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자드맨 주술사의 품에서 나온 것은 손바닥 정도 크기의 석판이었다.
청동색으로 표면이 칠해져 있고 굉장히 매끄러웠다. 문자로 보이는 것들이 새겨져 있었으나 알아 볼 도리는 없었다. 상대가 했던 말을 고려해 보면 일종의 경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되었다.
“말을 하는 리자드맨에 주술사라니. 생소한 것들뿐이군.”
“오래된 고문에는 리자드맨도 자신들의 문화를 구축했다고 적혀 있어요.”
쿤이 툴툴 거리자 루루가 냉큼 말을 받았다.
앞서도 말 하던 내용이다. 첨언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던 모양이다. 쿤이 고개만 살짝 돌린 뒤 턱짓을 했다.
더 해보라는 의미. 루루가 화색을 띈 채 말을 이었다.
“탐험왕 그릴스 베어님의 자서전에 따르면, 리자드맨은 부락 수준을 넘어서 왕국과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고 해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눠져 있었고, 자신들의 신을 위해 기도하는 신관도 있었다고 하죠. 노래, 춤, 그림. 다양한 문화가 꽃피워졌다고 해요.”
“왜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지?”
“……그게 언제부턴가 왕국이 무너지고 리자드맨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인식이 그리 바뀌었다고 해요. 혹자는 그들의 응집력을 무서워 한 인간들이 고의로 흔적을 지워 단순한 몬스터의 일종으로 격하시킨 것이라고도 주장했어요.”
“음. 평소 같으면 코웃음으로 넘겼겠지만, 지금은……”
눈앞에서 뚜렷하게 말 하는 리자드맨을 목도했다.
게다가 주술사. 세이혼은 간혹 등장하는 변종 몬스터처럼 설명했지만 단순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쿤에게 세이혼이 다가왔다.
“지금 세세한 것까지 따질 시간은 없네. 이 정도 잡았으면 남은 놈들은 얼마 없을 터. 일단 빠르게 통과하도록 하지.”
“……그편이 낫겠군. 쓸 만 한 것들만 챙기고 움직이자.”
리자드맨이 사용하는 장비들은 딱히 양질의 것이 없었다.
게다가 중량도 무거워 지고 갈 만 한 성질도 아니었다. 단단해 보이는 사각 방패 하나만 세이혼이 챙겨 움-타에게 건네고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여섯에 셋. 도합 아홉을 한 번에 처리했다. 정찰삼아 왔을 때 셋을 처치했으니 벌서 열 둘. 동굴 안에 남은 리자드맨이 있다고 해 봐야 처리한 숫자 이상일 확률은 적었다. 속도를 조금 더 올리고자 했다.
컴컴한 동굴 내부로 발자국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첨벙 첨벙. 안으로 갈수록 흐르는 물이 더욱 많아졌다. 속도를 올리고자 했으나, 가면 갈수록 걸음은 느려져만 갔다. 쿤과 세이혼은 감각법으로 방향을 쉬이 잡았지만 란 등은 그렇지 못했다. 더듬더듬 이동하는 것도 힘든데 물까지 차오르니 걷기가 더 힘들었다. 동굴 벽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체력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란은 둘째 치고라도 라라 등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은신의 의미가 사라졌다. 쿤이 결국 걸음을 세우고 말했다.
“이대로 계속 가는 건 무리겠군. 일단 저쪽에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지.”
“아, 아! 괜찮아요. 계속 걸을 수 있는데……”
“됐어. 무리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가는 게 낫겠지.”
“쿤의 말이 맞다. 내가 정찰을 갔다 올 테니, 잠시 쉬고 있어라.”
세이혼이 담백하게 말을 한 뒤 앞쪽으로 사라져갔다.
분명 무릎 아래까지 올 정도로 수위가 높아져 있는데도 그가 움직이는 동작에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신기한 경지. 쿤이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움-타 이걸 좀 찢어 주겠어요?”
“움-타 이런 거 잘 한다.”
돌아보니, 라라가 앞서 찾았던 약초를 꺼내 잘게 찢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피로회복의 효과가 있다고 했었지. 쿤이 옆으로 자리를 잡아 몇 장을 건네받아 비슷한 형태로 찢었다. 얼마 안 가 작은 사발을 꽉 채울 정도의 양이 나왔다.
“루루야, 물 좀.”
잘게 찢은 약초 위로 물을 부은 뒤 쓰지 않은 단검의 손잡이로 잘게 으깼다. 살짝 시큼한 냄새가 퍼져갔다. 딱히 좋은 건 아니었지만, 맡고 있으면 몸에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됐다. 란, 너도 조금 마셔.”
“으……꼭 마셔야 해요?”
“어머, 설마 쓴 걸 못 먹니?”
“그냥 조금……”
항상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란의 다른 일면이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그제야 제 나이 때의 소녀 같다. 라라가 부드럽게 웃은 뒤 등짐을 뒤져 수가 꽃을 꺼냈다. 뿌리 쪽에 단맛 나는 성분이 있어 약을 제조 할 때 종종 사용하는 물건이다.
잘게 찢어 만들어 둔 약초 즙에 섞어 주었다.
달콤한 냄새가 풍기자 그제야 란이 슬쩍 한 입 넘겼다.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는 않은지 먹으라, 넘겨 준 양을 다 처리했다.
“쿤 오빠도 좀 마셔요.”
“사양 안 하마.”
중급 생명력의 힘으로 딱히 지친 감은 없지만 굳이 거부해서 무안 줄 필요는 없다. 눈짓으로 고마움을 전한 뒤 한 입 넘겼다. 조금 쓰고 시큼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쩝쩝 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자, 란이 먹다 남은 수가 꽃을 건넸다. 그도 쓴 맛에 못 먹는다 여긴 모양이다.
가볍게 웃으며 쿤이 수가 꽃을 받아 씹었다.
기분만큼 달콤했다.
#
시간이 조금 흐르고, 세이혼이 다시 돌아왔을 때 일행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약초의 효과가 좋은 건지 라라 등도 어느 정도는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왔는데도 보이지 않는군. 움-타 동굴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지?”
“거의 다 왔다. 이제 조금 더 가면 끝이다. 그러면 움-타는 돌아가서 보고한다.”
“끝이라고? 설마 리자드맨은 그게 다였나?”
듣기로는 스물 내외였다. 다른 곳으로 간 걸까? 사실이라면 김빠지는 일이다.
하지만 상대 할 적이 적다면 나쁠 건 없다. 이대로 빠르게 빠져나가 다음 부족으로 향하면 그만이다.
윙……!
그때, 묘한 울림과 함께 쿤의 배낭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황급히 배낭을 내린 뒤 끈을 풀었다. 앞서 얻어 둔 리자드맨의 경전이 하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뭐지?”
“나도 모르겠어. 근처에 다른 주술사가 있다는 건가?”
“음……느껴지는 기척은 없거늘.”
세이혼이 눈매를 좁힌 채 주변을 훑었다.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벽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과,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전부.
“……아! 저기. 저기에서도 같은 빛이 나온다.”
그렇게 잠시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 쿤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손짓을 했다.
경전에서 나오는 빛과 동일한 것이 벽 부근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어디요?”
“저, 벽 말이야. 안 보여?”
“안 보이는데……루루야, 너는 보여? 란은?”
루루와 란까지 고개를 흔들었다.
셋 모두 안 보인다는 의미. 어둡기 때문일까? 쿤이 의심쩍은 얼굴을 한 채 세이혼을 봤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역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나만 보인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자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공물을 바치고 나서 획득한 특기 중 하나. 바로 발굴이었다. 보물을 발견 할 확률이 증가한다. 생각해보면 앞서 경전을 찾을 때도 흰 빛을 쫓아서 획득했다. 이 빛이 보물을 드러내 보이는 신의 힘이라면 지금의 현상도 같은 것이다.
쿤이 망설임 없이 벽으로 다가갔다.
빛은 벽 너머. 틈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손으로 두드려 보고 팔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를 살폈다.
“뭐 하는 거지? 이곳에 뭐가 있나?”
“앞서 상대했던 주술사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이 물건에서 나오는 빛과 동일한 것이 이 벽 너머에서 나오고 있어.”
“빛?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신께서 허락한 능력 중 하나다. 반대편으로 갈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를 살펴 봐.”
신이라는 말에 세이혼도 눈빛을 달리 한 채 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천연 암벽으로 울퉁불퉁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일일이 손으로 두드려 보며 틈이 있는지를 살폈다.
“어? 쿤 오빠. 여기……”
그렇게 살피던 중, 루루가 구석에 있는 작은 홈을 발견했다.
뭔가 엇나간 듯 균열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생긴 균열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묘하게 그 부분만 티 나게 파인 것이 의심스러웠다.
“이건……”
쿤이 다가와 균열을 살폈다.
확실히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마치 단절 된 단면에 다른 것을 덧씌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음?”
그때, 곁에서 살피던 세이혼이 표정을 바꿨다.
무언가를 눈치 챈 얼굴. 손짓으로 일행을 뒤로 물리더니 갑자기 검을 옆구리에 댄 채 자세를 잡았다.
상대는 벽.
설마 통째로 베어 낼 기술이라도 있는 걸까? 쿤이 긴장 반 기대 반의 눈빛으로 다음 동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일행 앞으로 놓여 있던 벽이 사라지고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캬랴라……그, 그만 하세요. 더 이상 충격을 받으면 장로께서 버티지 못할 거예요.”
“리자드맨!!”
그리고 그 공간에 있는 것은 리자드맨.
쿤이 황급히 검을 앞으로 내밀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캬라라!! 살려주세요!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캬락! 캬락!”
그런데 나오는 반응이 묘하다.
호전적이라 알려진 리자드맨과는 다르게 빈 공간 안에 모여 있는 리자드맨들은 겁에 질린 표정과 목소리로 일행에게 호소를 했다. 기만술인가, 라는 생각이 일순간 스쳐갔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의 표정과 목소리를 연기로 할 수 있다면 이미 앞서서 시도했을 것이다.
“너희는 뭐지? 어째서 이런 곳에 숨어 있는 것이냐?”
“저, 저희는 엘본의 사제들입니다. 아라콤 무리를 피해서 이곳에 숨어 있었어요.”
가장 처음 일행과 말을 나누었던 리자드맨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봤던 리자드맨들 중 가장 깔끔한 발음이었다. 버릇처럼 뱉는 ‘캬라락’이라는 숨소리도 제어 할 줄 알았다.
“엘본? 아라콤? 알아듣게 설명해라.”
“그, 그러니까 저희는 엘본 님의 사제입니다. 신관이요. 자연적 조화를 숭배하며 숲에 동화되어 살기를 원하는 이들이죠.”
“리자드맨이?”
“아아……인간들에게 알려진 저희의 모습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는 다른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일부, 흉포한 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저희같이 평화와 사랑을 존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리자드맨이 평화와 사랑을 논하고 있다.
파충류를 닮은 외관에 녹색 눈동자.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위협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평화와 사랑이라기보다는 파괴와 혼돈 이라면 잘 어울릴 거 같다.
하지만 외관이 전부가 아님은 쿤도 잘 알고 있다.
일단 검을 내린 채 다시 천천히 물었다.
“그래, 그 엘본? 리자드맨이 신을 섬기는 것도 신기하지만……뭐, 그렇다고 치자. 그런 자들이 이곳에는 왜 숨어 있었지? 그리고 그 아라콤은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이냐?”
“아라콤은 엘본 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사욕을 채우려는 무리에요. 그들은 본단에서 순수하게 신앙에 매진하는 형제들을 학살하고,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전부 처형했어요. 저희는 그 와중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죠. 하지만 아라콤은 포기하지 않고 이곳까지 쫓아왔어요. 장로님의 환상으로 겨우겨우 추적을 뿌리쳤지만……보다시피 얼마 안 가 걸릴 판이었죠.”
“그럼 우리가 처리한 자들이?”
“네. 장로님이 환상 너머로 모두 보여주었어요. 그들이 바로 아라콤이에요.”
그렇다면 리자드맨이 갑자기 터를 옮겼다는 이유가 해명이 된다.
도망친 무리를 쫓아 동굴까지 왔고, 흔적을 따라 아예 눌러 앉은 것이다. 아마 환상마법을 알고 있었겠지. 버티기로 들어간 것. 그 와중에 사둠타 부족의 의뢰를 받은 일행이 난입하게 된 형국이다.
‘이것을 원한 것입니까?’
안 어울리게 웬 발굴인가 싶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리자드맨들과 만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맹약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이지.
※작가의 말
으~ 드디어 시작이네요.
떨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