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신체와 발굴이라.”
쿤이 빗물이 맺혀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공물을 바치고 난 뒤 획득한 두 가지 특기다. 둘 다 하급이라는 접두사를 붙이고 있지 않았다. 조금 독특한 영역의 능력.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특기를 내주었다는 것이 우연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준비 다 됐네. 언제 추격대가 올지 모르니, 서두르게나.”
세이혼이 란 등과 함께 다가왔다.
추격대를 일차적으로 저지했다지만 언제 또 달라붙을지 모른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 한 뒤 쿤이 걸음을 떼었다.
호수를 가운데에 둔 채 북동쪽으로 진행했다.
들어갈수록 숲은 빽빽해졌다. 수풀이 허리를 넘어서고, 까칠하기가 톱날과 같았다. 여분의 옷으로 몸을 칭칭 동여맸음에도 틈으로 들어오는 잎에는 살갗이 베이기가 일쑤였다.
쿤이나 세이혼은 문제없었지만 란과 라라, 루루 자매가 걱정이었다.
아무리 억척을 부린다 해도 쉽지 않은 길. 고운 피부가 찢어져 핏방울이 옷 위로 스며 나올 때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이곳이네.”
“부탁하지.”
그렇게 고행길이 끝나고 세이혼이 일러두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묘하게 트인 공터. 바닥에 생소한 글자를 새기고는 일정한 법칙에 맞춰서 주변을 두드렸다.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도 냈다.
아아. 우우. 새소리와 섞여서 숲 사이로 퍼져나갔다.
“끄, 끝난 건가요?”
“이대로 기다리면 된다.”
라라와 루루가 꼭 붙어서는 손을 잡고 있다.
날이 저물어가는 숲의 정경은 두렵다. 사이사이로 스쳐가는 바람 소리는 괴물의 호흡과 같다. 바닥에 그린 그림 위로 달빛이 쪼개져서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악마가 튀어나와 뒷목을 물어갈 것 같았다.
바스락.
“히익!!”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둘이 신음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벌벌 떠는 꼴이 오줌이라도 지리지 않았으면 다행 일 거 같다. 쿤이 시선을 떼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덮은 일단의 무리가 일행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둠타 부족이여. 동쪽의 이방인이 머물기를 청합니다.”
“……길 떠난 방랑자가 어째서 또 돌아왔는가?”
“사정이 있습니다. 단지 지나치려는 것이니 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행인지, 선두에 선 남자는 세이혼과 안면이 있는 것 같았다.
몇 걸음을 물러나 일행과 작은 소리로 대화를 했다. 발달된 청력으로 띄엄띄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지금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강화신체와 발굴이라. 이들과의 일에 연관이 있는 걸까?’
머리는 계속 굴러갔다.
육체를 강화하는 특기는 툭하면 기절하는 처지가 불쌍해 내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굴이라. 도망치기 바쁜 이 시점에 무언가를 발굴하는 건 이상하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안배가 돼 있지 않다면.
“그대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쉴 곳과 먹을 것도 제공해 주겠다.”
“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회의가 끝난 건지 예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줄 거라면 조건 없이 주는 게 좋을 텐데. 마지막에 붙은 조건이 불안하다. 돌아보는 세이혼을 향해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들어봐야 하니까.
“사사라 동굴에 리자드맨 무리가 살고 있다. 그들을 처리해 준다면 길을 터주지.”
“……리자드맨? 아직도 리자드맨이 살아 있단 말입니까?”
“본래 나인 강 후류에 서식하고 있던 무리다. 어찌된 일인지 얼마 전부터 상류로 올라와서는 사사라 동굴에 터를 잡았다. 사냥나간 형제를 공격하고, 가축을 훔쳐간다. 그 무리를 쫓아내 준다면 원하는 걸 제공해 주지.”
세이혼이 의견을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쿤이 즉시 머리를 저었다. 일행은 나인강을 타고 부족 간의 경계를 타고 빠져나가는 게 목적이다. 엄한 곳에서 리자드맨과 상대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쪽이 공화국 인물들에게 쫓기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다. 마을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곤란할 텐데?”
하지만 뒷말을 들은 상황에서는 마냥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세이혼이 난감한 얼굴을 한 채, 다시 한 번 청했다.
“꼭 이리 해야 하겠습니까? 필요하다면 배를 타는 비용을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대들이 리자드맨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안이 그대들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힘으로 상대를 해야 할까.
견적을 재고 있던 쿤이 뒷말에 이채를 띄었다.
“사사라 동굴은 앙크투 부족까지 이어져 있다. 그대들이 나인 강을 통해서 경계를 지나치려는 것이라면 동굴을 통과하는 것이 배는 빠르다.”
“아니, 그런 길이 있었습니까?”
“부족에만 전해지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이 시기의 나인 강은 물살이 세다. 여자와 아이까지 낀 채 지날 만큼 녹록하지 않다.”
쿤이 눈매를 좁히며 상대를 바라봤다.
허풍인가 싶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물살이 센 시기라니. 알고 있었나 싶어 세이혼을 보니 그의 얼굴도 딱히 좋지 못하다. 아마 몰랐던 모양.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러니 사사라 동굴의 리자드맨을 처리하고 그 길로 빠져나가라.”
“어째서 직접 처리하지 않는 거죠?”
보다 못한 쿤이 직접 나섰다.
“이방인. 우리는 강인하고 용맹하지만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동굴에 박힌 리자드맨을 잡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걸 비워야 한다. 하지만 용맹하기가 금빛 독수리보다 나은 세이혼이라면 그들을 모두 처리 해 줄 수 있겠지.”
“몇 마리나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정찰대가 확인한 것은 스무 마리정도였다. 셋씩 나뉘어 통로를 돌아다녔지. 어떤가? 그대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텐데.”
남자의 시선은 세이혼에게 닿아 있었다.
잠시 지냈다고 간략하게 말 했는데,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보다는 긴밀한 사이 같다. 적어도 무력 부분에 있어서는 지나온 마을 보다 많은 것이 알려져 있었다.
‘리자드맨이라……’
사둠타 부족을 둔 채 다른 곳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아예 방향을 바꾸려면 숲을 벗어나 평지로 나서야 하는데, 그건 추격대를 생각하면 무모한 짓. 반대의 경우도 비슷하다. 도구 없이 강을 타거나 걸어서 숲속을 관통해야 하는데, 둘 다 무모하기로는 마찬가지다.
결국 지금 상황에서는 상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억지로 공격해서 배를 탈취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지만 란 등을 달고 있는 상황에서 그건 상당히 무리가 있다. 동굴 속의 리자드맨과 다른 방법들. 머리에서 저울질을 하다, 판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다만, 일에 앞서서 그쪽에게 한 가지 묻고 싶군요.”
“묻거라, 이방인이여.”
“우리를 쫓는 공화국 사람들이 마을로 오면 어찌 대응 할 생각입니까?”
“우리는 자치령이다. 거부하면 그들은 들어 올 수 없다.”
“그래도 들어온다고 하면?”
“……음. 뱃길을 알려주지. 노잡이 없이. 익숙하지 않은 놈들이 탄다면 물길에 쓸려 갈 거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
***
맹약 : 3일 안에 사사라 동굴의 리자드맨을 처치해라.
가치 : 1000
페널티 : 체력이 영구적으로 3하락한다.
***
쿤이 남자의 조건을 맹약으로 설정한 뒤, 일행은 안내를 받아 부족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숲길을 요리조리 돌고나서야 부족의 터가 나왔다. 나무를 엮어 만든 움막과, 흙을 파서 만든 토굴이 위, 아래로 연결되어 부족을 이루고 있었다. 꽤나 독특한 구조. 중간 중간 구름다리 형태로 가교가 연결되어 건물을 잇고 있었다.
“잠시 이곳에서 쉬고 있어라. 결과를 전하고, 그대들을 안내 할 사람을 데리고 오지.”
그 말을 남기고 남자는 떠나갔다.
일행은 경비 둘을 방 밖에 둔 채, 덩그러니 놓여졌다. 바닥은 짚과 털을 엮어 가죽으로 마감 질을 한 쿠션으로 둥글게 둘러져 있었다. 엉덩이를 대고 들썩여 보니 그럭저럭 편했다. 쿤이 짐을 내려놓고 몸을 뉘이자 그제야 라라 등도 자세를 편하게 했다.
“후아. 무서워서 한 마디도 못했네.”
“언니도 그랬어? 다들 얼굴에 뭘 그렇게 바른 건지……무서워서 혼났네.”
사둠타 부족민들은 얼굴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세이혼의 설명대로라면 용맹을 상징하고 질병과 악을 몸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하지만 모른 채 보기에는 흉악하기 그지없는 외관이었다.
“아빠, 리자드맨. 위험하지 않아요?”
그때, 란이 몸을 뉘인 세이혼 쪽으로 쪼르륵 가서는 물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걷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가 괜찮다고 만류하지만 이런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말 하는 통에 떼어내지를 못했다. 아직 철이 덜 든 라라들 보다는 란이 더 어른스러웠다.
그대로 어깨를 내어 준 채 세이혼이 답했다.
“상대하기 꽤 까다로운 놈들이지만……머리가 안 좋아서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아.”
“아……다행이다. 그럼 아빠가, 슉슉 하고 해치울 수 있는 거죠?”
“우리 란이 눈 감고 백만 세면 다 끝나있을 거야.”
아빠와 딸.
훈훈한 대화에 루루와 라라는 손을 마주잡은 채 관객모드가 됐다. 쿤도 짐을 늘어놓으며 둘의 대화에 미소를 띠었다. 가슴 한 구석이 따듯한 기분. 아비는 몸담았던 조직에서 내쳐져 쫓기는 처지에, 딸은 흑열병을 앓으며 힘겨운 하루를 보내는 상태. 하지만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건 바로 저 모습 때문일까 싶다.
‘나도 가능할까?’
쿤이 문득 생각했다.
가정. 여자야 돈 몇 푼에 몸 파는 것들로 여럿 끼고 놀아보기도 했으나 안착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가능하다고 생각 해 본 적도 없다. 그냥 방랑하며 살다가 객지에서 칼 맞아 뒈지는 게 운명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서 준경이라는 이름의 신을 만나고 삶이 바뀌었다.
경비대의 대장급 인사도 일대 일로 이겨보고, 제국의 황녀들을 시녀처럼 부리기도 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을 버젓이 하고 있는데, 가정을 꾸리지 못할 것도 없다.
작은 집 하나에 단정한 얼굴의 아내.
그 안에서 해맑게 웃는 딸……
‘딸. 그래, 딸이 좋지. 시커먼 사내놈 보다야.’
상상해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쿤 자신을 닮으며 조금 눈매가 사나우려나? 아내 될 여자가 있으면 얼굴 좀 봐야겠다. 하나씩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꽤나 길게 이어졌다.
“……쿤 오빠!”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세이혼 삼촌이 부르잖아요.”
쿤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너무 깊이 빠졌던 모양이다. 란을 안은 채 세이혼이 바라보고 있었다. 란은 안마를 하다가 지쳐서 잠든 모양이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동굴에서 어찌 할 건지 상의를 좀 했으면 하네.”
“음. 리자드맨을 상대 하는 법 말인가? 부족민이 원하는 데로 싸우거나 그냥 돌파하자는 법이 있겠지.”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는 게 좋겠지. 하지만 리자드맨의 호전성을 생각하면 그건 쉽지 않을 거네. 차라리 상대하기 쉽게 방법을 구상하는 것이 낫겠지.”
“호전성이라. 상대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어떻지?”
용병 질을 하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다 상대해 본 쿤이지만 리자드맨은 이야기로만 들어봤다. 제국 쪽에서는 거의 동화와 같고, 공화국이나 인근 왕국 쪽에서 간혹 출몰이 목격된다고 한다. 상대하게 된다면 미리 능력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일반적인 병사라면 장비를 잘 갖추고 하나 정도를 상대 할 수 있네. 힘은 세지만 동작이 꽤 굼뜨니 숙련된 자라면 두셋 정도도 가능하겠지.”
“흠. 피부가 강하다고 아는데.”
“강하기야 하지만 날만 잘 갈아 두었다면 베고 들어가는 건 문제 없네. 다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존재하지.”
“불이라도 뿜나?”
“재미없는 농담이군. 이족보행을 하지만 리자드맨은 꼬리가 있네. 균형을 잡거나 상대를 잡아 넘어뜨리는 용도로 종종 사용하지. 간과하고 있다가는 당하기 십상이네.”
“꼬리라……”
문헌에서 본 리자드맨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지역마다 묘사가 다 다르지만 확실히 꼬리는 전부 붙어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나 철제 둔기를 들고, 다른 손에는 방패를 쥐었다. 그리고 불시에 들어오는 꼬리 공격. 생각을 해 보니 확실히 모르고 있으면 당할 확률이 높았다.
“주의를 하지.”
“뭐, 자네 싸움 실력을 보니 한 무리 정도는 너끈할 거 같으니 걱정은 크게 하지 않네. 그리고 어찌 보면 강을 타고 가는 것보다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겠어. 뱃길은 굴락의 팔도 알고 있겠지만, 동굴은 모를 테니 말이야.”
“싸움이 무난하게 풀린다면 문제는 앞서 말 한 것처럼 추격대가 왔을 때, 적절하게 둘러대 주는냐인데. 어때? 공화국 쪽에 넘어가 행선지를 알릴 거 같나?”
부족 입구에서는 간단히 넘어갔지만, 타인의 속내를 확신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적어도 세이혼은 지내온 경험이 있으니, 의견을 묻고자 한 것이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단단한 어투로 답을 했다.
“대대로 공화국과 야만인. 그러니까 소수 부족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어. 자치령을 받은 지금도 마찬가지지. 꼬리를 달고 들어가 당장 묻는 게 아니라면 우리 쪽을 도와 줄 거라 생각하네.”
“뱃길로 말이군.”
“그리만 된다면 상대의 추적을 혼란시킬 수 있겠지. 냄새도 씻어냈고, 뱃길이라 한다면 흔적을 찾지 못함에도 의심 할 여지는 매우 적으니까.”
“이상적으로 흘러간다면 말이지.”
쿤이 짧게 답을 하고는 바닥에 몸을 완전히 뉘였다.
푹신푹신한 것이 눈을 감으면 이대로 잠이 올 것 같았다. 전투 피로는 이단 심판관의 능력으로 전부 풀렸지만 심적으로 쌓인 피로는 그렇지 못하다. 마음 놓고 푹 쉬고 싶은 게 본심이었다.
“들어가겠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님은 그 자신이 잘 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작가의 말
많은 의견들이 있었군요. ㅎㅎ
당첨 특기는 강화신체와 발굴입니다! 맞추신 분들에게는 소정의 상품으로 제가 꿈이 나타나는 것을...쿨럭!
* 그나저나 공모전이 오늘로 종료 되는군요. 싱숭생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