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일은 신속하게 처리 되었다.
전처와의 합의가 끝난 뒤, 장인과 만나기는 했으나 그가 날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막말로 엮어 넣으려면 그쪽도 같이 끝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필요 한 건 그쪽 식구를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패. 궁지로 몰아 이를 드러내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차동남을 만난 뒤 이틀째가 되는 날 약속대로 미소의 이혼 절차가 진행되었다.
합의 이혼은 싱거울 정도로 과정이 간단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조용히 들어가 일을 처리했고, 숙려기간도 힘을 써 최소한으로 줄였다. 나와 전처의 이혼이 마무리되고 얼마 안지나 미소 역시 홀몸이 된다.
평소 쓰던 짐도 집으로 돌려받았다.
가구나 이런 건 그냥 두고, 손때가 오래 묻은 것들만 받았다. 그쪽과의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 지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상대 쪽에서도 환영하는 일이었다.
잡소리 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아내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시설이 좋아 어찌 보면 요양원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사람이 미치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미칠 만 한 일을 당해서 미치는 것과, 주변 환경에 따라 점차 미쳐가는 것. 사치를 부리며 갖은 복락을 즐기던 사람이다. 콱 막힌 곳에서 과연 제정신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다.
미소가 알면 나를 혐오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삭힌 분노는 풀어내지 않으면 마음을 좀먹는 독이 될 수 있다. 이렇게라도 끝을 내는 것이 중요했다.
오래된 인연을 잘라내고, 새 삶을 위한 발판을 다지는 일.
하나씩 차곡차곡.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
“으아아. 오늘도 수고했어요.”
“수고야, 네가 했지. 돌아가는 길에 뜨끈한 국물이라도 한 입 하고 갈까?”
“그래요, 그래!!”
“미소한테도 연락을 해 둬야겠네.”
“윽. 웬일로 단 둘이 오붓하게 먹나 했네요.”
서율이의 앓는 소리에 가볍게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맞은편에서 밝은 미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정신 병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잠시 힘들어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라 여기며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 어리다고만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다.
마침 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마중 나갈 테니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시간이 딱 맞으니 좋다. 통화를 끝내고 고개를 돌리니, 서율이가 묘한 눈으로 보고 있다.
“왜?”
“삼촌은 미소랑 얘기 할 때만 진심으로 웃는 거 같아서요.”
“무슨 소리야. 이래봬도 웃음이 많은 남자라고.”
“그런가요?”
“그럼. 보라고, 하하하하.”
내가 봐도 어색하다.
서율이가 픽 웃으며 ‘그게 뭐야~!’ 라며 핀잔을 주었다. 툭툭 손길이 자연스럽다. 이제는 그녀와의 거리도 많이 가까워져 있다. 생각해 보면 미소의 일이 잘 해결 된 것에는 그녀의 도움이 가장 컸다. 차도 그렇고, 탐정을 소개시켜 준 일도 그렇다. 비록 사고의 원인이 그녀였다고 한들, 이제는 도리어 은인이라 부를 지경이다.
“워~!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나요, 여기!”
“야, 헛소리 할래?”
“억! 발끈하는 모습을 보니까 진짜 같은데요?”
동식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장난부터 치고 있다.
투닥거리는 모습이 친 남매 같아서 보기 좋다. 개척자와 일개 보조팀 일원이라는 간극이 있지만, 서로 격 없이 지내는 걸 보니 얼마나 훈훈한가. 저절로 미소가 나오는 장면이었다.
“아, 삼촌 다 늙은 노인네 표정!”
동식이가 히죽 웃으며 놀렸다.
나도 그냥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미소 일이 해결되고 난 뒤는 뭘 해도 다 좋게 보였다. 이래서 천당과 지옥은 마음에 있다고 하는가 보다.
“야야, 삼촌은 그만 놀리고 가서 남규 오빠나 도와. 너 언제 돌아 오냐고 묻던데.”
“으~! 사무실 새 단장 하는데, 왜 나까지 필요한 건데?”
“그럼 사무실 구석에 네 자리 마련해 둔 것도 빼라고 한다?”
“어험! 당장 갑니다. 간다고요!”
거하게 답을 하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새 단장하는 사무실에 자기 자리 생긴다고 좋아하던 게 며칠 전이니 아마 열심히 가서 일 할 것이다.
사무실을 이런 시기에 새 단장하는 건 나 때문이다.
내가 서연이를 도와서 스케줄을 관리하면서 업무 효율이 부쩍 늘었다. 덕분에 소향은 아예 내 자리를 마련하면서 일정 관리와 약속 조율을 맡겼다. 그러다 보니 따로 일 할 공간이 필요했고, 누군가의 자리를 빼기 보다는 아예 새 단장을 선택했다.
사무실 공간을 하나 갈라서 내 전용 사무실을 만들고, 서연이나 다른 사람들과 연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늦게 들어온 사람이 개인 사무실을 갖는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다들 환영해 주었다. 알고 봤더니 새 단장을 하면서 소향이 다른 사람들 사무실도 다 챙겨 준 것이다.
이래저래 사람 다루는 수완은 좋았다.
“삼촌, 그럼 나갈까요?”
“아아. 늦었다가는 미소가 또 한 소리 할 거야.”
“그런 말 할 때는 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라고요.”
“아니었나?”
“스마일, 스마일 한데요?”
그랬나?
하하.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
내 주변 생활이 정리되었을 때, 나는 생각을 다시 쿤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게이트를 사용 한 것도 꽤 오래 되었다. 그의 상황도 꽤나 긴박했던 바.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지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고민한 것이 있다.
굳이 게이트를 사용해서 쿤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었다. 미소도 되찾았고 적게나마 돈도 남았다. 보조팀 업무를 하면서 차근차근 돈을 벌어 가면 그것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행복하다. 쿤의 삶에 간섭하며 복잡한 일을 경험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본 결과 게이트를 사용해서 넘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와 쿤이 이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삶은 나의 삶과도 같다. 지금 이렇게 손을 놓는다고 헤피 엔딩으로 이야기가 결말 날 거 같지는 않았다.
멈춰서는 것은 퇴보와 같다.
내 인생은 다시 깨어났을 때부터 열심히 구르고 있다. 지금의 행복에 멈춰 선다면, 이 굴렁쇠는 다시 진창으로 빠질 것이다.
그것은 사양하고 싶다.
“일단은……”
상태창을 열었다.
그 사이 종종 살피기는 했지만, 깊이 생각 해 본 적은 없다. 차근차근 다시 살펴 볼 필요성이 있었다.
***
이름 : 서준경 / 쿤 타이(Lv2) 종족 : 인간
힘 : 14 민첩성 : 12
체력 : 17 지능 : 13
스킬 : 맹약, 인고의 시간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집중 사고), 하급 은신, 하급 행운, 하급 화술(고백), 하급 위기 감지, 하급 청력, 하급 체력 단련, 하급 힘 단련, 하급 민첩성 단련, 학생의 자세, 정리의 달인, 하급 위압, 하급 요리
축복 : 하급 신관의 축복, 하급 상처 치유의 축복, 하급 질병 치유의 축복
신성 점수 : 67
***
일전에 얻었던 특기가 먼저 눈에 띠었다.
하나씩 누르며 천천히 살폈다.
***
하급 위압
상대를 위압시킬 확률이 소폭 증가한다.
***
이건 너무 설명이 간단하다.
다음으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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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요리
요리에 대한 이해도가 소폭 증가한다.
요리에 관련한 손재주와 안목이 증가한다.
좋은 요리가 나올 확률이 증가한다.
***
이것도 간단하다. 하지만 앞의 위압보다는 설명이 길다. 단순히 요리의 성공 확률뿐만이 아니라, 기본 이해도와 재료에 대한 능력도 상승한다고 돼 있다. 아마 재료 정보를 내가 알고 있다면 더욱 쉽게 분간 할 수 있다……이런 내용 아닐까?
다음으로 넘겼다.
***
인고의 시간
고통을 힘으로 치환 할 수 있다.
사용 시, 모든 고통에서 면역이 되며 피해 량을 활력으로 대체 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모든 신체 능력이 상승하며 제한 시간이 종료되면 쌓아 두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체력에 비례하여 지속시간이 늘어난다.
기본, 10분. 체력 1당 10초의 시간이 증가한다.
***
맹약에 이어서 두 번째로 생긴 스킬이다.
앞의 것이 신성점수를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것은 전투에 관련된 것이다. 고통을 참아서 힘을 더 낸다. 무슨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묘한 스킬이다. 하지만 효과는 나름대로 쓸 만 한 구석이 있었다.
쿤의 경우 위기가 많다. 순간적인 싸움을 헤쳐 나갈 일도 종종 있고, 부상을 무릅쓰고 싸울 일도 충분히 생길 것이다. 그럴 때면 꽤 도움이 될 만 한 스킬이다.
다만, 후반의 설명이 조금 난감하다. 제한 시간이 종료되면 쌓아 두었던 고통이 밀려온다. 만약 전투가 치열하다면 끔찍한 일을 각오해야 할 거 같다.
“음.”
그 외는 딱히 전과 변한 점이 없다.
포인트도 일전에 사용한 이후로 60정도 밖에는 못 늘려서 다른 걸 키우기는 어렵다. 새로 생긴 스킬과 특기로 쿤이 위기에 대처 할 수 있을까?
쿤은 제국 황녀인 두 소녀와 함께 공화국 낯선 곳에 놓여 있다.
그의 생각대로 이는 간단하게 벗어 날 수 없는 일. 추가 추격대가 오거나 공화국 내의 동조자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닥친 위기를 벗어나, 두 소녀의 이모를 무사히 만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톡톡.
메모지 옆을 두드리며 생각을 해 봤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운동을 통해서 포인트를 벌 수 있고, 생성된. 그리고 생성될 만 한 일을 반복적으로 하여 특기를 만들 수 있다. 일전의 경험치 획득 건을 생각해 보면 타인에게 인정받을 만 한 일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당시에 일이 내 업무 능력에 관한 거였으니, 이를 확장해서 대입 할 수 있다.
따로 종이를 빼서 끼적였다.
일단, 쿤의 시간은 내가 벗어나는 순간 정지한다.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개척자가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는 영구하다고는 장담 할 수 없다. 시간에 어떤 법칙이 작용하는지 모르는 이상, 언제까지고 유지 될 거라 확답하는 건 어리석다.
즉,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들에는 매달릴 수 없다.
생활에 연결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특기 생성 같은 것. 어떤 일은 쉽게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나올 법 한데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정한 법칙이 있는 것 같지만 아직 명확하게는 모르겠다. 누적 경험치와 내 실습에 대한 연관관계가 있으리라고만 추정할 뿐이다.
찌익. 특기에 줄을 그었다.
“특기나 운동이나……”
그러고 보니 옆에 놓인 운동도 그게 그거였다.
100점으로 얻을 수 있는 건 하급의 특기들. 하지만 당장 그에게 도움이 될 만 한 게 있을까 싶다. 게다가 그 포인트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또 시간을 왕창 할애해야만 한다. 결국 특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과 비슷하다.
“끄응.”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남은 건 경험치에 대한 건데, 이건 더 어렵다. 내 이름에 대해서 인정을 받은 뒤 경험치가 증가했다는 말은 타인의 신용이나 명성에 대한 것. 앞의 둘 보다 조건이 더 까다롭다.
결국 당장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괜히 성질이 나서 머리를 박박 긁었다.
“후. 어쩔 수 없지.”
이대로 시간을 계속 지연하는 것은 불안하다.
다시 쿤으로 돌아가 상황을 확인 한 뒤, 다음 공물 타임에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스케줄을 살폈다.
서율이가 게이트를 사용하는 것은 이틀 뒤.
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작가의 말
챕터가 끝나고 쉬어가는 부분입니다.
가족 건은 일단락 지었습니다. 부족하다, 이상하다 등등 말씀이 있었지만, 이 이상 끌면 안 될 거 같아서 잘랐습니다.
다음 편 부터는 쿤이 등장하겠네요.
쿤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