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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약 : 3일 안에 엘본을 도와 아라콤을 처치하라.
가치 : 2000
페널티 : 모든 능력치 2하락. 엘본과의 관계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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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맹약은 조금 독특한 스킬이다.
본래 정해둔 약속과 다른 방향으로 내용이 변하기 일쑤. 어찌 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이야기가 흐른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변하기 시작하는 맹약의 내용은 일종의 지침과도 같다. 신이 밝혀주는 길. 절대로 의미 없이 내용을 바꾸지는 않는다.
“나는 여전히 마뜩치 않네. 굳이 저들을 함께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나?”
엘본의 무리를 찾은 뒤, 쿤은 그들과 함께 동굴을 빠져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연이 아니라면 함께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세이혼은 달갑지 않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지켜야 할 짐이 많아지다 보면 행동에 제약이 오니까. 게다가 리자드맨을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남아 있었다.
“아직은 섣불리 말하기 힘들어. 하지만 신께서 이리 인도하셨다면 어떤 의도가 있음이 분명해. 당장 위험이 있는 건 아니니, 적어도 동굴을 나설 때 까지는 동행을 하도록 하지.”
“음. 자네가 그리 말 한다면 따르지. 하지만 저들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베겠네.”
“그건 말리지 않겠다.”
쿤이 선두에 서고 움-타와 세이혼이 리자드맨을 앞뒤로 포위하는 형태를 이루었다. 동행을 하지만 신뢰를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포위를 구축한 움-타는 본래 리자드맨 처리를 확인하기 위해 보내진 심부름꾼.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움-타는 혼란스럽다. 리자드맨은 전부 처리해야 한다.”
“아이 참. 이 리자드맨들은 착한 쪽이라고요.”
“리자드맨은 리자드맨이다.”
“바보 움-타. 인간도 다 같은 인간이 아니잖아요. 같은 종이라고 동일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움-타를 설득한 것은 의외로 루루였다.
움-타? 라며 고개를 기울이는 움-타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계속 다독였다. 설득당한 건지 그냥 꿰임에 넘어간 건지는 말하기 어려웠으나 당장은 조용해졌다.
“동굴 밖까지만 안내하면 알아서 도망 칠 수 있나?”
“일단은……하지만 장로께서 몸이 너무 쇠약해 지셨습니다. 본단까지 도망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곳까지 안내 할 여력은 우리에게도 없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를 믿어 주시고 이리 도움까지 주었으니 이 이상 바라는 것은 과욕이겠지요.”
리자드맨 무리를 대표해서 말을 진행하는 자는 스스로를 ‘사타’라고 불렀다. 본단의 대소사를 처리하던 행정가 같은 위치였다고 한다. 공용어에 익숙하고, 인간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맹약은 엘본을 도와 아라콤을 처리하는 것……그냥 동굴 밖으로 안내한다고 끝날 일 같지는 않군.’
안내로 끝이면 동굴 밖까지 호위하라고 떴을 것이다.
굳이 아라콤을 처리하라고 떴다는 것은 아직 상주하는 적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페널티가 강하기는 하지만 가치가 무려 2000이다. 쉬운 일로 이 정도의 가치가 매겨질 이유는 없었다.
일단은 동굴 밖으로.
그 뒤에 상황을 본 뒤 다음 행보를 정할 생각이었다.
“끝이 보이는군.”
그렇게 걷기를 한참.
어둑한 동굴 전면으로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통로를 타고 스쳐가는 바람도 조금 덜 눅눅했다. 출구가 다가오는 것이다.
쿤이 무리와의 거리를 속으로 셈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긴장감은 놓치지 않았다. 감각을 최대한으로 올린 뒤 앞을 살폈다.
“캬락!?”
“적!”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파충류를 닮은 얼굴. 전형적인 리자드맨이었다. 쿤이 곧바로 반응하며 튀어나갔다. 단검이 양손에 들려 있었다.
“자, 잠깐만요!! 적이 아닙니다!!”
다급히 들려오는 목소리.
사타의 것이었다.
쿤이 급제동을 걸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당황하는 리자드맨의 얼굴이 먼저 들어오고, 무기조차 들지 않은 몸 상태가 두 번째로 확인되었다. 갑자기 난입한 것은 맞지만 적의를 가지고 다가서는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캬라락! 사타!!”
“오오, 오그마!!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풀썩 주저앉은 리자드맨을 향해서 사타가 뛰어갔다.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 보였다. 쿤이 다시 일행의 앞으로 다가와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아는 사이인가?”
“본단을 탈출 할 때 같이 했던 형제입니다. 일행과 갈라지며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캬라라……아닙니다. 그날 저희는 무사히 도망 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과 만날 수 있었죠.”
“다른 형제?”
“캬락! 이든 숲 안쪽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리 가까운 곳에 다른 동포가 있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말인즉슨 도망을 쳤더니 다른 동포가 있어, 그곳에 의탁을 했다는 말이다.
쿤이 슬쩍 세이혼을 돌아봤다. 마침 그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눈빛이 오고갔다.
“오오. 그들에게 안내 해 줄 수 있겠나?”
“캬라라. 당연한 말씀. 장로께서 이쪽으로 도망쳤다는 걸 알고 미리부터 살피고 있었습니다. 아라콤 무리가 있어 접근을 못하고 있었는데……어찌 된 건지 모두 물러가더군요. 즉시 안내하기 위해서 뛰쳐나왔습니다.”
“고마운 말이야. 고마운 말……”
사타는 감읍한 듯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도망친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동포와 만나 지금껏 기회를 엿보았던 것이 감동적인 모양이다. 라라와 루루도 훈훈한 장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쿤. 그리고 세이혼은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무 공교로워.’
지켜봤다고 하니, 적이 물러남과 동시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딱 맞아 떨어진다. 죽은 줄 알았던 이가 살아있는데, 우연히 근처에 동포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적극적으로 구조에 나서 준다? 숨어 지내는 이들이 남 일에 과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줄까. 몇 번 곱씹어 생각을 해 봐도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역시……미끼라는 건가?’
만약 아라콤의 무리가 주술사 등의 죽음을 알아챘다면, 이에 대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의 상황을 고려하면 아마 장로를 구하러 온 엘본의 무리라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앞서 헤어진 형제의 등장은 긴장을 늦추는 역할을 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마을을 이룬 동포가 근처에 있다고 하면 은신처에서 꿰어내기에 딱 알맞을 터. 우연에 우연을 더해 정말로 숨어있는 동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확률이 높다.
쿤이 한 걸음 물러나 세이혼의 옆으로 갔다.
“세이혼.”
“아아. 수작이라 보는 것이 옳겠지. 리자드맨이 이렇게 머리를 굴릴 수 있다고는 생각 해 본 적이 없는데.”
“어찌 하는 게 좋을까?”
“지금이라도 버리고 가는 걸 추천한다. 우리는 동굴만 통과하면 그만이다. 굳이 끼어 들 일이 아니지 않은가?”
쿤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이제 곧 동굴은 끝나고 밖이 나온다. 그대로 엘본의 무리를 떼어 버리고 갈 길을 가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 자체에서 신의 의지를 느끼고 있다. 이를 그냥 묵살하고 지나가기에는 그 동안 봐 온 신의 업적이 너무 대단했다.
“신께서 원하고 있다. 저들을 도와 아라콤을 상대하라 하는군. 나도 지나쳤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신께서? 정말인가?”
“신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말 하지 않는다.”
세이혼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군.”
“이용한다?”
“저자가 상대의 미끼라면 문 척 하며, 반격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지. 다만,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 엘본의 무리를 먼저 내보이고, 후미에 숨어 기습을 가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죽어도 상관없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까지는 없으니까.”
비정하지만 맞는 말이다.
이제 막 만난 리자드맨을 목숨 걸고 지켜 줄 의리는 어디에도 없다. 설사 그들이 기구한 처지에 놓였다고 해도. 쿤도 동일하게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맹약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확률이 있다.
조금 더 안전한 방법.
미끼에 물린 척 할 수 있는 게 필요했다.
‘흠……’
쿤이 사타와 얼싸안은 오그마에게 다가갔다.
그는 살짝 움찔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긴장으로 근육이 수축되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적어도 명배우의 자질은 없었다.
“오그마라고?”
“캬라라……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장로님을 구해주신 겁니까?”
“구했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쥐새끼 하나가 모래를 뿌리려고 하는군.”
“캬락!? 쥐, 쥐새끼라뇨?”
눈동자가 데굴데굴.
[하급 위압]이 발동한 모양이다. 리자드맨이라는 덩치에 가려져 있었는데, 이리 보니 확실히 겁 많은 인상이다. 이런 놈을 미끼로 쓰다니. 머리는 굴릴 줄 알지만, 그 이상은 못 보는 거 같다.
“발뺌하려는 건가? 이렇게 공교로운 시점에 탈출한 동포가 등장하는데?”
“무, 무슨 소리입니까? 설마 오그마를 의심하는 건가요?”
“빠져 있어. 도망칠 때 잡힐 것 같던 놈이 무사했는데, 그 놈이 우연히 근처에 살고 있던 동포와 또 우연히 만나서, 기가 막히게 이런 시점에 도움을 준다? 목 위에 있는 게 장식이 아니라면 생각을 해라.”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어이, 이대로 목이 잘려 벽에 걸리기 싫으면 사실대로 말해라.”
쿤의 단검이 오그마의 목에 닿았다.
두꺼운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대로 쑤시면 죽는다. 긴장으로 눈동자가 굳었다.
“캬, 캬라라.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어떤 말로 꼬신 거지? 아무리 그래도 같은 엘본이었잖아.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캬라라……”
“잘 생각해. 두 눈으로 보면 알겠듯이 나는 인간이야. 동포라는 감정에 흔들릴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위험하다면 이곳에서 제거하고 가는 것을 선택하겠어.”
무거운 쿤의 눈빛이 오그마를 파고들었다.
[하급 위압]에 [고백]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다. 격렬하게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푹 꺾였다.
“캬라라……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아! 오그마 어떻게 그럴 수가!!”
혹시나 해서 지켜보던 사타가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어졌던 형제가 배신을 했다고 하니, 그 충격이 큰 거겠지. 하지만 살다보면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쿤이 가볍게 묵살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어쩔 수 없었다라. 그런 말로 배신한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캬라락! 그, 그런……”
“하지만 말대로 잘 따라 준다면 어느 정도는 참작이 되겠지.”
“캬라라?”
쿤이 얼빠진 오그마의 뺨을 툭툭 친 뒤 일어나 사타의 뒤쪽으로 서 있는 장로에게 다가갔다. 피로에 찌든 얼굴. 척 봐도 능력을 사용하기 힘들어 보였다.
“좀 도와줘야겠는데.”
하지만 어차피 남의 사정이다.
쓰고 죽을 게 아니라면 사용 할 건 모두 다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장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작가의 말
앞서 맹약에 날짜 표기가 안 되어 있던 부분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