타를 비롯한 장로 분들이 도망쳐 나왔을 당시에는 크게 놀랐습니다. 추적 대를 단 채 은신처 인근까지 도망쳤으니까요.”

쿤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렇다면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럼, 동포가 추격을 당하는데도 그냥 두고 봤다는 건가?”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싸울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얼마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연락을 해서 구하려 했죠. 아마 당신들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싸움의 끝에 바닥에 누워있는 건 저희가 되었겠지요.”

“음. 그럼 오그마라는 놈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었던 건가?”

“하하. 공교롭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낚시를 하기 위해 던진 말이 사실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져 본 걸지도 모른다. 장로들의 구원을 온 것이 같은 리자드맨이라면 도망친 무리라 생각했을 확률이 높으니까. 나중에야 인간임을 보고 그냥 사냥 식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거겠지. 참 공교로운 일이다.

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곳에 너희의 은신처라는 것이군. 이렇게 들여보내도 되는 건가?”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동포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신이 처리한 그 자. 벤타는 단순히 무리를 이끈 대장이 아닙니다. 본단에 아라콤을 전파한 장본인이죠. 기둥이 사라졌으니, 본단에서 엘본의 기치를 다시 되찾는 것도 꿈만은 아니게 됐습니다.”

“즉, 당신들은 우리 부족의 은인이라는 거죠.”

사타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 했다.

본단에 아라콤을 전파한 존재. 벤타가 생각보다 거물이었던 모양이다. 목숨 걸고 싸운 사이였으니 조무래기였다면 조금 실망 할 뻔 했다. 쿤이 흐리게 웃었다.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어 볼 것?”

“그대가 받드신 분의 신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신명? 이름을 알려달라는 건가?”

“아라콤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범인으로는 불가능 한 일. 그대의 흔적에서 피어나는 신성한 기운은 예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디 그 이름을 알려 주셨으면 좋겠군요.”

진중한 태도로 물어오고 있다.

쿤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름을 알리는 것은 신이 바라는 일. 허리를 피고 경건한 자세로 답을 했다.

“서 준경. 내가 받드는 신의 이름이다.”

“오……서 준경. 신비한 울림이군요.”

“그래서, 물어 본 이유가 무엇이지?”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라는 알림을 뒤로 한 채 쿤이 다시 물었다.

단지 이름을 알아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함으로는 안 보였다. 조금 더 깊이 있는 의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싶었다.

이에, 이오가 가볍게 웃으며 답을 했다.

“본단을 찾고, 그 위치에 서 준경 신을 위한 제단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제단을? 너희의 신은 어쩌고?”

“신께서 남기신 말이 있습니다. 어둠이 도래하여 힘없는 자들은 날개를 잃고 떨어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재앙을 막아 줄 벽을 찾아라. 당시에는 이해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진의를 알 것도 같습니다.”

“서 준경 신께서 벽이 되어 줄 거다?”

“아니라면 우리의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단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제단 건설이 시작됩니다.]

그 순간 짤막한 글자가 쿤의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긍정과 부정. 두 가지의 선택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나는……”

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작가의 말

제단 파트 끝입니다.

뭔가 미묘하게 자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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