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40화 (40/240)

미소와 함께 예약해 두었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고가의 장소라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봤을 것이다. 불어로 간판이 붙어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인터넷으로 뒤진 내용을 바탕으로 대충 추천 메뉴 등만을 익혀 두었다.

“아, 아빠 여기는……”

미소도 이런 식당은 어색한 모양이다.

그래도 그쪽 집안에 몸 걸치고 있으면 이래저래 고급의 것들은 손을 댔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다행인지 아닌지 입맛이 조금 썼다.

“어서 오세요. 예약을 하셨나요?”

“서 준경으로 했습니다.”

“……아, 여기 있군요. 안내하겠습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남자를 따라 안으로 이동했다.

우아한 내부 구조와 은은한 조명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재질이 뭔지 모를 바닥도 왠지 비싸 보인다. 단 둘이 얘기하기 좋은 개인 실로 들어갔다.

“주문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메뉴판에는 생소한 것들이 가득 쓰여 있었다. 회식이다 접대다 나름 경험이 있었지만, 이건 도무지 못 알아보겠다. 괜히 분위기 잡으며 쭉 훑은 뒤 미리 알아 온 걸 주문했다.

“미소야, 너도 괜찮지?”

“네, 네? 뭐……”

딱 보니 모르는 눈치다.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것으로 주문 한 뒤 도수가 낮은 와인도 시켰다. 속내를 토로하기에는 술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까.

이내, 남자가 물러나고 방 안에는 나와 미소만이 남았다.

“신기하니?”

“네……이게 다 뭔가 싶네요. 그리고 어색해요. 아빠는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런 사람이라. 그럼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니?”

“그냥 뭐……평범한. 아주 평범한 사람이요. 이런 건 아빠랑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 평범한 사람.

자식과 마누라 부양하기 위해서 몸도 돌보지 않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뿐이다. 술이 떡이 되어 들어와, 한심스러운 눈총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던 사람이다. 취미도 포기하고, 친구와의 술 한 잔에도 눈치를 살폈던 그럼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도 같은가?

“왜 어울리지 않다고 하는 거니? 아빠도 이렇게 멋을 낼 수 있고, 우리 미소 맛있는 거 사 줄 수 있단다.”

“돈이 어디서 난다고 그래요. 괜히 무리하시는 거죠?”

“걱정해주는 거니?”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엄마 때문에 그러는 거 다 알아요. 홧김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거죠? 아까 그 외제차도 빌린 거고.”

웃음이 나왔다.

미소 엄마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리한다.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겠지. 평범하던 아빠가 갑자기 어디서 돈이 나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겠는가. 불쌍하게 보는 게 보통이다.

“깨어나고 많이 것들이 변해 있더라.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믿었던 이들은 모두 내 곁에 없더구나.”

“아빠 그건……”

“평생 동안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 왔단다. 몸살에 걸려서 빌빌 거릴 때도, 회사에 나갔고, 술병이 돌았을 때도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지. 가족. 그리고 네가 잘 되기를 바랐을 뿐이란다.”

“알아요. 나도 알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어요.”

“네 엄마 말이니?”

“……!!”

미소의 몸이 덜컥, 하며 흔들렸다.

불안한 눈동자를 나를 바라봤다. 내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 못 한 모양이다. 톡톡.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나도 알아봤단다. 설마 이 아빠가 망한 인생이라 생각하며 그냥 물러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니?”

“아빠……”

“이 아빠는 말이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단다. 돈 벌어오고 구박에 입 닫는 ATM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바라는 것을 쟁취 할 수 있는 사람. 2년 반이라는 세월 끝에 일어났더니, 가족을 앗아가고 그런 각오를 주었더구나.”

조명에 미소의 얼굴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었을 것이다. 하지만 좋다.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는 안 된다. 미소가 모든 걸 의탁 할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리고 운도 조금 따랐지. 아마 하늘이 불쌍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마음 좋은 사람을 만나서 기회를 얻고, 돈도 조금 벌 수 있었단다. 이 옷과 타고 온 차. 모두 아빠 꺼야. 빌리거나 훔친 건 하나도 없단다.”

“하, 하지만 어떻게?”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란다. 이 아빠가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거야. 네 엄마의 사정에 그냥 입 닫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더 이상은 아니라는 말이지.”

툭. 벽에 등을 기댔다.

미소의 모습이 눈 아래로 들어왔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변한 내 모습과 제 어미에 대한 이야기. 생각이 어지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미소가 생각이 굳기 전에 확실히 몰아쳐서 속내를 털고, 내게 기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말 해 보렴. 네 엄마가 무슨 말로 널 잡아 둔 거니?”

“어, 엄마는……”

똑똑―!

막 미소가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내 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들어왔다.

주문한 음식이다. 내가 시킨 거지만 들어온 타이밍이 공교롭다. 살짝 울컥해서는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세팅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렸다. 여전히 미소의 얼굴은 복잡했다.

“즐거운 시간되시기를.”

사람이 빠져나가고,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헝클어졌다. 바로 잡기 위해서 조금의 수가 필요 할 거 같다. 와인의 마개를 딴 뒤 미소와 내 잔에 조금씩 나눠 따랐다.

“마시렴.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

“네……”

목이 탔는지 거부하지 않았다.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몇 모금 넘겼다. 물론, 나 말고 미소 말이다. 운전해서 돌아가야 하는데,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푸후. 아빠. 엄마에 대한 거……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한 잔을 모두 비워냈을 때, 미소가 입을 열었다.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술이 약했나? 그러고 보니, 부녀간에 술 한 잔 해 본 기억도 없구나.

“탐정을 고용해서 조사를 했다.”

“타, 탐정이요?”

“터놓고 말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 아빠가 할 수 있는 수는 그것밖에 없더구나. 다행히 재주 좋은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

“죄송해요……아빠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미소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분위기와 술. 그리고 특기의 영향인가 보다. 손수건을 뽑아 눈물을 닦아 줬다. 그녀가 훌쩍이다 나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가 그랬어요. 아빠는 혼자서도 살 수 있지만, 엄마는 그렇지 못하다고. 아빠가 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냥 잘 지낸다고 말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다른 말은 안 했니?”

“……돈 이야기를 했어요.”

“돈? 어떤 돈?”

“우리 집이 진 빚. 다 갚으려면 지금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잘 보여야 빚 얘기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탐정과 내가 한 생각이 맞았다. 장인 쪽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 돈을 빌린 것이다. 그리고 그 담보로 미소를 묶어 두었다. 이게 자식을 판 게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인가? 어떤 엄마가 이럴 수 있나 싶다.

“나는……아빠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쪽 집에서 싫어한다고. 괜히 그러다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가족이 전부 밖으로 나앉을 수 있다고 못 박았어요. 아빠야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으니, 그냥 이렇게 있자면서……”

“그래, 그래. 그랬구나.”

훌쩍이는 미소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이 어린 애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엄마가 당장 죽겠다고 난리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랐을 것이다. 평소 보아온 아빠는 그래도 밖에서 돈 벌어서 잘 살고 있으니 괜찮겠다, 여긴 거겠지.

눈물을 닦고 나이프를 들어 손에 쥐어 주었다.

“일단 좀 먹자꾸나. 식으면 맛없어 지잖아.”

“훌쩍. 아빠는……내가 안 미워요?”

“아빠가 우리 미소를 미워 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때 그렇게 말 하고……그 뒤로는 찾아가지도 않았잖아요.”

“미소야.”

다시 울컥하는 미소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붉어진 눈이 심장에 박혔다.

“아빠는 세상 모든 사람을 미워해도 미소만큼은 그러지 않아.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딸을 내가 어떻게 미워하겠어. 그저 우리 미소가 정말로 아빠를 싫어하지 않았구나……라는 답을 찾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

“나도! 아빠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고……”

반사적으로 외치다, 뒷말이 줄어들었다.

이건 특기의 영향일까? 아니,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소도 나도. 둘 모두 속에 담긴 이야기를 훌훌 털어내고 있었다.

잠시 서로를 보다 픽 하고 웃었다.

“이거 맛있어요.”

미소가 앞에 나온 이름도 잘 모르는 고기를 들어 보였다.

참 맛나 보인다.

“먹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이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

준비 된 요리를 먹으며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미소 엄마와 빚에 대한 건 뒤로 물렸다. 대신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묻고 비어있는 시간의 공백을 메워갔다.

“아빠, 정말로 많이 바뀌었어요.”

“이상하니?”

“아니, 아뇨! 완전 멋있어요. 훨씬 젊어 보이고……진즉에 그렇게 하지 그랬어요.”

“그러게 말이다. 미소 앞에서 멋 좀 뽐내 볼 걸 그랬어.”

마주 웃었다.

고급의 양복과 외제차는 어쩔 수 없다지만, 신경을 썼다면 지금 이런 자리 정도는 마련 할 수 있었지 않을까. 미소에게 부족했던 아빠인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후회보다는 다짐을 한다. 이제부터 더 놓은 아빠가 되겠다고.

“근데, 아빠. 엄마랑은 이제 완전히 갈라 선 거예요……?”

미소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됐다. 네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더구나.”

“그렇구나……”

“그보다 미소야. 네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잇다.”

“뭔데요?”

와인 잔 너머로 보이는 미소의 얼굴이 붉다.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떼었다.

“지금 네 결혼생활 말이다. 괜찮은 거니?”

“……”

조심스레 물었지만, 역시 달가운 주제는 아니었다.

미소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아빠한테 솔직하게 말 해 보렴. 솔직히 어떻게 되고 있니?”

“……아주 나쁜 건 아니에요. 그 사람과는 솔직히 제대로 마주 친 적도 없고, 그냥 남의 집에서 세들어 사는 느낌이니까요. 어색한 것들 투성이지만, 그럭저럭 적응을 해 나가고 있어요.”

“하지만 네가 바라는 삶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어쩔 수 없어요. 내가 참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당장 빚 갚을 돈도 없고, 엄마를 모른 척 하고 도망 칠 수도 없잖아요.”

효심이 깊다고 해야겠지만, 도움은 안 된다.

흐려지는 눈동자를 살피며 다시 말했다.

“아빠가 해결 해 줄 테니까 일단 오지 않을래?”

“……응? 무슨 소리에요?”

“네가 걱정하는 건 다 알고 있어. 아빠가 알아서 해결 해 줄 테니, 그 집에 있지 말고 일단 나와.”

“무슨 소리에요……엄마가 그랬는데, 빚이 어마어마하다고 그랬어요. 그걸 무슨 수로 아빠가 감당해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도 싫어요. 나만 좀 참고 살면 되는데, 아빠가 고생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미소 엄마가 한 짓을 털어놓을까 하다가 참았다.

악독한 심성을 보여주면 미소도 학을 떼겠지만, 그 만큼 충격인 것도 없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그런 모습가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감당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자, 보렴.”

핸드폰을 꺼내서 계좌를 보여주었다.

11억이 넘는 금액이 찍혀 있다. 미소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손으로 막았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눈동자가 도무지 못 믿는 분위기다.

“불법적으로 얻은 돈 아니니 걱정하지 마. 정말로 하늘이 도운 거지. 이 돈이면 네 엄마 빚이든 뭐든 다 갚을 수 있어.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 마렴. 이제 겨우 스물을 넘었는데 미팅도 하고 그래야지. 안 그러니?”

“하, 하지만……”

“이 아빠는 미소가 행복해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사람을 치고 돈으로 막는 집안이야. 그런 곳에 널 그냥 둘 수는 없어.”

단호하게 말을 했다.

미소 엄마의 돈을 갚아 줄 생각은 밥 한 톨만큼도 없지만, 지금은 일단 미소 마음을 돌려놓는 게 중요했다.

강한 어조가 통했는지 그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와인 잔을 손가락을 놀리며 고민하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엄마가……찬성 할까요?”

불안한 눈빛이다.

미소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다. 엄마라 부르는 여자가 단순히 빚 때문에 이 생활을 고집하고 있는 게 아님을.

하지만 미소가 걱정 할 문제는 아니다.

이를 바로잡고, 연을 떼어내는 건 내 역할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어조로 답을 했다.

“걱정 마렴. 반드시 찬성 할 테니까.”

지금의 것은 마치 쿤과 같았다.

※작가의 말

딸과의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가네요.

그보다 전편에 예상하지 못한 댓글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역시 사람은 다양하고 반응도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재밌게 보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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