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그릴을 거실에 설치한 뒤에 소고기를 구웠다.
양파와 버섯. 감자를 썰어서 준비시키고, 잘 익은 김치와 밥을 내왔다. 마침 전날 만들어 둔 파 무침도 있었고, 장보다 집어 온 깻잎과 쌈 무도 있었다. 한 상 차려놓고 고기를 지글지글 익혀가니 둘러앉은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고기~고기!”
“익어가는 자태가 아름답군!”
“그게 뭐야~! 아하하!”
세주가 과장되게 코를 벌름거리자, 미소가 웃었다.
소유는 그런 둘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삼총사. 대충 그런 느낌이다. 학창 시절에 나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문득 이렇게 있고 보니, 연락이 끊긴 친구들이 생각났다.
“자자. 소고기는 살짝 익었을 때 먹어야 제 맛이지.”
적당히 익은 고기를 하나씩 집어서 건네 주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합창하며 오물거리는 모양새가 참 귀엽다. 물론, 미소가 셋 중 제일 예쁘지만.
그렇게 고기와 버섯. 각종 채소들의 파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슬쩍 운을 떼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이것이 문득 생각나 물어보는 것이다. 이 정도의 분위기를 고수했다.
“너희 셋은 개척자들 중에 누구를 제일 좋아하니?”
“개척자요? 음……글쎄요. 전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전 서율 언니요!! 마담 서율!”
소유는 심드렁히, 세주는 적극적으로 답을 했다.
답 하지 않은 미소를 돌아봤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리며 ‘그 속 내가 다 알지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이고. 아빠, 이럴 때 홍보하고 싶어요?”
“크흐음. 그냥 네 또래의 생각을 알고 싶었을 뿐이란다.”
홍보? 무슨 홍보. 소유와 세주가 미소를 보며 물었다.
‘아빠가 서율 언니네 회사에서 일하잖아.’ 미소가 웃으며 간단하게 답을 했다. 하지만 반응은 간단하지 않았다. 둘은 크게 놀라며 소고기마저 놓은 채 나를 바라봤다.
연예인만큼. 아니, 그보다 핫하게 다뤄지는 게 바로 개척자다. 소속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아직 어린 둘에게는 대단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렇게 별나게 볼 거 없어. 그냥 잔심부름 하는 정도니까.”
“그, 그래도요! 그럼 막 서율 언니도 보고 그래요!?”
직접 안 물어도 소유의 눈 역시 반짝거린다.
그 정도야 당연하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슬쩍 본래 묻고자 하던 것을 꺼내 들었다.
“나중에 한 번 시간 되면 볼 수 있게 해 줄게. 아, 너희는 개척자 테스트 다 한 거지?”
“그럼요. 일괄적으로 테스트를 했었는데요.”
“맞다! 아빠, 세주 있잖아요. 재 테스트에서 유보 판정 받았었다!?”
“유보? 그런 것도 있었나?”
“네. 게이트 반응은 있지만, 유체화는 안 되는 사람. 반 푼이. 킥킥.”
“야아~! 누가 반 푼이래?”
두 사람이 투닥거렸다.
그 사이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게이트 반응은 있지만 유체화는 안 되는 사람. 그렇다면 검은 돌에 반응이 온 이유도 이해가 간다. 안정적으로 반응이 가능한 개척자와는 달리, 그 에너지 총량이 부족하여 항상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던 것이다.
그게 돌과 반응하면서 보인 것……
“아쉽겠네.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테스트 해 봐.”
“에이, 됐어요. 아직까지 유보 받은 사람 중에 개척자가 된 사람은 없는데요.”
“후후. 그야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검은 돌을 배터리로 생각했다.
게이트에서 나와 개척자와 반응하는 흰 빛을 모아 주는. 그렇다면 배터리에 모인 에너지가 나를 이동시키는 것 말고 다른 쪽으로도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절반만 각성 된 반 푼이 개척자를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든지.
“에잇! 됐어요! 그냥 지금은 소고기에만 집중하렵니다!”
“와~! 세 점씩 집는 게 어디 있어!?”
“둘 다 조심해. 옆으로 튀잖아.”
일단은 하나의 가정을 세웠다는 것이 중요하다.
검은 돌에 에너지가 찼을 때. 그리고 그것을 활용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다음 단계를 테스트 해 보면 된다.
“아빠, 다 먹었어요.”
“……”
물론, 지금은 여대생 셋의 식욕을 무시 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
냉장고에 고기가 남아 있던가?
#
미소의 친구들을 만나고 열흘 가량이 흘렀다.
다음 게이트 작업까지는 못해도 2주의 시간이 필요한 시점. 반지의 마법으로 시간을 줄이거나 그 사이에 소향을 설득해서 개별적인 접근이 가능 할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나와 쿤을 위한 준비는 필요하다.
체육관에서 하는 운동을 보다 전문적인 것으로 교체 한 것도 바로 이 때문.
한 때 UFC까지 진출했다는 덩치 큰 관장에게 개인 레슨을 신청해서 매일같이 단련을 받고 있다. 초반에는 같잖은 놈이 꼴값 떤다는 눈치를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대다. 내가 하는 운동량을 보고 체육관 내 다른 이들이 한 소리 들을 정도.
“원! 투!! 스트레이트!”
파팡!! 팡!
미트를 때릴 때 마다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을 쓰는 건 참 기분이 좋다. 예전에는 등산이라도 한 번 갈라치면 아주 죽을상을 지었던 나다. 하지만 지금은 격렬한 운동이 가져오는 탈력감과 몸의 부담이 즐겁다. 관장이 변태 아니냐고 놀렸을 정도다.
이 모든 게 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임은 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으로 삶에 활력이 돌고, 무언가 이룩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너무 돌아갔어! 턱 당기고!! 오른 팔! 오른 팔!! 집중해!”
타격 기에 이어, 그라운드 기술까지.
아직 수박 겉핥기식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배워 둔 것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힘과 체력의 등급이 상승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쿤이 알지 못하는 현대 격투기의 기술이 나름의 경험으로 쌓이는 거니까.
“마무리! 3분!!”
“으아아! 아저씨, 살살 좀 합시다!!”
“하하! 힘 빼면 오늘 고기는 내가 사 주마!”
“진짜요!?”
“구라지, 이것아!”
억 하는 사이에 스파링 파트너의 팔을 꺾어 항복을 받아냈다.
나보다 반 년 정도 일찍 들어와 항상 부대끼는 놈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불어난 살 좀 빼겠다고 가입했던 게 벌써 반년이나 흘렀다고 한다. 성격도 좋고, 실력이 비슷해서 항상 이렇게 파트너로 붙는다.
물론, 내가 전력으로 힘을 쓰면 들어다 매치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을 배우려고 온 것 아니던가? 적당한 수준으로 맞춰주고 있는 것이다.
“수고하셨어요.”
“너도 고생했다. 아저씨 상대 해 주냐고 힘들지?”
“으핫. 좀 아시는군요?”
“이놈이?”
장난을 치며 샤워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살폈다. 쩍쩍 갈라진 몸은 옛 영화 속 무술 인에도 밀리지 않는다. 펌핑 시킨 근육이 아니라 체적 자체는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잘게 갈라진 선들은 마치 조각을 한 듯 선명했다.
힘을 꾹 주면 마치 영화 속 헐크마냥 몸이 부풀어 오른다. 한계 이상의 힘. 신화 속 헤라클라스가 이랬을까. 그렇게 있자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은 열기가 마구 꿈틀거린다. 쿤의 영향으로 젊어진 몸은 호르몬이라도 과다 분비시키는 걸까? 스무 살의 그때보다도 더욱 열정적인 상태임을 인지하고 있다.
“와, 아저씨 지금 거울 보면서 자뻑했죠?”
“크흠. 내가 봐도 멋진데 어쩌겠냐?”
“크. 이래서 중년의 뻔뻔함이 무서운 거라니까요.”
“너도 크면 나처럼 된다.”
“무서워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네요.”
나이어린 이들과 스스럼없이 농담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나이가 많고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면 벽 너머에 있는 이들과의 소통이 어렵다. 나이 때문에, 지위 때문에. 생각이 이를 가로막고 스스로를 한계 짓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한계라면 이미 숫하게 넘겼다. 다른 세계의, 다른 사람의 삶 또한 경험했다. 이제 와서 작은 벽 따위에 연연 할 것 같은가?
격 없이 어울림에 망설임이 없다.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수에 미리 겁먹지 않는다. 변하기 시작한 것들 중 육체적인 건 얼마 안 된다. 정신. 사고의 확장이 가져오는 변화야 말로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저씨~! 아저씨 핸드폰 울려요!”
“누구라고 뜨는데?”
“소향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아저씨, 애인?”
애인이라. 어쩌면 그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남은 물기를 툭툭 털어 내고는 탈의실로 향했다.
#
회사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회사 식구뿐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그리고 한 쪽. 따로 떨어져 있는 의자에 두드러지는 외모의 남자가 다리를 꼰 채 들어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남혁. 차준혁의 형이자, 차동혁의 아들인 바로 그 사람이다.
일전에 게이트 보충 건으로 한 번 스치듯 만난 기억이 있다. 그 사람이 왜? 의자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며 소향을 바라봤다.
“다 왔네요. 그럼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 보죠.”
별 다른 설명 없이, 소향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복잡 할 것 없습니다. 앞서 말 했듯이, 서율 양과 남혁 군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게이트의 관련된 괴담 등을 해소해 주면 되는 일이니까요.”
말을 받은 것은 차남혁의 옆. 즉, 소향의 정면에 앉은 대머리 남자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태도나 자세 등이 소향과 마찬가지로 특정 보조팀을 맡고 있는 인물 같았다. 설명하자면 소속사의 사장.
“프로그램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송에 나가는 스태프들을 왜 그쪽에서 모두 지원하겠다는 건지 납득하기 어렵군요. 하늘사랑 쪽의 인물이 없다면, 그쪽의 독단으로 사람들이 생각 할 거 아닙니까?”
“하하.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시는군요. 스태프야 어떤들 어떠합니까? 서율 양과 남혁 군이 잘 나오면 그만 아닐는지요.”
“그건 아닌 거 같네요. 개척자들 중 가장 브랜드 가치가 높은 건 서율이와 그쪽의 차 남혁 씨입니다. 둘을 한 번에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에서 배경이 되는 인물들이 모두 루터 쪽 사람들이라? 어떻게 비춰 질 지 뻔 하다고 보는데요?”
대화를 들어보니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최근 게이트 관련 영상이 공개되며 세간의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그 일부를 해소하기 위해 홍보 영상 같은 걸 찍는 것이다. 출연자는 서율이와 차남혁. 둘이야 워낙 인지도 높은 개척자이니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방송에 나갈 보조팀의 스태프들의 비율은 의견이 안 맞는 것 같다. 노출 빈도라는 것이 결국 P.R로 직격되는 것이니 서로 양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쉽게 타협이 될 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소향과 서연이 의견이 피력하고, 대머리의 남자가 계속 반박을 했다. 단순히 방송 1회 분이 아니라, 각종 광고와 회사 홍보 등. 거액이 달린 일. 아무래도 회의가 길어 질수밖에 없었다.
찌릿.
그때, 묘한 기운이 몸을 저미고 지나갔다.
불쾌하고 음습하다. 공중화장실에 휴지가 없음을 뒤늦게 알아 챈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찝찝하고 굉장히 끈적끈적했다.
일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은 받은 경험이 있다.
서율이가 펑크 난 개척자의 대타를 뛰었을 때.
아마 그 당시에도……
차남혁이 있었다.
“……”
지나가는 눈길로 옆을 살피니, 확실히 차남혁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어째서? 동생 놈 이혼시킨 일 때문일까? 그것이 가문의 누가 되는 행위라 여겨서 반감을 가지는 거라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일전에는 만났을 때는 이혼하기 전. 만약 그 당시 느꼈던 위화감도 차남혁의 시선 때문이라면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음?”
“딴 생각 하셨군요. 서율이의 담당을 준경 씨가 해 주었으면 하는데. 괜찮겠어요?”
소향의 눈썹이 앙큼하게 올라가 있다.
차남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물어본 모양이다. 미안하다는 손짓을 한 뒤 고개를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서율이를 담당하라는 건 게이트 이용 시에 따라붙는 사람이 돼 달라는 것. 발작 건으로 걱정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의외지만, 나로서는 거부 할 이유가 없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군요. 어디 한 번 여섯을 한 장면에 담아 봅시다.”
내 긍정과 동시에 대머리 남자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서율이의 옆으로 나와 서연이를 밀고, 차남혁의 옆으로는 처음 보는 남녀 둘을 나란히 비치했다. 성별도 딱 맞고, 이리 보니 다들 외모가 괜찮다. 아무래도 방송이다 보니 사용 할 스태프 중에서도 보기 좋은 인물을 추린 모양이다.
우리 쪽도 마찬가지.
걱정하던 소향이 왜 나를 택했나 했더니, 이렇게 보니 이해가 간다. 남규와 동식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조금 더 나은 얼굴인가 보다. 카메라에 잡히는 일이다 보니, 그 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
“그럼 사전 광고용으로 쓸 사진 좀 찍으러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꽤 급하시군요.”
“하하. 시간을 낭비해서 좋을 게 어디 있겠습니까? 다 모였을 때 한 컷이라도 남겨 둬야죠.”
결정은 빠르게 내려지고, 사람들이 사무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게이트로 향할 모양이다.
쿤에게 다시 접촉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다행인 일.
“삼촌, 같이 타요.”
그때, 나가는 내 팔을 잡고 서율이가 달라붙었다.
찌릿.
동시에 예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굳이 안 봐도 차남혁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설마, 서율이 때문에? 단순한 질투로 나를 노려본다?
차남혁.
어째, 달가운 인연일 것 같지는 않다.
※작가의 말
슬슬 현실쪽 빌런 라인을 정리하고, 쿤 쪽 메인 스토리를 타야겠네요.
조금 늘어진다는 지적이 있어 속도를 내볼까 합니다.
* 다음 편은 쿤이 등장합니다.
* 걱정해 주신 덕분에 몸이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