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이 깨어난 것은 꼬박 반나절이 흐른 후였다.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한 탓이다. 하지만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많이 치료되어 있었다. 움직이는 것에도 딱히 무리가 없었다. 세이혼은 이것이 신의 은총……이라면서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쿤은 깨어난 뒤 남은 일행을 모두 불러 모았다.
지난 밤 주고받은 이야기를 모두에게 전하고, 서로의 처지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가 제국에서 쫓기는 처지였다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용병 하나와 전직 특수부대원. 그리고 그 딸과 황녀 둘. 조합이 참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계획을 짠다. 굴락의 팔을 한시적으로 떨쳐냈다고 하지만 언제 따라붙을지 몰라.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공국의 수도로 진입. 너희 둘의 이모와 접선하는 것이 우선의 목표다.”
그랬어요, 저랬어요. 과거 이야기는 1절이면 됐다.
쿤은 서로의 사정으로 감복하는 일행을 집중시키고 당면한 문제를 제시했다. 산중에서 평생 처박혀 살 것이 아니라면 나아갈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시간은 일행의 편이 아니다. 굴락의 팔 뿐만이 아니라, 방울 군도에서 떨어뜨린 융 무리도 언젠가는 꼬리에 붙을 것이다. 계획이 필요했다.
“저, 저기요. 그 전에 서로 호칭부터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진지한 회의를 진행하려는 찰나, 루루가 손을 들고 의견을 피력했다.
찬물을 부은 격이지만 그녀 말에도 일리는 있다. 나이순으로 하려 했으나, 신을 모시는 신도의 입장으로 보자면 그건 좀 아니다. 그렇다고 황녀로 대접해서 존칭을 늘어놓는 것도 이래저래 불편한 일이다.
쿤이 생각하게 빠르게 정리했다.
“밖으로 보이는 시선도 고려해야 하니, 너희 둘은 지금처럼 존칭을 쓰면 된다. 세이혼에게는 삼촌으로, 내게는 오빠라 해라. 란은 둘에게 언니로, 내게 삼촌으로 하면 되겠지. 문제는 나와 세이혼의 호칭인데……”
“은인이자 사도이지 않습니까? 제가 당연히 말을 올리겠습니다.”
“외부에서 볼 때는 어색합니다. 차라리 서로가 말을 낮추는 것으로 하죠. 이름을 부르고 존대를 하지 않으면 딱히 이상하지도 않으니까.”
“으음.”
“그렇게 해라. 앞일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니까.”
“알겠습……알았다.”
이걸로 됐다.
세이혼은 신의 은총으로 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쿤은 공국의 수도로 가는 것에 그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서로의 목적은 서로가 가진 채, 한 무리로 엮였다. 적어도 이 틀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믿고 의지하며 힘을 빌려야 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동료라니. 어색하군.’
얼마 만에 이런 관계를 구축하나 싶었다.
쿤이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감정을 정리 한 뒤,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집중 좀 하자. 공국 수도까지 가는 길. 추천하는 방향이라도 있나?”
“굴락의 팔을 피하면서 눈에 안 띄는 위치여야 하지. 하지만 젊은 여자 둘과 아이 하나를 대동해서 험로를 선택하기는 어려워. 차라리 북쪽으로 가서 야만인들의 거처를 통과하는 것이 나아.”
“야만인의? 그들과 대화가 되나?”
“밖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루고 살아. 적당한 대가만 있다면 굳이 힘을 빌리지 못할 이유도 없지. 게다가 과거의 인연도 조금 있고.”
쿤이 좁아진 미간을 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의 상식선에 들어있는 야만인은 미개하고, 난폭한 족속들이다. 그들의 지성을 믿어 협력을 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공화국 내의 다른 길을 개척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못 믿는 눈치군. 이해는 하네.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경계선 안쪽의 마을로 찾아가는 건 적의 손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그게 아니라면 중간 지역을 가로질러서 내륙 쪽으로 바로 향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 그걸 감행하는 건 미친 짓이지. 차라리 경계를 타고 올라가서 사둠타 부족의 자치령으로 향하는 것이 낫네.”
“사둠타?”
“공화국과 바로 닿아 있어서, 문화적으로 가장 개방 된 부족이지. 손재주가 좋아서 쓸 만한 물건들도 많이 다루니, 보급을 하기에도 좋을 거네.”
“음. 정말로 야만인과 거래가 된다는 건가?”
“적어도 굴락의 팔을 피하기에는 그쪽이 낫겠지.”
망설임 없이 말 하는 세이혼을 보니 확신이 있는 것 같다.
쿤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까지 말을 하면 한 번 믿어주는 것도 좋다. 정말로 거래가 되는 이들이라면 추격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향이 좋으니까.
“그럼 가는 길을 일러 주지. 일단은……”
사둠타 마을까지는 유타 평원을 가로지르는 여정.
지표 없는 여정은 별빛 없는 밤하늘과 같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금과 같은 것. 쿤이 귀를 활짝 열고 경청했다.
눈을 반짝이던 란이 잠들어 세이혼에게 기댈 때 까지.
이야기는 이어졌다.
#
“음.”
앞으로의 여정을 계획하고 난 뒤 집으로 들어온 쿤은 손등을 두드려 창을 살폈다. 전과 같은 수치와 설명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쪽 한 가지는 전과 다른 숫자를 이루고 있었다.
‘558……’
신성 점수가 깨어나서 살폈을 때보다 늘어나 있었다.
쿤은 그 사이에 공물을 바친 기억이 없다. 그대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저절로 점수가 증가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묘한 위화감.’
일어난 뒤부터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꽉 짜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릴 적 용병이 되어 바닥을 구르며 수련했을 때 받아 본 느낌과 흡사했다. 목표를 두고 단련하여 그것을 성취했을 때 가지는 감각. 부상당한 몸으로 겨우 회복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와는 확실히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군. 신도가 늘었기 때문에, 신께서 은총을 베푸신 건가?’
단순하게 보자면 그게 가장 타당한 해법이다.
자고 일어났더니 신성 점수가 늘고, 몸이 단련 돼 있다. 이런 이적이 가능 한 거라면 서 준경 신밖에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뭔가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건 사실이다. 어째서 신께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소통을 하는 것일까.
“안에 있나?”
“음?”
그렇게 생각을 깊이 파 들어가고 있을 무렵, 얼기설기 짠 천막을 걷어내며 세이혼이 들어왔다. 빈손이 아니다. 칼로 긁어 낸 목봉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쿤이 의아한 눈빛으로 이를 바라봤다.
“사둠타 족 사람들은 강자를 선호하지. 몸이 나은 듯싶으니, 출발하기 전에 몇 가지 요령을 알려 주겠네.”
“요령? 하푼이라는 곳의?”
“이미 해체된 조직에 비전이고 뭐고가 있겠나. 썩혀봐야 의미 없는 재주니, 잘 부탁한다는 뇌물로 알려 주겠네.”
거부 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쿤이 몸담았던 용병 세계에서도 개인의 비전은 마치 황금과 같이 여겨졌다. 몸 쓰는 기교나 전투의 요령.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알아내기 위해서 발바닥을 핥던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걸 덥석 알려준다고 하니 두 손 들고 반겨야 할 판이었다.
‘아……! 이건가?’
일어나려던 쿤이 눈을 반짝였다.
늘어난 신성점수와 단련 된 듯 한 몸. 성기사로 받아들인 세이혼에게 비전을 익히게 될 것을 미리 예지하였다면, 몸 상태가 이러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사도에 대한 안배. 말 그대로 지극한 은총이라 볼 수 있다.
‘아아……신이시여!’
이런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 은총이 닿아 있는 것이다.
쿤이 크게 감읍하여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은혜는 커다랗고 화려한 불꽃에서 보이지 않는다. 작고 섬세한 보풀 하나에서 느끼는 법.
“안 오는가?”
“지금 간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으로 익히겠다.
쿤이 비장한 눈빛을 한 채, 세이혼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
세이혼과 마주 선 쿤은 그가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만남은 란을 살리기 위해서 비굴함을 감수하는 모습. 두 번째는 의외의 상황에서 능력을 선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얼굴은 나이를 속이지 못했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몸은 척 봐도 단단하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설명하지. 내가 몸담았던 하푼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점은 바로 주변을 읽는 눈이네. 몸을 단련하고 적의 공세를 막아 낼 수법을 지녔다 해도,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살아남을 수 없지. 그렇기에 우리는 우선 전황을 한 눈에 읽고 필요한 것을 취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상황 판단력이라는 건가?”
“어느 정도는. 하지만 하푼의 수련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우리가 눈이라 표현하는 것에는 시력과 청력. 후각과 촉감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어. 간단하게 말하자면 몸으로 주변 환경을 읽어 최적의 전투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함께 일 하던 용병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숙련된 용병일수록 감각을 다양하게 사용한다고. 시야에만 의지하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 코로 스며 들어오는 냄새까지 모두 판단하여 싸운다고 말을 했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그런 수련을 할 여유가 있나?”
“적합한 것이 있지. 감각제한이라 하여, 평소 사용하지 않는 감각의 사용법을 읽히는 수련법이 있네. 하지만 지금 할 건 그게 아니야. 내가 여기서 가르칠 요령은 검을 통해 상대를 읽는 방식이네.”
“검을 통해 상대를 읽는다……?”
“경험 많은 용병이라면 겪어 본 적이 있을 거야. 생사가 결정 나는 순간, 검을 통해 전해지는 상대의 고동 소리를.”
검을 통해지는 고동 소리.
쿤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경험이 있었다. 생사가 정해지는 찰나의 순간. 적의 눈빛, 입모양, 심장 박동 수가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오는 일.
“우리는 그것을 감각의 확장이라 부른다. 평소 사용하던 감각들이 위기의 순간 확장되어 주변 정보를 종합적으로 전해주게 되는 거지. 그 결과로 알고 있었지만 간과했던 상대의 정보를 선명하게 읽을 수 있게 되는 거다. 그 중 검을 통해서 상대를 읽는 기술은 가장 기초적인 거라고 할 수 있지.”
“음……”
“말로는 이해를 하기 어렵겠지.”
툭. 세이혼이 들고 왔던 목검 중 하나를 던졌다.
쿤이 받아 들자, 자세를 잡으라 신호를 보냈다. 쓰던 것보다 조금 긴 형태. 약간은 어색하게 자세를 잡은 뒤 쿤이 고개를 들었다.
“이 검을 떨쳐내 보게나.”
척. 자세 잡은 쿤의 목검에 세이혼이 자신의 것을 붙였다.
면과 면이 닿았다. 둘 다 무겁지 않은 무기라 그냥 당기면 떨어질 것 같았다. ‘정말로 그게 다인가?’ 라는 표정으로 쿤이 봤다. 세이혼이 가볍게 웃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눈빛. 살짝 열 받은 쿤이 기습적으로 목검을 당겼다.
“……엇!?”
검을 당겼으나, 한 걸음 내딛은 세이혼의 검 역시 같은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쿤이 다시 검을 좌우로 흔들었다. 휙. 휙. 늘어난 힘만큼 빨랐다. 하지면 역시 세이혼의 검은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보면 아교로 붙여 놓은 거라 착각 할 모습이었다.
‘어떻게?’
다시 몇 번을 흔들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완전히 달라붙어 있는 두 검. 쿤은 더 이상 반항하기를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 그러자, 죽어도 안 떨어지던 두 검이 드디어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어찌 한 거지?”
“검 끝을 통해 상대의 움직임을 예견하는 거네. 단지 쥐고 있는 막대기라 생각하기 쉽지만, 몸에 반응하는 이상 많은 정보를 그것에서 읽어 낼 수 있지. 이것이 능숙해지면 이런 기교도 가능하네.”
탁. 세이혼이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쿤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검면으로 이를 흘렸다. 안으로 파고들어 상대를 노리는데 특화 된 동작. 하지만 그렇게 검을 미끄러뜨리는 순간, 손잡이 부근이 갑자기 강하게 떨렸다. 파지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에도 검이 손끝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
“검을 흘리고 다음 동작으로 들어가기 전. 힘을 주기 위해 검을 다시 고쳐 잡는 습관이 있어. 그 사이에 검이 흔들리면 이렇게 놓치기 십상이지.”
“……지금껏 그런 일은 당해 본 적이 없는데?”
“아직 그럴 만 한 상대를 못 만난 거지. 정식 기사단의 단장 급이나, 특정 기관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괴물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검 뺏고 목 날리는 건 우스운 일이야.”
쿤이 융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라면 검을 대기도 전에 목을 날려 올 것 같다. 그렇게 생각 해 보면 여객선에서 무사히 도망 나온 것 자체가 기적.
신이 보우하신 것이다.
“후.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익힐 수 있는 거지?”
쿤이 허리를 펴며 물었다.
주눅 들 시간도 아깝다. 부족하면 배우고,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용병으로 살아오기를 벌써 반평생. 이런 비전을 익힐 기회가 또 언제 있겠는가. 어려움 속에서 나아감을 다짐하고, 그 안에서 하루를 단련하는 것이다.
“좋은 자세군. 시작은 손끝의 감각부터. 자, 검을 다시 들어 봐라.”
목검을 다시 줍는 쿤의 눈빛은 더 없이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작가의 말
* 착, 흡. 글에서 한자식 기술명을 표기하는 것이 어색할까요?
* 새로운 파트. 슬슬 메인스토리의 윤곽을 보일 때가 됐군요.
* 재밌게 보고 가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