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쑤느니 어쩌니 하면서 한 차례 소란이 훑고 지나갔다.
묽게 푼 야채 물에 밀알을 으깨어 쑨 뒤, 조금 먹이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그것으로 힘이 빠진 건지 란은 다시 잠에 들었다. 열이 가라앉은 덕분에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세이혼은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대로 감사의 인사도 못 드렸군요. 딸아이를 도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이 또한 신께서 점지하신 일. 그 은혜를 베품에 부족함이 없었다면 만족할 뿐입니다.”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말이 잘도 나왔다.
세이혼이 크게 감복한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딘가의 신실한 신관으로 생각한 것이다.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순수한 의도이냐, 아니냐의 차이 정도가 있었을 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몇 마디 더 덕담이 오고갔을 때, 세이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딸아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신관의 위를 내린 것으로 봤습니다만……제대로 본 게 맞습니까?”
“방법이 없어 그리했습니다. 혹시 다른 신앙이 있었다면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어이구! 아닙니다. 사과라니요. 딸아이를 이렇게 치료해 주셨는데, 없던 믿음이라도 끄집어내야겠지요. 백 번이고 감사를 해도 부족합니다.”
“과례는 부담스럽습니다. 신께서 미리 점지하여 저를 이곳으로 보냈으니, 그 은혜로움에 감사를 드림이 옳겠죠.”
“아……서 준경 신이라 하셨죠?”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즐거운 소리다.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매우 고결한 의미를 지닌 신이라 생각되는군요.”
“그렇습니다. 감히 추측 건데, 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균형. 상벌이 균등하며,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오는 세상이라 할 수 있죠.”
“꿈같은 이야기군요.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오는 세상이라.”
“이상을 따라 노력하는 것이 저희같이 밑에 선 자들의 역할이겠죠.”
정말로 충실한 신자의 모습이다.
세이혼의 얼굴이 더욱 감복한 자의 것으로 변해갔다. 딸도 치료해 줬겠다, 이토록 구구절절이 멋진 말만 하니 안 넘어 올 수가 없을 것이다.
“딸아이를 치료해준 은혜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어쩌면 이런 결과를 바란 걸지도 모르겠다.
쿤이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며 답을 했다.
“신께서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셨던 분. 만약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그 믿음에 답을 하는 것이 맞는 수순일 것 같습니다.”
“믿음에 답을 한다면……?”
“그분을 따르는 신도가 되어, 이름을 알리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이죠.”
신관은 란을 구하면서 한 칸을 더 사용했다.
남은 칸 수는 둘. 신관이 일반 신도보다 상위의 존재일 가능성이 높으니 이 여분을 함부로 사용하기는 그렇다. 란이야 워낙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세이혼까지 그러기에는 곤란하다.
“그럼 저도 란아처럼……”
“아닙니다. 란에게 제가 허락 한 것은 신관의 위. 신을 따르는 종복 중에서도 소수의 존재만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목숨이 중하여 어쩔 수 없이 그 자리 중 하나를 내었다 하나, 보통은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렇게나 중한 것을 란아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더욱 감복한 표정이 되었다.
여러 신과 그 아래 계급에 대한 것들은 명칭만 다르고 비슷한 형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쿤이 말 한 것을 이해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쿤이 잠시 살피다 넌지시 말을 했다.
“신도가 되어 그 믿음을 따르고 싶다면, 하찮은 것이라도 좋으니 마음을 담아 공물로 바치도록 하세요.”
“공물 말입니까?”
“얘기했듯이 서 준경 신께서는 균형을 중히 여기시는 분. 무언가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것을 내비치지 않으면 그 은혜를 가까이 하기 힘듭니다.”
“아……! 공물만큼의 은혜라는 것이군요.”
어찌 보면 지나치게 세속적인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은혜를 입은 이에게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세이혼이 크게 납득한 얼굴을 하더니 쿵쿵 거리며 집구석으로 달려가서는 낡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왔다.
“이걸. 이걸 바치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전해 받아 지켜오던 물건이니, 공물로 부족함은 없을 겁니다.”
“아, 너무 과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한 번은 예의.
세이혼이 크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과, 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딸아이는 허무하게 죽고 말았을 겁니다. 이런 오래된 물건보다 그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 주십시오.”
“흐음. 그렇게까지 말 한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쿤이 베어 나오는 웃음을 가린 채,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그릇을 가져왔다.
그리고 손등을 두드려 그럴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루루를 통해 처음으로 신도를 받았을 때도 딱 이러했다.
“이 위에 올리고 기도를 하시면 됩니다.”
“아……”
성스러운 빛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즉시, 들고 왔던 꾸러미를 풀었다. 검은 색 윤기 나는 돌이 들어 있었다. 얼핏 보기로는 딱히 대단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속인건가?’ 쿤이 잠시 생각했지만, 그릇을 보는 세이혼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적어도 연기는 아닌 것 같다.
‘신께서 판단을 내려 주시겠지.’
판단은 신의 것이니까.
쿤이 기대어린 눈으로 그릇을 응시했다.
#
쿤에게서 깨어나, 눈을 깜빡이며 서율이를 바라봤다.
게이트를 넘어 간 지 한 시간 즘 되는 시점이었다. 세이혼이 공물을 바치고 난 뒤, 쿤도 덩달아 은화 하나를 바쳤기 때문에 깨어 날 수 있었다. 간만에 들어갔다 온 탓인지 머리가 조금 멍멍 했다.
“삼촌, 피곤해요?”
대기 중이던 남규가 물었다.
오늘은 스케줄이 조금 널널해서 동식이와 남규. 서연이까지 전부 현장에 나와 있었다. 게이트를 사용해야 하는 내가 보조를 맡고 남은 이들은 그냥 주변 정리 및 대기인원으로 남았다.
“머리가 살짝. 잠시만 서율이 봐 줄래? 화장실에 가서 세수 좀 하고 올게.”
“피곤하면 그냥 쉬세요. 여기는 제가 보면 되는데.”
“하하. 그래도 내가 하겠다고 했는데, 중간에 빠질 수야 없지. 잠깐만 봐 주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게이트를 사용해야 하는데,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접촉을 시도하기는 좀 그렇다.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 뒤 자리를 남규한테 넘겼다. 어차피 오늘도 게이트 너머의 물자가 넘어오는 시간은 아니다. 별 다른 제지 없이 자리를 교체 할 수 있었다.
“후.”
화장실로 들어와 거울을 살폈다.
그리고 곧바로 인벤토리를 열어 세이혼에게 받은 구슬을 꺼냈다.
***
이름 :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돌
가치 : 600(6000)
***
아주 간단한 설명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 할 것이 아니다. 여기 나온 가치는 세이혼이 바쳤을 당시 평가 된 것이다. 즉, 본래의 가치는 6000이라는 말. 지금까지 나온 어떤 물건 중에서도 이 정도의 가치를 보여 준 것은 없다. 심지어 마법 도구였던 카넬의 마법반지조차 가치가 700이었다. 지금 이 돌은 거의9배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이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는 말인가.
신비한 돌. 그 말대로 신비한 능력이 있는 걸까? 혹시 모양만 돌이고 어떤 생물의 알이 아닐까? 잘 품고 있으면 용이라도 깨어난다든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오바 인 거 같다. 돌을 손에 쥔 채 툭툭 튕겨 봤다. 어떤 특별한 힘이라도 느껴질까 싶지만 차가운 냉기만 손끝에 맴돌 뿐, 특이한 점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나저나……”
포인트가 벌써 1500점이 넘게 쌓였다.
맹약을 완수한 것과 신비의 돌을 통해서 얻은 포인트가 상당했다. 이 정도라면 하급 특기는 줄줄이 구입 해다가 칸을 가득 채워 줄 수 있을 거 같다.
“……”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하급으로 가득 채우는 일이 굳이 현명 할 거 같지는 않다. 냉정한 사고와 하급 화술이 개방된 것처럼 다른 특기들도 경험치가 계속 누적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자주 사용하는 단검술이나 단련 계통에는 수치가 상당히 쌓여 있을 터. 하급에 낭비하기 보다는 필요 한 것을 키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개별적인 경험치 누적도 계속 되고 있으니 승급이 또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때가 되면 다른 축복이나 능력이 개방 될 수도 있으니, 그 때를 상정하여 비축해 두는 것도 좋다. 지금 상황이 일단 크게 위험하지는 않으니 너무 급하게 포인트를 낭비하는 건 좋지 않다.
일단은 이 상태로.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게이트로 향했다.
“시원해요?”
다가오는 날 보며 동식이가 농담을 던졌다.
옆에 가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남규와 교대를 했다. 그가 ‘제가 그냥 있어도 되는데.’ 라며 넌지시 말을 했지만 시작 한 이상 내가 끝내는 게 좋다. 게이트를 사용하기에도 편리하고.
자리를 잡고 서율이 옆에 앉았다.
웅……
그때 희미한 진동이 품 안에서 느껴졌다.
처음에는 핸드폰인가 했다. 하지만 울리는 것을 손으로 더듬어 따라가 보니 반대편 주머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앞서 인벤토리에서 꺼낸 그 신비의 돌이다. 엉덩이를 들썩여 자리를 고르는 척 하며 슬쩍 주머니를 열어 안을 살폈다.
“……!”
하얀 빛이 주머니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익숙한 느낌이다. 서율이가 게이트를 사용 할 때면 몸을 맴돌고 사라지는 그 빛. 잡고 있던 내 손에도 잠시간 머물러 있어 당황케 한 적이 있었다.
이게 대체 왜 돌에?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 빛은 게이트와 개척자. 두 개체를 이어주는 일종의 교각과 같다. 개척자가 게이트를 사용하여 다른 세계에 아바타를 만드는 것이 빛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헌데, 그 빛이 쿤을 통해서 얻은 돌멩이에서 새어나온다?
“삼촌, 자리가 불편해요? 저랑 바꿀래요?”
그때, 동식이가 말을 붙여왔다.
뒤뚱거리는 모양새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충 말을 해 둔 뒤 다시 주머니로 시선을 돌렸다. 안을 메우던 빛은 사리지고 없었다.
뭐였을까?
어쩌면 단순하게 게이트 너머의 물건이라 반응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은화도 주머니 안에 있는데 그건 반응이 없다. 게이트 너머의 물건이기 때문에 반응을 한 거라면 다 똑같이 빛을 머금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돌에 개척자가 넘어 올 수 있게 만드는 힘과 어떤 관계가 있다?
이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 빛을 이동을 위한 에너지로 생각해 보면, 이에 반응하는 물질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가장 간단하게 게이트만 해도 특정한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돌과 게이트는 아무리 봐도 같은 걸로는 안 보이지만 다른 방식의 반응성이 존재 할 수 있다.
흡수, 반발, 증폭……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한 가지 가정에까지 도달하게 됐다.
만약 이 돌과 하얀 빛의 상관관계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빛을 증폭해서 개척자를 더욱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수 있다면? 반대로 빛을 반발하여 사용을 억제한다면? 흡수를 해서 타인이 사용 할 수 있게 만든다면?
어느 쪽이든 보통 일은 아니다.
고개를 들어 게이트를 다시금 봤다.
쿤……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 봐야 할 거 같다.
※작가의 말
중요한 물건 등장!
* 신도와 신관 관련
신도와 하급 신관의 공물 가치 선정은 동일하게 10% 입니다.
신도와 신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특히 공물을 바쳤을 때 상승하는 경험치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급 신관은 경험치를 쌓을 수 있습니다.
* 주말입니다. 즐겁게 보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