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46화 (46/240)

두 사람을 짐마차 뒤 칸에 누인 뒤 짚으로 몸을 덮었다.

도구를 담기 위해 사둔 상자를 부숴 마차 칸 사이로 단을 만들고 그 위로 밀과 보리를 올려 두었다. 한 층 아래에 루루와 라라가 숨게 된 것이다. 싸구려 마차라 해도 행상중 비를 막아 줄 단은 있다. 둘둘 말린 걸 내려서 아래를 가리고 혹시나 비어있는 곳이 있는지를 꼼꼼하게 살폈다.

“내가 신호 할 때 까지는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 알았지?”

‘네.’라며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에 구멍을 뚫어 두었으니 숨이 막히지는 않을 것이다. 쿤이 냉큼 마부석에 올라서는 고삐를 당겼다. 늙은 말이 힘겹게 투레질을 하고는 발을 놀렸다. 장거리는 차라리 노새가 나을 것 같은데, 공화국은 말이 워낙 넘치는 지역이라 대부분 말을 사용했다.

다각. 다각.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도시 밖으로 천천히 굴러갔다.

그리고 그 무렵, 뒤쪽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여관 방향이다. 일행을 찾아 올라간 이들이 시체를 발견한 모양이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튀어 나오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찾아!! 아직 도시 안에 있을 것이다! 문을 막고 샅샅이 뒤져!!”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경비대라 하여도 융 등과 손을 잡은 무리라 공권력에는 힘을 쓰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영향력이 더 있는 모양이다. 거침없이 명령을 내리고는 병력을 몰아 사람들 사이를 헤집었다.

‘침착하자.’

지금 상황에서 속도를 내는 것은 내가 범인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낡은 마차와 늙은 말 두 마리로는 얼마 도망을 못 친다. 앞서 말 한 것처럼 공화국은 말이 유명하다. 곡창지대를 가로지르는 말은 대륙 전역에서도 유명한 것이니까. 만약 정식으로 추격대가 붙는다면 도망 칠 가능성은 낮아진다.

여행자와 같은 얼굴을 한 채 천천히 도시의 북쪽 입구로 향했다.

이미 경비의 말이 닿았는지 창을 든 무리가 나와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며 짐칸을 뒤졌다. 창으로 쿡쿡 찔러보는 모양새가 대충 살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난감하군.’

억지로 돌파하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추격대를 달게 된다. 게다가 행선지를 노출시키고 적의 포위를 한정짓게 만들어 준다. 도시에서 나가는 길은 무수히 많고 갈 수 있는 곳도 그 만큼 다양하다. 지금은 안 들키고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방법이……’

쿤이 주변을 살피며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입구의 병사는 열 명 정도. 그 중 전체를 조율하는 인물은 코가 빨간 중년 남성이었다. 지금 상황이 귀찮은지 투구도 삐딱하게 쓴 채 병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오호라.’

그때, 쿤의 눈에 남자의 특이점이 들어왔다.

하나는 목에 걸고 있는 푸른 색 구슬이었다. ‘스피어’라고 해서 자유를 상징하는 신의 심벌이다.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 주변에서 많이 퍼져있다. 쿤도 용병일을 하면서 종종 만난 경험이 있는지라 대충 그들의 습성을 알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 손이었다.

다리를 불편하게 옆으로 벌리며 긁적이고 있다. 붉어진 코와 눈매. 긁적이는 사타구니. 대충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성병이군.’

자주 있는 일이다.

도시의 경비대라면 제법 끗발 좀 있는 직업. 구역 사창가에 가서 칼 좀 두드리고 놀고 있으면 반반한 계집들이 찾아와 아양을 떤다. 그 중 상당수는 제대로 씻지 않아 온갖 병을 품고 있는 이들. 평소라면 거부를 하겠지만, 거나하게 취한 경우라면 그런 게 눈에 안 들어온다. 아래를 긁적이는 남자의 모습은 전날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쿤이 마차를 몰아 그 옆을 지나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형제시여.”

“……음?”

“스피어의 형제 아니십니까?”

쿤이 이마에 주먹을 댄 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스피어 교단의 인사법이다. 심드렁히 있던 남자가 그 모습에 살짝 이채를 띠며 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받았다.

“교도입니까?”

“제 2교도랍니다. 제국에 포교 활동을 떠났으나 방침에 밀려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군요.”

“허, 이런.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제 2교도는 외부로 포교 활동을 나가는 사람을 지칭한다.

쿤은 일부러 제국을 거론했다. 과거 몇 년 간 제국으로 포교를 왔던 스피어 교단의 사람 중 태반이 박해를 받아 타국으로 흩어졌음을 알기 때문이다. 같은 교단의 식구가 고생길 끝에 돌아왔다고 하면 누구라도 불쌍히 여길 테니까.

“그보다, 형제께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드는군요.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습니까?”

“어이쿠! 혹시 성력이 허락 되신……?”

“부족하지만 작게나마 사용 할 수 있답니다. 미천한 자에게 내린 은총이지요.”

스피어 교단은 꽤 복잡한 구조를 지니지만, 단순하게 보자면 성력을 쓸 수 있는 엠플로와 그렇지 못한 일반 신도로 나뉜다. 이 중 엠플로는 어떤 직위에 있든 존경을 받는다. 그들의 힘 자체가 신의 은총이라 여겨지기 때문.

남자가 반색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그럼 조금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어제 술을 좀 과하게 마신 탓에 그……어울리지 않는 계집과 그걸 하게 된 거 같습니다.”

“허. 본디 자유로운 성 생활도 교리의 일부.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는 자유는 방종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 거 참. 알고는 있는데, 술이 좀 과해서 그만……”

“하아. 어쩔 수 없군요. 고국 땅에 돌아와 처음으로 만난 교단 사람의 부탁을 저 버릴 수도 없고.”

“하하하. 그렇죠! 그래! 같은 교단 사람끼리 돕고 사는 거죠.”

웃는 그에게 비슷한 미소를 보여 준 뒤 손등을 두드렸다.

성병은 말 그대로 질병. 멀쩡히 서서 돌아다닐 정도라면 그리 중한 수준의 성병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축복 중 하나인 하급 질병 치유의 축복으로 치료가 될 터. 같은 교단의. 그것도 상급의 존재인 엠플로라면 아무런 대가 없이 통과를 시켜 줄 확률이 높다. 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형제님의 병이 나으시기를……”

쿤이 그럴싸하게 손을 휘저으며 ‘하급 질병 치유의 축복’을 속으로 읊조렸다. 동시에 눈앞으로 [50의 신성점수가 소모됩니다.]라는 문구가 지나갔다. 공짜가 아니다. 그것도 50이라는 꽤 많은 점수가 소모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쿤이 자연스럽게 ‘승낙’의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손끝을 남자에게 향했다.

사아아……

푸른빛이 그의 손을 다라 남자에게로 스며들었다.

‘오오오오!’ 그가 놀라며 펄쩍펄쩍 뛰었다. 일반 신도가 엘플로의 신성력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 다른 신의 권능이라고 해서 알아 볼 방법은 거의 없다. 설혹 알아본다고 해도, 그걸 물어 볼 정도로 무모한 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빛이 줄어들었다.

“어떠십니까, 형제여?”

“가, 간지러움이 사라졌어! 오오! 대단합니다! 이것이 신성력……”

“미약한 힘일 뿐입니다.”

“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감격해서 펄쩍펄쩍 날뛰는 모양새가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다른 신도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서 준경 신을 노하게 하면 어쩌나 계속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믿었다. 수많은 위기에서 도움을 주었던 서 준경 신이라면 이번에도 분명 너그럽게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생각이 적중하여, 남자의 질병을 씻은 듯 치유해 주었다.

“교단의 형제께서 기뻐하시니 제 마음도 편합니다. 아……! 제가 너무 시간을 끌었군요. 줄이 너무 밀렸습니다.”

쿤이 그제야 뒤로 늘어선 사람들을 눈치 챘다는 듯 말을 했다.

앞쪽에 있던 이들은 모두 조사가 끝나고, 그의 차례였다. 병사 몇 명이 마차 주변에 서서는 남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도 귀와 눈이 있으니 분위기를 읽었다. 쿡쿡 쑤시기에는 부담이 되는 것이다.

“허어! 바쁘신 분을 잡아 둘 수야 없지요. 뭐하냐, 거기 후딱 길 열어라.”

“거……괜찮겠습니까? 확실히 조사 하라고 했는데.”

“새끼. 교단 엠플로 씩이나 되시는 분이 사람을 납치 할 거 같냐? 확, 대갈통 깨버리기 전에 길이나 열어.”

“끄응. 알겠습니다.”

앞을 막던 이들이 물러났다.

쿤이 만족한 얼굴로 스피어 식 인사를 건넸다. 남자도 성병이 사라진 것이 기꺼운 듯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이에 응대했다.

다각다각.

그대로 열린 길로 마차를 몰았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일이 잘 풀렸다. 이대로 쭉 빠져나가 거리만 벌린다면 추격대가 온다고 해도 잡힐 염려는 거의 없었다.

“잠깐!! 거기 멈춰라!”

하지만 그 순간―

일단의 무리가 입구 쪽으로 다가왔다.

자줏빛 망토와 어깨에 박힌 큼지막한 엠블럼. 그의 등장에 주변 병사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척 봐도 높은 사람이었다.

‘젠장……무슨 일인데?’

그냥 지나 갈 수 있었던 상황.

쿤이 입술을 잘근 씹은 채 고개를 돌렸다. 물론, 얼굴은 태연함을 위장했다. ‘난 네가 우리를 왜 세웠는지 모르겠다.’라는 눈빛을 띄운 채 응시했다.

“아니, 뭔 일인데 대장까지 나오셨수?”

“위에서 내려온 지령이다. 남자 하나에 여자 둘. 제국 방면에서 온 이들이 있다면 철저히 검문을 하여 신원을 확인해 두라고 한다.”

“위에서? 무슨 일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다. 그보다 이 자는 뭔데 그냥 보내려는 거였나?”

“아, 그게 같은 교도입니다. 스피어. 대장님도 알죠? 저 어제 그 짓해서 아래쪽에 이상 생긴 거? 이분이 신성력으로 한 번에 치료했다는 거 아닙니까?”

“신성력으로?”

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쿤 옆으로 다가왔다.

굵은 눈썹에 호랑이를 닮은 눈. 꽉 닫힌 입매는 고집을 드러냈다. 전체적인 풍모는 단단한 차돌과 같다. ‘안 좋군.’ 쿤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인물은 대체적으로 융통성이 없고 돌아 갈 줄을 모른다. 기껏 수를 내, 입구를 통과하나 했는데 일이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스피어 교단 분이라 했습니까?”

“떠도는 걸음 따라 믿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수고가 많군요. 불편하시겠지만, 마차 안쪽을 좀 살펴야겠습니다. 괜찮겠지요?”

“떠도는 방랑객의 짐이라 해 봐야 보잘것없습니다. 공연히 귀찮게 할 까 두렵군요.”

“신경 쓰지 마시기를. 공무로 하는 일이니 투정부리지 않습니다.”

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숙여 후드로 표정을 가린 뒤, 시야에서 벗어났다. 대장이라 불린 남자는 딱 첫 느낌 그대로였다. 단단한 차돌. 변명으로 아무리 둘러 대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까지 말씀 하는 데야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하시고 싶은 만큼 살펴보시기를.”

“거, 대장도 참. 교단의 엠플로께서 엄한 일이 관여됐을까. 쯧.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조사하고 보내 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쿤이 가볍게 웃은 뒤 고삐를 새게 쥐었다.

여차파면 튀는 수밖에는 없다.

“흠. 식량이나 야영 물품 정도밖에는 안 보이는데요?”

“허투루 보지 말고 안까지 살펴라. 구석구석 찔러 보고.”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밀 포대를 들어내고,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낡은 천 뭉치를 들어보고, 켜켜이 쌓인 짚단을 밀어내기도 했다. 일견하기로는 딱히 보이는 것이 없다. 쿤이 마차의 아래 단으로 한 겹을 더 쌓은 것이라 전부 다 열어 뜯기 전에는 확실하게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안을 살피던 병사 둘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다는 신호다.

“흠.”

대장으로 불리던 남자가 그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불쑥 병사의 창을 뺏어 안쪽으로 푹 찔렀다. 곁눈질로 보던 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그 안에 숨어있는 건 루루와 라라다. 창에 찍히면 상처는 둘째 치고 피가 배어 나와 그대로 들킬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나 보군.”

하지만 뒤에 들려온 건 쿤의 걱정과는 반대되는 말이었다.

남자가 회수한 창끝은 멀쩡했다. 운? 어느 쪽이든 그의 창격이 라라와 루루를 빗겨 간 모양이었다.

“실례를 했군요.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그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쿤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빨리 고삐를 당겨 마차를 출발시켰다.

[맹약을 달성했습니다. 신성점수 1000점을 획득했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음성은 무시했다.

그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작가의 말

드디어 정식으로 공화국 입국.

과연 쿤은 무사히 수도까지 도달 할 수 있을까요?

* 그보다 라라와 루루의 개성 문제. 확실히 두 사람이 뚜렷하게 무언가를 보여 준 게 없더군요. 라라는 이미 써 둔 게 있으니 괜찮지만 루루가 문제네요. 천덕꾸러기 캐릭터는 미움 받기 쉬운 편이라...

*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보고 즐거울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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