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63화 (63/240)

일전에 검은 돌을 배터리로 비유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딱 맞는 비유 같다. 경비대장과의 싸움에서 획득한 정수는 검은 돌과 반응하는 순간, 그 안으로 흡수되었다. 겉으로 표시되는 부분은 없었지만 나는 예의 하얀 빛이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충전. 딱 그런 개념이다.

그렇다면 굴락이 게이트 힘의 원천인가? 잠시 고민을 했으나, 정화된 정수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니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굴락이든 뭐든 신이라 생각하는 존재의 에너지가 정화되어 게이트와 나를 연결하는 것이다. 사람이 밥을 먹고,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같다. 정제 과정의 차이만이 있을 뿐 결국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심플해진다.

게이트를 세우고 나와 쿤을 연결한 어떤 존재는 굴락과 같은 존재와 대척점에 위치한 것이다. 정화라는 표현으로 봤을 때, 그들의 존재가 오염되었다는 것을 유추 할 수 있다. 이를 깨끗이 씻어 힘으로 되돌리면 예의 하얀 빛이 되는 것. 아직까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의 정립은 시킬 수 있었다.

“이단을 사냥하여, 힘을 모으라는 건가.”

검은 돌을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쓰임새만 조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뭔가 활로가 트일 것 같은데. 이런 면에서는 불친절한 시스템이 아쉽기만 하다. 온라인 게임 같으면 운영자라도 부를 텐데, 현실에서 그럴 수 없지 않나.

아니, 그 전에 플레이어가 하나라는 사실에서 이미 망한 게임이려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킬킬 거리며 핸들을 돌렸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

며칠간 검은 돌을 연구해 보았지만 별 다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열을 가해보기도 하고, 전기를 흘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반응조차 없다. 정수나 하얀 빛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결국 그쪽에만 반응이 있다는 얘기다. 당장 게이트로 들고 가 연구를 할 수는 없으니 생각나는 건 미소의 친구인 세주였다. 그녀는 절반의 개척자. 안정화되지 못한 에너지가 검은 돌과 반응을 했었다.

“문제는 어떻게 부르느냐 인데……”

딸의 친구라고는 하지만 스무 살이 넘은 성년이다.

요즘 세상에 함부로 불러냈다가는 원조교제 소리 듣기 딱 좋다. 내가 외모 상으로 좀 젊어졌다고는 하지만 나이가 변한 건 아니다. 생각 없이 대하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다.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게 껴 있으면 구색이라도 찾겠는데 그것도 마땅치 않다.

역시 음식 대접을 한다고 부르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것도 조금 뜬금없기는 하다. 몇 번이나 봤다고 집으로 초대를 하는지……

우웅~!

그때, 품 안이 길게 떨려왔다.

혹시 또 검은 돌인가 했지만 반응이 약했다. 핸드폰. 이제는 뭐만 울리면 다 검은 돌로 생각이 가는 거 같다. 며칠간 좀 무리를 한 거 같다.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름을 확인했다. 미소의 이름이 하트 앞으로 예쁘게 떠 있었다.

“우리, 딸. 강의는 끝났어?”

“방금 끝났어요. 근데, 아빠. 그거 진짜에요?”

“응? 뭐가?”

평소보다 숨이 살짝 거친 느낌.

소리도 통통 울리고 있다. 어딘가 통로를 달려가는 모양이다.

“이번에 S-Net에서 방송하는 거요. 거기에 진짜 아빠도 나와요?”

“S-Net?"

뭔가 싶어 고개를 기울이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전 촬영. 게이트의 안정성을 홍보하기 위해서 프로그램 하나를 짰는데, 그 방송사가 S-net이었다. 사전 촬영 분이 인터넷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나야 그냥 서율이 보조하는 사람으로 나오는 거니까.”

“와~! 그게 그냥 그렇게 넘길 문제가 아니죠! 아빠 지금 방송국 게시판 안 가봤죠?”

“내가 그런 데를 갈 거 같니?”

“으으. 기다리고 있어요. 거의 다 와 가니까요.”

그리고는 통화가 뚝 끊겼다.

조금은 어리둥절하다. 게시판이라. 악플이라도 달린 걸까? 하긴 서율이가 미모 때문에 팬이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그 옆에 달라붙어서 촬영을 했으니 오죽 꼴 보기 싫었을까. 심한 욕만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잠시 서성이고 있자, 문이 벌컥 열리고 미소가 들어왔다.

뛰어 왔는지 호흡이 거칠다. 그런데 미소 혼자만 온 게 아니었다. 뒤쪽에 세주와 소유도 보인다. 안 그래도 불러올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잘 된 일. 헉헉 거리는 미소 등에게 물 한 잔씩을 떠 주고는 기다렸다.

“후아……! 운동을 하든가 해야지. 죽겠네.”

“그러니까 천천히 걸어가자고 했잖아.”

“그럴 수야 없지! 이렇게 다급한 일에 어찌 걸음을 서두르지 않을 수 있소이까!?”

“말투 어색해. 그보다 언제까지 현관에서 투닥거릴꺼야. 아저씨가 이상하게 보겠다.”

아웅다웅거리는 둘을 소유가 정리했다.

보고 있자면 나름대로 균형이 잘 잡힌 파티 같다. 세주가 활발하고 거침없이 움직이면 미소가 이를 지원하고, 소유가 침착하게 정리를 한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탱커와 딜러. 그리고 커멘더형 힐러라고 할까?

“아빠 뭐해요?”

아, 생각이 길었나보다.

주방으로 가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와 소파에 앉았다. 그 사이 셋은 노트북을 꺼내 와서는 무언가를 바쁘게 찾고 있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게시판 얘기를 했으니 그걸 보여주려나 보다. 욕설 등은 필터링해서 나오겠지?

“여기로 들어가면……나왔다! 아빠, 빨리 봐 봐요!”

미소가 노트북을 돌리며 화면을 가리켰다.

방송국 홈페이지에 있는 게시판 같다. 글들이 몇 분 단위로 빼곡하게 올라와 있었다. 본래 방송국 게시판이라는 곳이 이렇게 글 리젠이 빠른가?

“동안마왕. 그의 비결을 알고 싶다. 게이트는 노화 방지용? 이게 다 뭐냐?”

“다 아빠 관련한 내용이라니까요. 사전 촬영 컷이 공개된 이후부터 이래요.”

“아니, 저 사진을 보고 나인지는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유명인도 아니고 사진하나 덜렁 올라가 있는 상태로 어찌 찾았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미소의 반응은 어이없음 그 자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노트북을 두드려 다른 페이지로 들어가 주었다. SNS. 내가 담 쌓고 지내는 네트워크의 한 부분이었다.

“서율이?”

화면에 떠 있는 건 서율이었다.

[사전 촬영이 끝나고~!]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었다. 나를 비롯해서 사무실 식구들이 전부 보였다. 이것만으로 보자면 대수롭지 않겠지만 아래쪽에 [삼촌보다 늙어 보이면 안 되는데! 이것이 마흔이 넘은 사람의 피부라니!]라는 익살스러운 글까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이걸 보고 찾았구먼.”

“요즘 네티즌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프로그램 계획이 공지 된 이후부터 관심이 장난 아니에요. 이렇게 특정지울 수 있는 글까지 올려났으니 못 찾는 게 바보죠.”

“요즘 애들은 별별 거에 다 관심이구나. 나이 많은 아저씨 찾아서 뭐하게.”

“아이 참. 아빠가 요즘 트렌드를 모르네. 동안! 웰빙! 중년! 제 2의 인생! 요즘 이런 게 먹힌다니까요? 게시판 분위기만 봐도 알잖아요. 서율 언니나 차남혁보다 아빠 이야기가 더 많아요.”

뭔가 박력 있게 이야기하는데 딱히 와 닿는 건 없다.

설혹 내가 인기를 끈다고 해서 그게 뭐 딱히 도움이 될 거 같지도 않고. 게이트에 쿤 관련 일들로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쁜데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그렇게 뛰어 온 거야?”

“……사람 김빠지게. 반응이 그게 다에요?”

“하하. 그럼 아빠가 이 나이에 신난다고 춤이라도 출까봐? 사람들이 잠시 혹한 거뿐이야. 조금 지나면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할걸?”

“피. 누가 모른데요? 그냥 신기해서 그렇죠.”

맥없는 반응에 토라진 모양이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너무 현실적으로만 말 한 걸까? 그냥 맞장구 쳐 줄 걸 그랬다. 어색함에 뒷머리만 긁적였다.

“야야~아저씨가 잘 말했지 뭐. 괜히 이런데서 오르락내리락 해 봐야 좋을 거 없다고. 관심종자들만 모여서 쓸데없는 글이나 적지. 연예인 할 거 아니면 이런 관심을 피하는 게 좋아.”

“와, 세주가 웬일이래? 잘생긴 아이돌만 나오면 침 흘리는 게?”

“누가 침 흘렸다고 그래!”

“AYP?"

“우리들의 영원한 오빠……야!”

무슨 소리하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투닥거린 둘 덕에 미소가 작게 웃고 있다.

일부러 그런 모양이다. 미소가 친구는 참 좋은 아이들로 사귄 거 같다. 괜히 내가 다 뿌듯하다.

“에잇! 그럼 괜히 신경 썼네. 발에 땀나게 뛰어 왔는데.”

“그럼 아빠가 이참에 연기에 도전해 볼까?”

“악! 됐어요. 연기는 아무나 하나. 그냥 뭐……지금 정도면 됐지.”

비죽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워서 빙그레 웃어 주었다.

아마 아빠가 인터넷 스타 비슷하게 되니까 뿌듯했던 모양이다. 연예인 친구 하나 있으면 거들먹거리고 그러지 않나? 비슷한 마음이었을 터. 그런데, 내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니까 괜히 서러웠던 것이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이런 면으로 보면 아직 애다.

“그럼 힘차게 달려온 딸을 위해서 아빠가 실력 좀 발휘해 볼까?”

“와~! 아저씨 요리해 주시게요?”

“아, 저희는 그냥 나가서 사먹으려고 했는데……”

세주는 스스럼이 없어 반응하며 벌써부터 군침 도는 얼굴을 하는데, 소유는 신세지는 게 적잖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둘 다 이해되는 반응이지만 오늘은 세주의 것이 필요하다. 기껏 왔는데 나가 버리면 곤란하니까.

꾸욱.

스파게티? 피자? 오믈렛? 아니면 전날 사 둔 닭으로 닭볶음탕?

그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소매를 누군가 당겼다. 옆을 보니 미소가 비죽거리는 얼굴로 잡고 있다.

“……나도 도울게요.”

이래서 딸을 키우나 보다.

올라간 광대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

그럴듯하게 한 상 차렸다.

종목은 닭볶음탕.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같이 사용해서 진한 맛을 내 봤다. 송송 썰어 둔 파와 감자. 먹어달라고 아우성치는 닭들이 붉은 국물과 어울려서 군침의 홍수를 불러왔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제대로 된 거 같다.

생각해보면 여유 있을 때 요리를 올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중급 단계가 해방됐는데도 쿤의 상황을 돕기 위해서 계속 포인트를 아끼거나 전투 쪽에만 사용해 왔다. 먹는 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그 기반을 닦아 두는 게 나쁠 이유는 없다. 물론, 여유가 있을 때의 이야기.

“와아! 대박! 이거 다 아저씨가 한 거예요?”

“우리 따님께서 한 손 거들었지.”

“미소는 접시만 깬 거 같은데요?”

“왜 이래? 나도 감자 썰었다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아저씨, 미소 신부수업 하려면 꽤나 힘드시겠어요.”

농담을 두런두런 걸치며 한 상에 둘러앉았다.

세주는 코를 쫑긋쫑긋 하는 것이 당장이라도 먹고 싶은 눈치. 반면 소유는 여전히 신세지는 게 부담스러운 듯 나를 보며 연신 죄송하다는 눈빛을 뿌리고 있다. 참 다른 성격인데, 잘도 친구가 됐다 싶다.

“자자. 음식 앞에서 망설이는 건 실례라고. 사양하지 말고 들어.”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아빠는 닭다리~”

먹는 방법도 가지각색.

모아놓고 보면 티비 속 예능보다 재미있는 거 같다. 물론, 그 중 가장 예쁜 건 우리 미소다.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꼭 다람쥐 같다.

“먹고들 있어 봐.”

전화 온 시늉을 하며 자리를 떴다.

귀여운 여아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본분을 잊어서야 곤란하다. 주방에서 돌아나가 화장실로 들어가기 전. 벽을 등에 진 뒤 품 안에서 검은 돌을 꺼냈다. 일전에 한 번 반응을 했기 때문일까 지금은 잠잠했다.

하지만……

손에 쥐고 세주의 모습을 슬쩍 훔쳐보자 미약한 고동이 느껴졌다.

짝을 찾아 떠나는 기러기처럼 이끌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조금 있자 세주의 머리 위로 하얀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전과 같은 모습이다. 천천히 이끌려 손에 쥔 검은 돌 근처에서 어른거렸다.

혹시 정수처럼 흡수될까 싶어서 휘휘 저어 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마, 정수나 흰 빛의 파편처럼 속해있지 않은 상태에서만 흡수가 가능 한 것 같다. 부족한 양이라지만 지금의 빛은 세주의 것. 내가 억지로 뜯어 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혹시 반대로는 안 될까?

문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은 돌의 힘은 엄밀하게 말해서 내 소유의 것이 아니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양도가 가능 할 것도 같다.

꾸욱.

돌을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속에 찬 가스를 뱉어내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느낌을 퍼 올렸다. 하푼식 감각수련의 도움인지 흰빛의 여력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웅……

그리고 얼마 안지나 검은 돌에서 흰 빛이 새어 올라오는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는 너울거리는 세주의 빛과 엉겨 붙더니 자기 멋대로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유롭게 풀려난 상황에서는 자기가 알아서 빈 곳을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아니지.

다시 힘을 주어 제어권을 찾아왔다.

오기 싫다는 듯 부들부들 거리며 반항을 해 봤지만, 세주의 빛 자체가 주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나온 상황. 그다지 힘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내, 떨어져서는 검은 돌로 다시 흡수가 되었다.

“……예상대로네.”

흰 빛은 개척자. 혹은 검은 돌을 통해서 이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빛은 게이트를 통한 이동의 에너지원이 되며, 쿤 세계 속의 신을 구성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아주아주 중요한 에너지원과 이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나를 더욱 들뜨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검은 돌의 빛을 옮길 수 있다는 말.

그것은……

“아저씨~고기 다 식어요!!”

세주.

반 푼이 개척자를 온전한 상태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작가의 말

정수 -> 검은 돌 -> 세주?

본격 명의 양도 소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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