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공물이 사라진 이후, 신성점수의 변동 외에 아무런 특이사항이 없음을 깨달았다. 특별한 특기의 생성이나, 신벌과 같은 부가적인 영향도 없었다.
그냥 신도일 따름이구나.
세이혼의 행위는 신의 이름을 알리고 공물을 바친 그냥 그런 일의 하나일 뿐이었다. 경건하게 앉아있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이것으로 된 겁니까?”
“네. 당신이 바친 공물은 신께 전해졌습니다. 앞으로도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은 채, 믿음을 간직해 주십시오.”
“오……알겠습니다.”
눈앞에서 물건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으니 의심 할 건 없다.
세이혼이 크게 고개를 끄덕여 신과 쿤에게 감사를 보내고, 다시 란의 옆으로 걸어갔다. 신의 은총을 받았다 생각하는 건지 표정이 더욱 밝아 보였다.
잠들어 있는 란과 세이혼.
쿤이 할 일은 다 끝났다. 아직도 감동의 여운에서 허우적거리는 라라와 루루를 챙겨서 집을 벗어났다. 슈엥카도 같이 나와 갈림길에서 집으로 흩어졌다.
사방이 까맣고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쿤이 그대로 걷다가 잘게 흐르는 내천 앞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란과 세이혼. 힘 낭비에 몇 자리 없는 신관 위까지 내어 주었지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순히 공물로 인한 점수의 증가 때문만은 아니다.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느낌.
용병 일을 하며 두둑이 한 주머니 챙겼을 때조차 받아 본 적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보람이라는 건가?’
전장 한 복판에서 부모 없이 자란 몸이다.
급한 건 생존이었고, 남 사정 따위에 귀 기울일 사치 따위는 부려 본 적 없다. 운이 좋아 오지랖 넓은 용병에게 단검술 한 자락 배우고, 거칠게 구르며 경험을 쌓아 제법 선 굵은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정과 연민에 빠져 푼돈이나마 던져 본 경험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를 도와서 보람을 느끼다니.
“벨포드 씨? 뭐하세요?”
“루루야. 두고 온 란이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그 아이도 이제 우리와 같은 신관이니까 걱정이 되는 거지.”
“아……힛. 벨포드 씨는 은근히 마음이 여린 거 같아요.”
두 소녀에게 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말이다.
쿤이 고개를 흔들며 다시 걸음을 떼었다. 나쁘다 나쁘지 않다. 감정이 꽤나 복잡하게 엉키고 있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인가.’
서 준경.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어 봤다.
#
다음날 쿤은 조금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막 동이 터 오는 시간. 조금 더 잘까 싶어 머리를 대 봤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전날 씻었던 곳으로 가서 찬 물을 묻히고 난 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마을을 통과하는 바람이 산을 타고 흐르기 때문에 기온이 상당히 낮았다.
‘외투를 준비해야 하나?’
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라라와 루루는 사정이 다르다.
괜히 감기라도 걸려서 골골거리면 이동하는 데 불편함만 는다. 챙겨온 짐들 중 걸쳐 입을 만 한 것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천천히 걸었다.
“오……!”
그때, 회관 아래쪽에서 란의 손을 잡고 올라오는 세이혼의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 아직 동도 채 뜨지 않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전날 그리 아팠던 걸 생각하면 더 자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일어나셨습니까, 은인.”
“과례입니다. 어제 받은 인사로 충분하였으니,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만나자 마자 고개를 숙이는 세이혼에게 쿤이 부드럽게 말을 했다.
연기도 하면 느는 것인가 보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태도는 여타 신전의 신관 못지않았다.
“란아, 인사를 해야지. 어제 도움을 주신 분이란다. 기억하고 있지?”
“아, 아! 고, 고맙습니다. 란이라고 해요.”
세이혼의 손을 잡고 쭈뼛거리던 란이 앞으로 나와서 허리를 크게 숙였다.
쿤이 가볍게 무릎을 접어 시선을 맞춘 뒤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는 얼굴과 손등을 살폈다. 열은 확실히 가라앉아 있었고, 신관의 표식인 노란색 문양도 제대로 박혀 있었다.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말을 했다.
“아프지 않아 다행이구나. 손등의 문양이 보이니?”
“네. 노란 색 예쁜 문양이 있어요. 이게……”
“서 준경 신을 모시는 신관의 상징이란다. 네 상태를 치유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지.”
“신관의 상징……”
란이 손등이 새겨진 문양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정신없는 와중에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되레 좋아하는 눈치. 신의 홍복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이 꽤 기꺼운 모양이었다.
“저, 은인. 그럼 제 딸아이는 이제 어찌 해야 하는 겁니까? 신관이라 하면 그 이름을 쫓아 평생을 바쳐야 한다고 아는데……”
“곁에 두고 살피고 싶으나,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기는 어렵습니다. 마음으로 서 준경 신을 모시고, 가끔 남는 물건을 공물로 바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럼 그냥 평범하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신께서는 강제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쿤, 그 자신도 그러했다.
믿음은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공물을 잘못 선택하여 신벌을 받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행동의 문제. 믿고 안 믿고의 차이로 의지를 강제 당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서 준경’이라는 신은 그러했다.
“훌륭하군요.”
“훌륭하죠.”
세이혼이 시원해진 얼굴로 웃었다.
아마도 란의 앞날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툭툭 털어내는 모습이 보기에 썩 괜찮다. 쿤도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손을 잡고 꼬물거리던 란도 웃는 둘의 모습을 한 번씩 살피더니 입을 씩 벌리며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 나이대의 소녀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예쁜 웃음이었다.
“……응?”
그렇게 훈훈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던 찰나.
세이혼이 귀를 쫑긋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손을 말아 뒤 옆에 대고는 눈매를 좁히며 무언가를 듣는 시늉을 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쿤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의 발달된 청력에는 딱히 이상하게 생각되는 소리는 없었다. 물 흐르는 소리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여인의 불평 정도가 전부.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바뀌었습니다. 게다가, 바람에서 쇠 맛도 나는군요.”
세이혼이 허공을 손가락으로 집어 맛보더니 그리 말을 했다.
쇠 맛이라니? 바람을 먹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쿤이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을 고수했다.
“마을 전역에서 느껴지는군요. 무언가 날붙이를 지닌 무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날붙이……! 그게 정말입니까?”
“확실합니다. 게다가 날 서 있는 이 기운. 뚜렷하게 적의입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없을 리 있겠는가.
쿤이 멍하니 있던 얼굴을 와락 구긴 뒤 입술을 씹었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 마을을 포위하고 있다면 그 대상은 분명하다. 라라와 루루를 노리는 무리들.
다만, 그 불안감 앞에 짙은 의문이 자리해 있다.
세이혼은 대체 이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 걸까?
하급 청력이나 하급 위기 감지 능력에서도 아무런 신호가 없다.
그의 능력이 신에게 받은 특기보다도 위에 있다는 말일까?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말을 이었다.
“설명하자면 깁니다만, 누군가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다가오고 있군요. 호의적인 느낌은 절대로……아닙니다.”
“음……음? 음!”
이걸 믿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판단이 서지 않아 잠시 고민하고 있던 순간 쿤의 감각에도 무언가 날 선 예기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낭떠러지 옆을 거니는 그런 섬뜩함이었다. 이것이 하급 위기 감지에서 오는 느낌이라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었다.
‘진짜였어.’
어찌 한지는 모르나, 세이혼은 특기보다 앞서 이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다.
쿤이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물었다.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마을 규모를 생각해 보자면 못해도 일 백. 조금씩 속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몇 분 내로 마을에 도달 할 거 같군요.”
“젠장……”
“쫒기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말은 그리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는 이미 긍정을 다 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에게 거짓말해도 별 의미는 없다. 지금 마을을 옥죄는 이들이 추적자라면 도망가는 것이 우선.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돕겠습니다. 길은 북쪽이 편하나, 숫자가 많군요. 서쪽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빠져나죠.”
“음. 란이는……”
“은혜를 입었다면 갚아야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길만 안내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상관없는 사람이니 건드리지는 않겠죠.”
가슴이 울렁이는 느낌에 쿤이 란을 거론하였으나, 세이혼은 담담하게 받았다.
잠시 생각하니, 그 말이 옳다. 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회관으로 달려갔다. 루루와 라라를 깨워서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으, 응!? 베, 벨포드 씨!?”
“꺅! 여기서 뭐해요!?”
문을 걷어 차 열고 흔들어 깨우자 놀란 반응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잘 다독여 줄 시간이 없다. 추격자가 왔다는 말로 둘의 정신에 찬 물을 쫙 끼얹어 주고 난 뒤 필요한 물건만 빠르게 챙겼다. 마차에 실어 둔 물건들이 떠올랐지만, 지금 그걸 다 챙겨 들 여유는 없었다. 아깝지만 버려야 할 때. 대충 옷가지를 보따리 삼아 둘둘 말아 등 뒤로 조여 맨 뒤, 아직도 멍 한 둘을 이끌어 건물 밖으로 나섰다.
“이쪽입니다. 따라 오십시오.”
“세, 세이혼 씨? 란?”
“뭐에요? 둘도 같이 가요?”
“멍청하게 굴 시간 없다. 조용히 하고 따라……!”
말을 맺으려는 순간, 쿤이 덜컥 하고 멈춰 섰다.
시선이 한 쪽 방향에 고정되어 있다. 선두에 서 있던 세이혼과 란. 그리고 뒤따라 뛰던 라라와 루루도 그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마을 저편에서 새빨간 불꽃이 일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벨포드 씨 저거 설마……!?”
“불이라니……”
쿤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마을 주변으로 병력을 분산하고 불을 지르는 이유는 ‘말살’ 밖에는 없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도망치는 이들을 하나씩 죽이는 것이다. 보통 전쟁에서도 이것은 잘 선택하지 않는 방법이다. 너무나 비인도적인 처사이기 때문에. 하물며, 지금은 전쟁 상황도 아니다. 뒤처리가 녹록치 않을 텐데, 이 정도까지 일을 벌인다. 상대가 어느 수준까지 각오를 했는지 짐작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위험합니다. 빨리 이쪽으로……”
세이혼이 채근했다.
그는 란을 들쳐 업은 상태로, 일행 앞쪽에 섰다. 상황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닐 텐데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닳고 닳은 노련함이 눈빛에서 보였다.
“자, 잠깐만요!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불났다고 알려야 하지 않아요?”
라라와 루루가 다급히 물었다.
불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그냥 두면 마을 전체가 불꽃에 휩싸일 터. 전날 슈엥카에게 받은 호의도 있으니 그대로 도망치기에는 양심에 찔리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혼도 쿤도 그녀들의 물음에는 즉각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답을 했다.
“일일이 알리다가는 늦습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불이 났음을 인지했을 터. 알아서 도망 칠 겁니다.”
세이혼의 말 대로 이상을 눈치 챈 사람들이 하나씩 집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마치 동이 터오는 것처럼 하늘이 붉었다. ‘어?’, ‘뭐야 이거?’ 등의 반응을 보이다, 이내 그것이 불임을 깨닫고는 사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문제는 불꽃만이 아니겠지.’
마을 주변에는 불을 낸 이들이 대기하고 있다.
불을 피해 도망친다고 해도 그 칼날을 피하기는 어려울 터. 하지만 세이혼도 쿤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지금은 도망치는 게 우선. 우선순위를 같은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고민보다 판단이 짧은 것도 동일했다.
“따라오시죠.”
무거운 세이혼의 말에 일행의 발걸음이 떼어졌다.
※작가의 말
냉정한 쿤과 세이혼...
* 탈출의 의미가 이제 나오네요.
* 저번 편을 보며 생각했는데, 역시 글의 의도는 글로 푸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 과연 세이혼의 과거는...?
* 재미있게 보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