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39화 (39/240)

탐정이 조사한 내용에는 미소의 수강 시간표도 들어 있었다.

시간을 살피니 마지막 강의시간은 저녁 6시.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머리를 식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주차 해 둔 차에 올라 탄 뒤 무작정 밖으로 나와 한 동안 도로를 달렸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부글거리던 속도 진정이 되었다. 지금은 이 정도가 좋다. 분노는 가슴 깊숙이. 머리는 냉정하게. 당장 아내였던 여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는것보다 급한 일이 있다. 일단은 무슨 수작 부리기 전에 미소와 담판을 짓고 상황을 손에 넣는 게 중요하다.

“어서 오세요.”

“옷 좀 사러 왔습니다.”

가는 길에 양복점에 들렸다.

고가의 브랜드다. 과거 같았으면 눈길도 안 주었을 곳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허리를 굽혀 반겨 주었다.

“어떤 걸 찾으시는지……?”

내 행색은 브랜드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직원은 허투루 이를 티내지 않았다. 마음에 든다. 치수를 불러주고 색에 맞춰 몇 벌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내 나이대의 사람에게 양복은 명함과도 같다. 차나 시계와 마찬가지로 암암리에 수준을 재는 척도 중 하나이다. 미소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설득을 하기 위해서는 내 모습을 그럴듯하게 꾸밀 필요가 있었다.

“계산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일시불로 해 주세요.”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하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한 벌을 뽑아서 그대로 갈아입었다. 고루한 중년 남성이 그럴듯한 사업가로 변신을 했다. 하지만 역시 부족함이 보인다. 일단 머리. 단정하지 못한 모양새가 집에서 갓 뛰어나온 느낌을 준다. 차분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

입구에서 서성이는 직원에게 물었다.

“근처에 숍이 있습니까?”

“숍? 헤어숍 말입니까?”

“네. 이왕이면 좋은 곳으로.”

조금 의외의 질문이었을까, 직원이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한 곳을 알려 주었다. 꽤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연예인도 종종 들린다고 자랑을 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고맙다고 말을 해 준 뒤 가게를 벗어났다.

주차해 둔 레인지로버 앞에 섰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급 양복을 입은 남자가 고가의 외제차 앞에 서 있는 모양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하다. 시기와 질투의 눈빛도 느낄 수 있다. 참 웃긴 일이다.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겉포장 조금 바꾸었다고 이렇게 평가가 달라지나 싶다.

하긴, 나도 그 점을 이용하려는 거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고 점원이 알려준 숍으로 이동했다.

척 봐도 바가지 10단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서비스가 필요하다. 혹시 예약제인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설명 한 뒤 스타일링을 부탁했다.

“사업차 누굴 만나는 모양이죠?”

그렇게 보였나?

“아닙니다. 오랜만에 딸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서요.”

“어머, 어머. 가정적인 남자.”

“진짜 멋진 신사 분이시네. 오늘 실력 발휘 좀 해야겠다.”

여성적인 말투의 남자가 다가와서는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나이 먹고 물건도 안서는 그냥 그런 중년이지만 다행히 머리숱은 괜찮다. 슥슥 잘라내기 시작하자 덥수룩하던 스타일이 금세 정리가 되었다. 귀 옆으로 지저분하게 튀어나온 것은 깔끔하게 잘라내고, 붕 뜨는 윗머리는 제품으로 다듬었다.

30분 정도를 앉아 있었을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전날의 내가 아니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싶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에 얼굴에는 뭘 발랐는지 윤이 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만이 아니라 화장품도 좀 발라 준 거 같다. 평소 바르던 스킨이나 로션이 아니라서 그런지 피부도 탱탱해 보였다.

“어머, 어머. 꾸미니까 사람이 태난다, 야.”

“와. 그러게요. 한 10년은 젊어 보이는데요?”

“몸도 좋은 거 같고. 밖에 나가면 총각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어느새 모여든 여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딸아이를 보러 가는 길이라 말 한 것이 무언가를 자극 한 모양이다. 다들 적극적으로 와서는 나를 도와주었다.

“잠깐만 있어 봐요.”

그러다, 내 머리를 만진 남자가 구석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꺼내 왔다.

안경이었다. 눈은 꽤나 좋은 편이라 평소에 쓰고 다니는 건 없었다. 필요 없다 거부하려 하자, 그가 한 발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선이 날카로워서 안경을 쓰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한 번 써 보세요.”

“음……”

단순히 미용 때문이었나?

건네는 안경을 받아 써 봤다. 도수는 없었다. 확실히 남자의 말 대로 인상이 부드러워 져 있었다. 입을 씰룩이며 표정을 연습 해 봤다. 미소가 보고 안심 할 수 있는 얼굴을 만들고 싶었다.

“킥. 얼굴이 그게 뭐에요.”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해 봐요.”

뒤에서 한참이나 웃었다.

그렇게 이상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울에 있는 사람이 괜찮다 생각이 들 정도로 연습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그럭저럭 어색하지 않은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짧게 보면 대학의 교수. 길게 보면 여유로운 사업가처럼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마음에 든다.

“얼마입니까? 안경도 같이 사고 싶군요.”

“후후. 안경은 서비스로 가져가세요. 따님과 좋은 시간 보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드리는 물건이랍니다.”

“으음.”

“부담가지지 마시고, 종종 놀러 오시면 됩니다.”

하긴, 안경 하나 보다는 단골이 이득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명함을 받아 넣으며 계산을 했다.

“살펴 가세요~”

“또 오세요!”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점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숍을 벗어났다.

문자로 날아온 명세서를 보니 30만원이었다. 안경 값 안 받을 만 했다.

#

심호흡을 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오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살피며 최대한 평범한 생각을 하려고 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은 일단 뒤로. 지금은 미소를 만나는 것에만 집중을 하고 싶었다.

[애향관]

내가 기다리는 건물 이름이다.

입학식 때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입구 쪽 계단에 서서 미소를 기다렸다.

양복을 빼 입은 남자가 멀끔히 서 있으니 튀는 모양이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그래도 차려입은 게 도움이 되는지 시선들이 나쁘지는 않다. 사람은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 오늘은 하루종이 그것을 체감하고 있다.

“후아아. 오늘 강의 너무 길다. 좀 일찍 끝내 주시지.”

“아서라. 연장하면 연장했지, 일찍 끝내 주실까.”

“으으. 학구열은 우리가 불태워야 하는데 말이지.”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향관에서 있던 강의가 끝난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탐정이 조사 한 강의시간과 딱 맞았다. 흐트러진 곳 없나, 옷을 매만지고는 나오는 학생들을 하나씩 눈으로 살폈다.

전부 파릇파릇하고 생동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나는 과거에 어땠을까. 저 나이 대에는 저렇게 빛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을까? 괜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옅게 화장 한 미소가 친구로 보이는 여성 둘과 건물 안쪽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와! 미소, 네 아버지?”

“진짜? 대박. 완전 젊으신데?”

두 친구의 말소리를 무시 한 채 미소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이 동그란 것이 꽤 놀란 모양이다. 그 날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빠……맞죠?”

“응. 미소야, 아빠다.”

“그, 옷도 그렇고 뭔가……”

달라진 곳이 너무 많으니 한 번에 집지를 못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위 아래로 시선을 훑었다. 좋은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과거의 내 모습과 다른 것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다.

“와아~! 미소 아버님!? 반가워요! 미소 친구 세주라고 해요!”

“저는 안 소유라고 합니다.”

조금 쳐져있던 두 친구가 냉큼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엑스트라는 저리 가라고 축객령을 내리고 싶지만, 그래도 미소의 친구다. 저 나이대의 여자는 친구에 민감 할 때. 웃는 얼굴을 만든 뒤 하나씩 인사를 받아 주었다. ‘미소가 멋져요!’, ‘삼촌! 아니, 오빠 같아요!’ 라며 재미있는 말을 건네 왔다.

“자, 잠깐만요. 아빠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무슨 일이기는 우리 미소 보러 왔지.”

“하, 하지만……”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자. 아직 밥 안 먹었지? 근처에 예약을 해 두었으니 가자.”

부드럽고 여유롭게.

미소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다. 구겨진 와이셔츠에 색 바랜 양복. 헝클어진 머리에 푸석한 피부. 평소 보던 아빠의 모습과는 차이가 심하니, 아마 단번에 적응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내가 노리는 부분이다.

“저기요, 저희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야야! 실례야! 넌 애가 무슨……”

“에이 뭐 어때. 이럴 때 아니면 미소 아버님을 우리가 언제 만나 보겠어! 가족 얘기는 하나도 안 하더니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서 그랬구나! 요런 앙큼쟁이.”

그러면서 실실 웃는 모양새가, 이 정도 얘기했으면 좀 사시죠? 라는 분위기다. 상황만 아니었다면 나도 넉넉히 받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미소와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 3자를 받아 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아쉽지만 두 아가씨와는 다음에 해야 할 거 같군요. 오늘은 미소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종종 찾아 올 테니, 기회가 되면 근사하게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헤헤. 그나저나 매너도 좋고 멋지네요!”

“아이 참. 세주야, 실례라니까. 미소 아버님 죄송해요. 애가 이래 봐도 착해요. 대신 사과드릴게요.”

“괜찮아요. 미소와 친하게 지내주니 고맙다고 해야죠.”

둘은 이 정도면 충분히 봉합이 됐다.

다시 시선을 미소에게 돌렸다. 그 사이 많이 진정 된 건지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내가 내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딱 교차했다.

“저녁. 괜찮지?”

“……네.”

일단은 이것으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의 말

일단 미소부터...

댓글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기 조심하세요. 전 된통 걸려서 상태가 영 메롱이네요 ㄷㄷ;

답댓은 좀 쉬고나서 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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