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류 판정을 받은 사람들의 정보는 게이트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전부 오백 여 명. 세 자리가 되지 않는 개척자 숫자에 비교하면 꽤 많다. 나와 서연이는 절반씩 나눠서 연락을 돌렸다. 추가 테스트. 대부분은 불만을 표했고, 그 중 몇은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럭저럭 일 할 가량의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개척자 테스트의 경우에는 게이트를 사용하지 않으면 애초에 불가능. 확답 받은 사람의 숫자를 소향에게 알리고, 미리 게이트의 사용 가능 시간을 전달받았다. 와서 테스트 해 줄 사람들에게 날짜별 이용 시간을 공지하고, 불가피한 사정을 조율했다.
꼬박 하루가 걸린 과정이다.
세주를 통해서 절반의 개척자가 검은 돌에 반응함을 알아냈지만, 하나의 케이스로 확정지을 수는 없다. 위기를 기회로. 프랜차이즈 문구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할 수 있을 때 확인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수고하셨어요. 별 거 아니지만, 기념품으로 가지고 가세요.”
“에잉. 괜히 기대했네요.”
“하하. 어쩔 수 없죠.”
그런 노력이 벌써 3일째다.
스케줄 조정한 사람들이 하나씩 와서 테스트를 받고 있다. 서율이가 게이트를 사용 할 때면 보였던 흰 옷의 연구자들도 보였다. 귀찮음 가득한 얼굴. 정부 쪽 인물임에도 이리 나와서 도와준다는 건 소향이 힘을 쓴 덕분일 것이다.
“쯧쯧. 되지도 않는 짓 하고 있군.”
“한 명 손 털고 나갔다잖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거겠지.”
“마담이 포함된 회사라면 너도나도 노릴 텐데 말이야. 차라리 큰 회사로 의탁하는 게 나을 텐데. 괜한 고집 부리고 있군.”
연구원들만 있는 게 아니다.
타 회사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 있다. 우리가 보류 판정 받은 사람들을 다시 테스트한다고 하니까 몰려온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의견이다. 자기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옮겼음에도 말이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네요. 아직 다 끝나려면 멀었습니까? 이거 의미 없는 짓 같은데 적당히 하고 말죠?”
“아직 몇 사람 남았어요. 조금만 더 협조해 주세요.”
“어휴. 이 시간에 뭐하는지 모르겠군요.”
이렇듯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테스트는 계속 진행되었다.
확답을 하고 와 준 사람들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강제성이 있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끝나고 나면 남은 인원은 또 부르기 힘들다. 남규도 동식이도 표정이 어둡다. 아무래도 소득이 없이 끝나는 분위기였으니까.
“아빠!”
“아, 왔구나.”
그렇게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미소가 찾아왔다.
게이트 측면으로 격리 된 대기실. 세주도 연락망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부른 것이다. 그녀를 개척자로 만들 생각은 별로 없지만 따로 빼는 것도 이상했다.
“이야기 듣고 오기는 했는데……분위기가 별로 안 좋네요.”
“앞쪽에서는 전부 꽝이었거든. 역시 효과가 없나 싶어서 다들 안색이 어둡네.”
“어떻게 해요……”
이야기는 미소 등에게 해 두었다.
속여서 할 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차피 세주에게 연락이 닿으면 모두가 알게 될 일. 일찌감치 이야기하고 소향의 도움을 받아 셋을 같이 불렀다. 분위기가 무거우니 함께 오면 좀 나을까 싶었던 것이다.
“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급하게 불러서 미안하다.”
“아, 아뇨. 아저씨 일인데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죠.”
상황이 어렵다 생각했는지 세주도 평소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괜히 걱정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 몰래 검은 돌의 힘을 실험한 주제에 이럴 때만 마음 쓰는 척 하는 거 같다. 이래서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걸까.
“앞에 세 사람 정도 남았으니까, 한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거야.”
“……마지막까지 아무도 반응 없으면 어떻게 돼요?”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렴. 정 회사 유지가 어려우면 큰 쪽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아빠가 모가지라도 당할까봐 걱정했니?”
“그러면 정리해고 같은 거 안해요? 회사 인수 할 때 보면 그런다고들 하던데.”
“오, 우리 미소가 공부 좀 했네?”
“아이 참. 놀리지 말고요. 그래요, 안 그래요?”
적당히 웃음으로 때우고 미소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미소가 불만인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럼 셋 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렴. 올라가서 마지막 사람 왔다고 전할 테니까.”
그렇게 셋을 두고 자리를 털었다.
대기실은 가건물에 창문 하나와 문하나 덜렁 달린 형태였다. 문으로 나가서 빙 돌아 창문에 기대어 서니, 안쪽에 있는 셋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주변을 대충 살핀 뒤 검은 돌을 꺼내어 정신을 집중했다.
예의 하얀 빛이 실처럼 새어나와 세주의 머리위에서 엉켰다. 확실히 반응이 있다.
“그런 건가……”
미소 등이 도착하기 전날부터 이미 개척자들을 검은 돌로 실험해 왔었다. 다 같이 보류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니 흰 빛의 반응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결과는 내 예상과 달랐다. 장내에 모였던 서른이 넘는 사람 중에 빛에 반응했던 건 오직 단 둘 뿐이었다.
어째서……라는 생각으로 차분히 살펴 본 결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 같은 보류라 해도 잔여 에너지의 양이 다른 것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세주의 경우는 칠 할 가량의 차 있는 독. 다른 이들은 오 할 가량이 차 있는 독이었다. 검은 돌에 비축된 양이 삼 할 가량이니 세주 이상의 에너지를 지닌 사람만 반응한 것이다.
이것으로 한 가지는 확신 할 수 있었다.
개척자가 되는 수준의 에너지를 1이라 치면, 그 1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는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응을 위한 역치라고도 볼 수 있다. 아니면 세상이 가지는 저항력? 어느 쪽이든 확실히 하나를 알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이래서는 곤란하다.
본래는 표본이 삼십을 넘을 것이라 예상. 그 중 관리를 해서 개척자가 된 뒤에도 우리와 계약을 할 만 한 사람을 추리려고 했다. 사람이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지만 그래도 그편이 최선의 선택. 하지만 지금과 같이 가능한 사람의 숫자가 적으면 마땅한 선택을 하기가 곤란하다.
특히, 반응이 있던 두 사람이 마음에 내키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사람을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정적인 결과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초대하고 기회를 주었으니 우리 회사와 계약을 하자! 이렇게 말 하면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라며 도망갈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남는 건 세주.
지금 다시 한 번 확인을 했으니 그녀야 말로 최선의 선택이다. 회사 사정도 알고 미소의 친구이기도 하니 나 몰라라 도망가지는 않을 터.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게 옳은가? 이 물음에는 솔직히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남은 되고 왜 그녀는 안 되냐! 라고 따진다면 마땅히 할 말이 없지만.
“……”
좋고 아니고를 떠나서 내가 그 상황을 강제하는 것이 꺼려진다.
나이 차고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세주는 어디까지나 지금을 즐기고 있는 20대. 장래가 무궁한 아이의 앞길을 내 마음대로 정해버리는 것이 꺼림칙한 것이다.
실리를 택하자면 세주. 하지만 그것은 가슴이 내켜하지 않는 일.
이래저래 고민으로 생각이 길어졌다.
“아, 한 사람 또 나갔다. 이제 곧 세주차례인데 아빠는 언제 오려나.”
“곧 오시겠지. 으, 한 번 한 일인데도 괜히 떨리네.”
“에이. 부담가지지 마. 안 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알아 나도. 그래도 이왕이면 뭔가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그렇지.”
“우리 세주가 철들었네?”
“원래 너보다 성숙했거든?”
창틈으로 미소 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수하게 돕기 위해 온 애들을 두고 혼자서 이렇게 셈 하는 게 창피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볼까……
어차피 지금 당장 결정할 일은 아니다. 소향이 말 한 정부 방침이 하루 이틀 만에 벌어질 것은 아니고, 직면한다고 해서 회사가 당장 망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한 사람의 미래가 달린 일.
쉽게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아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대기 중이던 사람은 모두 나가고 미소와 세주, 소유만 남아 있었다.
“가자. 미리 준비하고 빨리 끝내는 게 낫겠지.”
같은 생각이었는지 셋 모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앞선 대기자까지 반응 없이 물러나고 마지막으로 세주가 게이트로 향했다.
남규와 동식이가 보조하러 이동하고, 나는 미소들과 함께 거리를 두고 섰다. 세주는 한 번 해본 일임에도 떨림이 가시지 않는 듯 표정에 긴장이 역력했다.
“아빠, 만약 세주가 개척자가 되면 아빠네 회사랑 계약하는 건가요?”
“그야 세주 마음이지.”
“치사하게 다른 곳으로 가고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가면?”
“멱살 잡고 끌고 올게요.”
“우리 딸……과격해졌구나.”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그래도 위안이 된다.
적어도 아빠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준다는 말 아니겠는가. 딸 키우는 재미라는 게 이런데 있는가 보다. 머리끝을 매만져 주니, 좋다고 웃는다.
“준경 씨. 잠시 시간 될까요?”
그렇게 준비가 될 때 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소향. 다른 회사와 접촉하는 일 때문에 바쁜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다. 미소와 소유에게 양해를 구하고 뒤로 빠져나왔다.
“못 오는 줄 알았는데. 갔던 일은 잘 됐나요?”
“일단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어요.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온 겁니다. 이번에 윤주를 빼내간 회사……어디인지 알아냈어요.”
“……분위기를 보니 대단한 곳인가 보군요. 어딘가요?”
“라이오스. 최근에 각종 콘텐츠 사업에서 부상하는 기업 이름이죠.”
들어 본 기억이 있다.
자본이 탄탄해서 경쟁자들을 물리치며 덩치를 키운다고 했지. 개척자 사업에 뛰어들어 공격적으로 확장을 하는 것일까?
“단순히 확장 타깃이 된 건가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상대의 출자기업을 생각하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요.”
“출자기업?”
“L철강이 자본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요.”
L철강이라는 말에 한 사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남혁. 며칠 전에 같이 촬영까지 했던 그 남자. 우연일까? 아니. 이런 일에 우연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헌데, 조금 이상하다.
나야 그에 대한 사연이 있으니 미심쩍게 생각한다고 해도 소향은 어째서 그 점을 문제 삼는 것일까. 대기업이 출자회사가 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닐 텐데.
“촬영 날부터 눈빛이 수상하다 싶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나오네요.”
“……네?”
“개인사니 따로 언급을 드리지 않았지만, 차남혁 씨는 줄곧 서율이를 스카웃하고 싶어 했어요. 정중하게 거절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리네요.”
서율이를 스카웃 하고 싶어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 동안 나를 보던 차남혁의 시선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그 때문에 뒷 공작을 펼친 걸까? 차준혁이 얽힌 나와의 악연은 전혀 상관없고?
“그럼 서율이 하나 때문에 회사를 흔들고 있다는 말인가요?”
“불가능하지만은 않죠. 그쪽 방침에 차남혁의 입김이 안 닿을 리 없으니, 시기상의 공교로움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음. 응……?”
우웅……!
그렇게 새로운 소식으로 머리를 헝클이고 있던 찰나.
품 안이 갑자기 떨려왔다. 익숙한 느낌. 바로 검은 돌의 반응이다. 세주가 게이트와 반응하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일단은 품 안을 손으로 누르며 떨림을 진정시키려 했다.
“……!”
하지만 떨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덜컥 거리며 뛰어 나가려고 용을 썼다. 눈앞에 소향이 빤히 서 있는 상황. 이상함을 보일 수는 없으니, 몸만 살짝 돌리며 손으로 꾹 쥐었다.
“준경 시?”
“아, 잠시 전화가 와서요.”
둘러대며 속으로 외쳤다.
그만 떨어라. 지금까지는 반응이 없던 주제에 왜 갑자기 그러느냐. 그러자 무언가 불쑥 솟구치는 느낌과 함께 가슴팍에서 흰 빛이 튀어나와 저편으로 날아갔다.
왓 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흰 빛. 황급히 검은 돌을 손으로 누르며 제어를 해 보려고 했다. 몇 번이고 다뤄서 이제는 익숙한 느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미 떠나버린 시위. 내 제어력보다 더욱 강한 인력이 빛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세주와 엉겨 붙던 감각과 흡사한. 하지만 그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한 힘이었다.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전자기파 기준선 초과! 개척자입니다!”
“남규, 제대로 잡아! 넘어지잖아!”
“아, 아! 죄, 죄송해요!”
그리고 이내 소음이 게이트 인근에서 터져 나왔다.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개척자 반응, 떠오른 알람 소리, 날아간 흰빛. 세주의 부족분량을 채웠다면 그 의미는 분명하다.
입술을 깨물고는 일단은 그쪽으로 뛰었다.
게이트가 방면.
다급한 얼굴의 연구원들이 먼저 보이고, 개척자가 위치하는 장소에 축 늘어진 세주가 눈에 들어왔다. 남규와 동식이가 한쪽 팔씩을 잡은 채 부축하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빠! 세주가 개척자래요! 개척자 반응이 나왔대요!”
“……”
씹고 있는 입술에 힘이 더 들어갔다.
알싸한 느낌이 난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소향과 미소도 뒤를 따라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개척자 반응이 나왔다고요?”
“네, 네. 방금 전에 접촉이 완료되었고, 현재 바이탈은 모두 양호합니다.”
“확실히 개척자의 반응이 맞습니까?”
“확실합니다. 기준치 이상. 접촉, 반응. 모든 게 개척자의 반응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연구원들이 흥분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답을 했다.
기판에 표시된 수치들은 확실히 개척자의 기준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몇 번이고 봤던 부분이니 확실하다.
소향이 옆에서 반색을 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준경 씨 말이 옳았군요. 설마하니 정말로 보류 판정을 받은 사람 중에 개척자가 있었을 줄이야……”
“아, 아. 그렇군요.”
미적지근한 반응밖에 보여주지를 못했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다. 아니, 이런 선택을 하더라도 그건 내 주관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사고와 같은 형식은 사양하고 싶었다.
“준경 씨. 세주 양이 게이트 접속을 끝내고 나오면 사무실로 좀 안내해 주겠어요? 저는 미리 가서 서류를 준비해 둘게요.”
“오늘 바로 말입니까?”
“주변을 보세요. 이미 승냥이가 한 가득이에요.”
구경 왔던 타사 인원들이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연락을 하고 있다.
아마 접속이 끝나면 저마다의 이름을 외치며 달라붙겠지. 개척자. 그것도 유례가 없는 경우로 개척자가 된 인물이다.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상황은 난감하지만 일단 이해는 했다.
고개를 끄덕이니, 소향이 주변에 몇 마디를 남기고 떠나갔다.
“미소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봐. 아빠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까.”
“음? 빨리 와요~”
대충 둘러대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세주가 개척자가 된 것. 이미 머릿속으로는 확정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점검해 보고 싶었다.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품속에 넣어 둔 검은 돌을 꺼냈다.
“……젠장.”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색이 죽어 있는 거 같다.
손으로 꼭 쥐고 정신을 집중해 봤다. 하얗게 빛나며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힘의 공백. 뚜렷하게 느껴졌다.
잘근. 다시 한 번 입술을 씹었다.
어찌 된 건지는 짚이는 부분이 있다. 아주 단순한 이유. 내가 몇 번이고 흰 빛을 세주에게 엮었던 것 때문에 게이트와 접촉하면서 힘의 인력이 작용한 것이다. 일종의 환시나 환청 같은. 엮인 흔적이 있으니 게이트가 온전한 하나의 개척자라 판단하고 작동. 그 반응으로 떨어져 있던 검은 돌의 힘이 그쪽으로 딸려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 인력이 내 제어를 벗어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흰 빛은 나와 게이트를 잇는 매개체. 그리고 돌에 담긴 힘은 쿤을 통해 얻은 정수의 것이다. 소유권으로 치자면 내 독점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게 제어를 잃고 날아가 세주에게 들어가다니.
내가 빛의 제어권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것보다, 부족한 개척자를 채우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걸까?
“……”
화가 난다.
최대한 신중하고자 한 일이 이렇게 돼 버렸으니까. 이게 뭔가. 힘 잔뜩 주고 링에 올라가서 3초 만에 카운터 맞고 쓰러진 꼴이다. 잘 했다고 박수조차 받기 어렵다.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해도, 명백히 내 실수다.
나는 선택조차 묻지 않은 채 세주를 개척자로 만들어 버린 꼴이 됐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도 아닌. 미소의 친구를 말이다.
“꼴사납네, 정말.”
말 그 대로.
머리를 긁는 손이 상당히 거칠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주가 접속을 끊고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첫 접촉은 보통 30분 내외로 진행된다. 연구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는 그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보류판정을 받은 사람들 중 처음으로 개척자가 된 사람. 그 이름만으로도 큰 충격이라 할 수 있었다.
“아저씨. 미소야.”
“수고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날 파리들이 달라붙었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우위선 입장이 있다.
친구 아버지. 보호자가 따라 오지 않은 상황에서는 일단 내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을 뿌리치고는 그녀를 대리고 대기실로 향했다. 우리가 설치해 둔 곳이라 접근 금지를 시킬 수 있었다.
세주는 멍 한 얼굴이었다.
이제 막 개척자가 된 대다가 방금 첫 접촉을 하고 왔으니 상태가 멀쩡할 리 없다. 미리 준비했던 녹차를 타 주고는 앞에 앉았다. 좌우로 남규와 동식이 위치했다.
“좀 정신이 드니?”
“네……어우. 아직도 뭐가 뭔지. 팍 하고 불이 꺼진 거 같더니 이상한 곳에서 눈을 떴어요. 손과 발이 막 두둥실 떠다니고. 아바타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라서 평소 모습대로 만드니까 그제야 제대로 설 수 있더라고요.”
“제대로 됐구나. 축하한다. 넌 최초로 보류자 중 개척자가 됐어.”
“아……그러니까, 정말로?”
멍 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미소가 팍 하고 안겨서는 축하한다고 말을 했다. 소유도 뒤에서 어깨를 토닥였다. 개척자가 됐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로또보다도 나은 일이다. 아무런 추가 행위 없이도 게이트 접촉만으로 수십억 단위의 연봉을 챙길 수 있으니까.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그렇다.
“세주 양. 갑작스레 이런 말 하는 게 경우가 없음은 알지만 그래도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요. 개척자가 정부와의 계약을 위해 중간에 민간 기업과의 계약을 맺는 건 알고 있죠?”
“아, 하늘사랑. 맞다, 맞다! 아저씨 그럼 이제 회사에서 안 잘려도 되겠네요?”
세주는 남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다 나를 보고는 힘껏 외쳤다.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그걸 가장 깊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난 엉성하게 처리하다 힘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괜히 입맛이 썼다. 딸 친구를 이용하는 기분이라서.
“세주가 우리와 계약을 해준다면.”
“헤헤. 해야죠. 얻어먹은 소고기가 있는데!”
“그렇게 급히 정해도 되겠어? 필요하면 부모님을 모셔 와도 괜찮아.”
“에이, 저도 성인인데 이런 일은 스스로 해야죠. 그리고 미소도 있는데, 아저씨가 저한테 사기를 치겠어요?”
“미소 무서워서라도 그건 못하지.”
“거봐요.”
그리 말하며 희게 웃었다.
참 스스럼없는 아이다. 첫 만남에서도 그러더니 스무 살이 넘었다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그러면 이러고 있지 말고 사무실로 가죠.”
남규가 분위기를 정리했다.
속사정을 아는 나와는 달리, 남규는 지금 애가 탈 것이다. 계약을 빨리 안하면 대형 회사에서 달라붙을 게 뻔하다. 그러니 저리 보채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 가는 일이다. 눈짓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머리위로 익숙한 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얀 빛. 천천히 엉겨 붙더니 특정한 형태를 갖춰갔다.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나 싶어 눈치를 살폈지만 다들 정리하기 바쁘다. 보는 건 오직 나 뿐.
[Lv1. 한 세주]
이런 요상한 창을 말이다.
※작가의 말
마지막 한줄을 위해 이렇게나 길게 썼던가...
본래 두편으로 나누었던 걸 길어지는 듯해서 압축했습니다.
이번 사도편의 두 가지 핵심이 모두 나왔네요.
* 공모전이 끝나가는군요. 뭔가 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