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51화 (51/240)

뜨거운 바람이 숨결이 타고 들어와 폐부를 달궜다.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수풀이 타들어가 황색으로 변하다, 검게 날렸다. 바람은 마을을 중심으로 돌았다. 불길은 초식동물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그것과 같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걸음을 서둘러 길을 재촉하지만 열기를 모두 비켜 낼 수는 없었다.

“콜록……!! 콜록!!”

몸이 약한 란이 가장 먼저 반응을 했다.

물을 적셔 천으로 입을 막아 두었지만, 옅게 들어오는 연기를 전부 거두지는 못했다. 라라와 루루도 사정은 비슷했다. 겨우겨우 호흡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란아 조금만 참으렴.”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세이혼은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전날, 딸을 구하기 위해서 바짓가랑이를 잡던 사람이 아니었다. 맹금류의 눈빛을 한 채 사방을 빠르게 훑어갔다. 손끝으로 공기를 읽고, 계속 방향을 바꾸었다. 불이 사방을 덮어가는 와중에도 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찍어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단순히 강하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다.

벌레의 울음을 통해서 적을 간파하고, 쇠 냄새를 찍어서 맛보는 사람은 경험 한 적이 없다. 제국의 노련한 레인저라면 가능할까? 적어도 동종 업계에서는 경험 해 본 적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앞쪽에 적입니다. 돌아 갈 수는 없을 거 같군요.”

“몇인지 알 수 있습니까?”

“나무 뒤에 셋. 그 후면으로 열다섯입니다. 전부 상대하는 건 무리 같군요. 제가 유인을 하겠습니다. 앞쪽 소로를 통과해서 비탈까지 달리세요. 바로 뒤쫓아 가겠습니다.”

그리 말을 하고는 란을 쿤에게 건넸다.

“란아, 잠시만 이분들과 같이 있으렴. 아빠는 금방 돌아 올 테니까.”

“아빠……”

“아빠가 전에 말 한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응. 눈 감고 백세면, 아빠는 항상 앞에 있다고.”

“그래. 그렇게만 하고 있으렴. 금방 다녀 올 테니까.”

말 하는 모양새가 이런 일이 익숙한 것 같다.

쿤이 란을 받아서 업은 뒤, 그를 바라봤다. 신기한 사람. 항구를 벗어나 처음으로 선택 한 마을에서 만난 인물이 이렇다. 이걸 우연으로 볼 수 있나? 아무리 길 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 조각을 맞을 수 있는 게 세상이라지만 그건 너무 억지다.

‘무언가 인연이 있다.’

신의 섭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만남은 분명 아니었다.

“무사하기를 빌겠습니다.”

“서두르십시오.”

그렇다면 지금은 그를 의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쿤이 뒤를 돌아 봐 루루와 라라의 상태를 한 번 살핀 뒤, 앞서 이야기했던 소로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수풀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사람들의 기척이 한 번에 쏠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이혼이 시선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몸을 저릿하게 울리던 위기감이 조금은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빠져나갈 수 있다.’

발끝에 힘이 더 들어갔다.

#

연기가 가라앉는 위치까지 빠져나온 뒤, 쿤은 한숨을 돌렸다.

라라와 루루는 잔뜩 지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체력도 안 받쳐주는 판에 연기를 마시고 뛰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란 보다는 사정이 낫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전날 받은 축복의 여파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조차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그래. 너무 급하게 넘기지 마.”

쿤이 물을 적셔서 그녀의 입을 닦아 주었다.

숨이 거친 상황에서 물을 마구 마시면 사레들릴 위험이 있다. 입술을 적시면서 천천히 호흡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벨포드 씨.”

그때, 호흡을 진정시킨 라라가 말을 걸어왔다.

‘물어 볼 때인가.’ 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냥 불이 난 게 아니었군요?”

“언니?”

“그냥 불이 난 거면 적이니 뭐니 말 할 이유가 없겠죠. 추적대가 쫒아 온 건가요?”

쿤이 별다른 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쉬지 않고 주변을 탐색했다. 세이혼이 적들을 끌어 준 덕분에 주변에서는 딱히 위협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죠?”

라라의 말끝이 살짝 떨려왔다.

추격대가 불까지 지르면서 둘을 찾으려 한 거면, 이미 목격자는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와 같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어찌 되었을까? 굳이 안 봐도 답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쿤을 보다, 라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마……”

루루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라라와 쿤을 번갈아 바라봤다.

평소와 같이 밝은 표정은 더 이상 유지 할 수 없었다.

‘난감하군.’

쿤이라고 좋아서 경고도 없이 빠져나온 게 아니다.

사방을 포위하고 불을 지른 상황에서 혹을 단 채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사실, 세이혼이 없었다면 쿤도 도망칠 방향을 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 특히 슈엥카에게 받은 호의가 따듯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쿤은 정말로 위험하다 생각되면 라라와 루루마저 버리고 도망 칠 수 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배운 사람이다.

그런 것들을 두 사람에게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아빠……!”

그때, 침묵을 깨고 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동시에 그녀의 시선 쪽을 바라봤다. 피범벅이 된 세이혼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꼴. 하지만 란은 그런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가 안겼다.

“몸은 괜찮니?”

“네. 벨포드 아저씨가 도와줬어요.”

“다행이구나.”

그가 란을 부드럽게 다독이고는 쿤을 바라봤다.

말투와는 달리 눈빛에는 아직 전투의 여력이 남아 있었다. 섬뜩하고 강렬한 빛. 당장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은 그 위세에 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사했군요.”

“생각보다 숫자가 많아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래도 일차적 방위선은 돌파했으니, 이대로 내려가면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 같군요.”

“마을 사람을……”

“음?”

“마을 사람을 도와 줄 수는 없었나요?”

주저앉아 있던 라라였다.

그녀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세이혼이 답 대신, 쿤을 돌아봤다. 잠시 눈빛이 오고갔다. 처지가 흡사하기 때문일까 그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그리고 짧게 답을 했다.

“가능한 것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에 속해 있었죠.”

라라가 땅을 움켜 쥔 채 몸을 떨었다.

아마 처음으로 직시 한 것일지 모르겠다. 여객선에서 빠져나올 때는 워낙 경황이 없었고, 그 뒤로는 쭉 쿤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다. 추적대가 와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건, 결국 일행이 마을로 온 것이 횡액을 불러왔다는 말이 된다.

죄책감. 지금까지 이름 없이 가슴 언저리를 돌던 그 감정이 무겁게 내려앉은 것이다.

“언니……”

“루루야.”

그녀를 다독인 건 쿤이 아닌, 루루였다.

옆으로 다가가 언니를 꼭 안았다.

쿤이 살짝 이채를 띠었다. 태평하고 철없는 만큼 루루가 더 충격을 받으리라 생각 한 것이다. 하지만 조그마한 손으로 다독이는 루루의 눈에는 옅은 흔들림 정도만이 있었을 뿐이다.

“일단은 살아서 나가자.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든 보답을 하는 거야. 죽어버린 사람들한테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그래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나아.”

“하지만……”

“아빠가 평소에 그랬잖아. 힘들 때일수록 이 악 물고 나가야 하는 거라고. 그리고 우리가 여행 떠날 때 뭐라고 그랬어?”

“다 컸으니 네 앞길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응. 적어도 주저앉아 있지는 말자.”

“……”

힘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에 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 하지만 더 이상 무언가를 묻지는 않았다. 쿤을 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그것이면 됐다.

쿤이 둘을 뒤편으로 돌리고, 세이혼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소로를 따라 쭉 달렸다.

마을 쪽으로 모이는 바람 탓인지 연기는 더 이상 일행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 만큼 달리는 속도도 빨라졌다. 비탈길의 경사가 제법 심하기는 하지만 못 달릴 정도는 아니었다. 금세 열기와 멀어졌다.

쉬익……!!

하지만 상대는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지워버릴 만큼 각오를 바싹 세운 자들이었다.

일차적인 포위를 돌파했다고 희희낙락 움직일 수는 없었다. 조금 넓은 지역으로 나가자마자 일행을 향해서 화살이 날아왔다.

세이혼도 이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상대가 그만큼 기민했다는 걸 의미했다.

쿤과 세이혼이 날아오는 화살을 일일이 쳐 내며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터어엉!!!

화살 박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세이혼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 뒤 측면으로 달려 나갔다. 즉시, 화살 두 대가 그의 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굉장한 속도. 속사로 따지자면 제국 정규군보다도 한 수 위였다.

휘릭―

하지만 세이혼의 반응은 그것보다도 뛰어났다.

몸을 숙여 바닥을 미끄러지며 화살을 위로 흘렸다. 허리가 완전히 접혔는데도, 기동이 끝난 뒤에는 탄력적으로 곧바로 일어났다. 굉장한 몸놀림이었다.

그렇게 일차 공격을 피한 그는 건너편 나무에 도착하더니, 곧바로 굵은 가지 하나를 잡고는 뛰어 올라갔다. 휙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가지를 타고 위쪽을 달리고 있었다. 사람의 동작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민첩했다.

“쏴라!!”

포위하던 병사들이 즉시 화망을 구축하여 화살을 날렸다.

영역을 점하여 사격하는 방식은 민병대나 경비대의 수준으로는 나올 수 없는 실력이었다. 멀찍이서 보던 쿤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후웅!!!

둥그런 형태의 화살 막 위로 세이혼이 뛰어 올랐다.

족히 오 미터는 넘어서 보이는 위치에서 튀어 오른 것이다. 몸을 뒤집어 화살을 아래로 보내고는 두어 바퀴를 회전하며 품 안에 든 것들을 전방으로 쏘아냈다.

‘단검!’

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던진 건 단검이었다. 다만, 온전한 단검이 아닌, 부서진 단검을 그대로 뭉쳐서 뿌린 것이다. 잘린 파편은 하나하나가 무기가 되어 사수를 덮쳐갔다. 절명시킬 위력은 없지만 손과 눈. 조준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한 곳에 틀어박혔다.

‘놀랍군!!’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무기를 부숴서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익히 퍼져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전에서 그걸 이토록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심지어 쿤이 몸을 담았던 옛 용병대의 단장조차 이런 기예는 선보이지 못했다.

‘정체가 더욱 궁금해지는군.’

당장이라도 묻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무 둥치에 두고 간 란을 업은 채로 라라와 루루를 이끌어 측면으로 달렸다. 세이혼이 보낸 신호를 제대로 읽은 것이라면 이 선택이 맞다. 상대 역시 그의 기예에 시선을 빼앗겼으니, 막아서는 적이 없을 터.

아니, 그랬어야 옳다.

“잘도 빠져나가는군.”

쿤의 앞으로 한 남자가 떨어졌다.

놀랍게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넌……!”

자기엘카 항구에서 마지막으로 마차를 막아섰던 경비대의 대장.

그가 산과 같은 얼굴을 한 채 쿤과 대치했다.

※작가의 말

* 공물을 양도하여 바치는 건 통용되지 않습니다. 설명은 본문에서...

* 경비대장 재 등장.

* 월요일. 다들 웃으면서 한 주를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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