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에 없던 스케줄은 반나절이 지날 즈음 끝이 났다.
게이트를 통해서 수확한 물건이 넘어오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번 차에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스케줄이 정해져 있을 때는 군의 높은 분들이 와서 일일이 확인하니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 한다.
어쨌든 그렇게 스케줄을 마친 뒤 소향이 부탁하는 잔업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태연하게 답하며 사람들을 보낸 것과 다르게 속은 급했다. 남은 포인트를 모두 채워야 화술을 승급시킬 수 있고, 미소의 속내를 들을 기회가 생길 것이다.
부족 포인트와 내가 해야 할 운동 분량.
정리 된 차트에 데이터를 집어넣어 출력을 해 봤다. 일과를 제외하고 잠을 최대로 줄여서 움직인다면 일주일 안쪽으로 끊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제는 맹약으로 포인트를 버는 것도 익숙해 졌으니 그보다 짧을 수도 있다.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억지로 누워 양을 세며 하루를 보냈다. 날이 밝고 해가 슬금슬금 올라오자 바로 옷을 챙겨 체육관으로 향했다. 관장이 술이 덜 깬 얼굴로 반겨 주었다.
“이 시간부터 운동을 하러 왔수?”
대충 답을 하고는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였다.
줄넘기를 하고, 샌드백을 치고 복근 운동을 했다. 지루하고 힘들다. 온 몸이 삐걱거리며 울었다. 쿤의 회복력과 반지의 마법이 없었다면 이렇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미소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악 물고 버텼다.
포인트가 차곡차곡 쌓였다.
늘어나는 근력과 요령에 따라 운동 횟수를 조절해야 했다. 실력이 좋아지는 만큼 횟수를 늘리지 않으면 가치가 하락했다. 관장은 이런 나를 보고 운동에 미친놈이라 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 양반이 새벽부터 체육관에 와서 미친 듯이 운동만 하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단언하건대, 보통 사람. 아니, 어지간히 운동깨나 한 사람도 할 수 없는 스케줄을 완료했을 때는 쿤에서 벗어나고 4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포인트는 모두 확보하였고 몸은 돌덩어리가 돼 있었다. 사람이 단기간에 이 정도로 운동을 하면 몸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싶었다. 거울 보며 콕콕 눌러보면 손가락이 튕겨 나왔다.
“고백.”
그리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특기를 승급시켰다.
하급 화술의 옆으로 작대기가 그어지고 고백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이러면 중급 화술로는 승급을 아예 못하나 싶었지만, 지금은 확인 할 방법이 없었다.
됐다. 미소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단은 완성 되었다. 필요 한 건 그럴싸한 겉모습과 부족분을 채워 줄 정보. 서율이가 소개한 사립 탐정은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돈은 부쳤는데, 혹시 먹고 도망간 건 아닐까 근근이 걱정을 하곤 했다.
우우우웅. 우웅.
하지만 가끔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흘러가곤 한다.
특기, 고백을 얻은 채 누워있던 내 배 위에서 핸드폰이 울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집어 이름을 살펴보니 [탐정]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며칠 만에 만남 탐정은 꽤 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동안 놀지 않았다는 증거라도 되는 거 같다. 힘없는 자세로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책상 앞 의자를 가리켰다.
“후우. 한 대 피시겠수?”
“사양하겠습니다.”
“거, 꽤나 건강 챙기나 봅니다. 못 보던 사이에 혈색도 좋아진 거 같고.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먹읍시다.”
“일만 잘 해 주시면 거하게 한 상 쏘죠.”
“그 말 기억합니다.”
툭툭. 그는 담배를 털어 뜬 뒤 책상 앞쪽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래쪽 서랍을 열어 노란 색 봉투를 꺼냈다. 꽤 두툼하다. 책상위로 올려서 개봉을 했다. 사진과 서류들이 잔뜩 나왔다.
“어떤 게 좋겠습니까? 간략하게, 자세하게.”
“자세하게 부탁합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진 한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리으리해 보이는 저택 앞쪽으로 미소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어딘가 조금 어두워 보이는 인상.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현재 미소 양이 살고 있는 저택입니다. L그룹 일가도 상당수가 이곳에 살고 있죠.”
“으음.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보다 앞서서, 이것부터.”
그가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미소와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었다. 큰 키에 제법 잘 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표정이 조금 거칠고 행색이 단정하지 못했다. 목 위로 문신도 얼핏 보이고, 귀에 피어 싱이 여럿 보였다.
이 사람이 미소의 남편? 가슴이 답답했다.
“차 준혁입니다. 차 남혁의 동생이죠. 형과는 달리 집에서 거의 내 놓은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 미소가 결혼 한 사람이?”
“네. 바로 차 준혁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살 수 있었는데, 듣자하니 당시 차 준혁이 꽤나 막 나갔다고 하더군요. 여자라도 하나 붙여 결혼을 시키면 정착 할 거라 생각하고 그 때의 일을 처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딱히 효과가 있는 거 같지는 않군요. 여전히 밖으로 나도는 모양입니다.”
“저런 양아치 새끼가 미소를……!”
우드득. 팔걸이를 세게 쥐었더니 손 모양으로 우그러졌다.
나무로 만들어진 손잡이다. 오래 된 것이지만 단순히 힘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탐정이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그제야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손을 풀었다. 부서진 파편이 손 아래로 떨어졌다.
“크, 크흠. 힘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계속 얘기 할 테니, 조금 진정하시죠.”
“……실례했습니다. 계속 하시죠.”
목 언저리를 당기며 속을 진정 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사진 속 남자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걱정하는 부분을 알고 있으니, 그 점 부터 짚고 넘어가도록 하죠. 준경 씨가 말 한 이 양아치. 놀랍게도 미소 양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거 같더군요.”
“……네?”
“결혼은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진척됐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아해서 몇 번이나 검증을 해 봤지만 결과는 같더군요. 미소 양과 차 준혁 씨는 이름만 부부일 뿐입니다.”
무언가 툭하고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뿐인 딸이다. 굳이 머릿속으로 떠올리지 않았을 뿐, 그런 걱정을 안 했을 리 없다. 혹시. 만약. 이런 단어를 붙이며 뒤척이기를 여러 날이었다. 하지만 탐정이 확인시켜 주기를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무겁던 짐이 하나 덜어지는 것 같았다.
“다만, 저택 내부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좋은 건 아니더군요. 기본 가사야 어차피 일 하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나름대로의 소스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다른 식구들에게 이래저래 구박을 받는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무시하고 깔보기는 일쑤고, 돈을 노린 수작질로 여기는 이도 상당합니다. 게다가 어쩌다 미소 양 또래라도 들릴 때면 듣기 싫은 말도 감내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까득. 까득. 뼈대만 남은 팔걸이가 비명을 질렀다.
진정하자, 준경아. 여기서 화내면 너만 멍청한 놈이다.
깊이 숨을 내쉬며 가슴을 속을 진정시켰다.
탐정이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 정도입니다. 본래 있던 학교도 계속 다니는 거 같고, 정도 이상의 학대나 폭행의 증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은 이름 있는 재벌가라고 지나친 행동은 안 하는 모양입니다.”
“폭력이 반드시 육체적인 것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만……”
“됐습니다. 다른 내용은 더 없습니까?”
여린 아이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아빠는 식물인간이 돼서 병원에 누워있고 살던 환경은 완전이 180도로 바뀌어 버렸다. 입는 옷, 먹는 음식, 보는 것들까지 모두. 그런 삶 속에서 어떤 외로움과 좌절감. 공포를 느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그런 와중에 엄마라는 인간은 대체 뭘……
“준경 씨 아내분에 대한 겁니다.”
“미소 엄마 말입니까?”
생각을 읽은 듯, 탐정이 말을 걸어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앞으로 몸을 조금 숙였다. 미소에 대한 것만큼 이것도 듣고 싶었던 내용이다. 귀를 활짝 열어 두었다,
“일을 의뢰받고 인맥을 동원해서 사건 당시의 내용을 추리해 봤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더군요. 당시 지급받은 보험금과 L그룹과 합의하여 타 낸 합의금. 준경 씨가 누워있던 기간에 생활비와 학비가 소모된다 하여도 그 시간동안 탕진 될 금액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탕진? 탕진이라고 했습니까? 지금도 미소 엄마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 전혀 몰랐군요? 지인을 통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준경 씨 아내 분의 명의로 된 계좌에는 고작 천만 원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병원에서 깨어나고 난 뒤 얼마 남지 않은 잔고와 오래된 아파트 하나만을 받은 채 침묵했던 이유는 미소 때문이다. 적어도 미소의 엄마니, 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신경 좀 써 주고 학비나 용돈에 보탬을 할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좌에 남은 돈이 천만 원이라. 남은 건 그럼 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혹시 장인 되시는 분이 어떤 일을 하는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장인어른 말입니까? 예전에는 포목점을 하셨고, 지금은 작은 사업 하나 하는 걸로 압니다만. 갑자기 그 분은 왜?”
“사고 나기 전, 아내 분께 듣기로 사업은 잘 되고 있다 했겠죠?”
“그렇습니다만……설마 아니었던 겁니까?”
그는 답 대신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장인어른의 이름이 적힌 서류였다. 운영하던 사업체의 재무 상태와 개인 계좌 내역. 복잡한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천천히 살폈다. [정리의 달인] 효과가 발동하며 난잡한 숫자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것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골자는 사업의 자본금과 개인 계좌에 둔 여윳돈.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둘 모두 바닥을 보였다.
“이건 사고가 나기 전 아닙니까?”
“맞습니다. 찾아보니 이렇게 나오더군요. 준경 씨의 장인 분은 사업이 도산하여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체면 탓인지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리고 그 뒤로 얼마 안지나 사고가 발생합니다.”
“잠깐, 설마……”
“네. 이것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죠.”
그가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숫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본 경험이 있는지라 빠르게 핵심을 짚어 낼 수 있었다.
“합의금으로 들어온 돈이 모두 장인어른에게로 흘러들어 갔군요.”
“어디부터 어디까지라 명확하게 긋기는 어렵지만, 아마 가지고 있던 돈과 합쳐서 전부 사용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아내를 믿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납득했을 뿐이다. 힘든 거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내 병간호 하면서 길고 지루한 소송에 시달리느니, 그냥 합의 보고 모두가 좋은 쪽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적어도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결과는 어떠한가?
이건 최소한의 도의조차 저버린 행동이다. 어떻게 그런 일을 나한테 한 마디 안 할 수가 있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더 있다는 말입니까?”
“당시 흘러간 돈으로도 빚을 모두 갚지 못했으니까요.”
“그럼 남은 돈은 어디서 매웠습니까? 설마 미소를 담보로 해서 L그룹의 돈을 빌린 건 아니겠죠?”
탐정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콱 막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그래서 미소를 말린 거였나? 내가 중간에 개입돼서 결혼을 파토내면 빌렸던 돈이 목을 죄여 올 까봐?
한때마나 사랑했던 여자가 이런 족속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았다.
“후우. 후우.”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진정하려 애썼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안간힘을 쓰며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분노는 모았다 나중에 터뜨려도 좋다. 지금은 참자.
“허면. 미소가 사정 밝히기를 꺼려하는 것도 그 탓입니까?”
“아마도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진 빚이 많은 만큼, 따님 분이 떠나 버리면 그걸 다 떠안게 될 확률이 높죠. 지금의 생활 습관을 보면……절대로 감당 할 수 없을 거 같군요.”
책상위의 사진을 밀어서 아내를 찾았다.
백화점, 고급 레스토랑, 호텔 등. 돈을 물 쓰든 쓰고 다니는 모습이 이곳저곳에 찍혀 있다. 딸을 담보로 돈을 빌렸음에도 갚겠다는 생각은 없고,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일단 제가 알아 온 내용의 골자는 여기까지 입니다. 차준혁에 대한 상세 정보와, 미소의 평소 모습은 안쪽에 따로 정리를 해 두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휴. 본래 이 일이라는 게 사람 더러운 꼴 많이 보는 거지만, 그 여자. 어지간하더군요. 듣자하니 이혼을 했다고 하던데, 잘 선택 했습니다.”
“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딸아이를 그 집구석에서 빼 오는 게 중요하죠.”
“따님 분의 동의가 있다면 이혼소송을 진행하면 되겠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잘 굴러갈지 의문이군요. 게다가 아내 분도 가만히 있을 거 같지 않고.”
“어떻게든 해야죠. L그룹이고 뭐고 간에 내 딸을 내가 찾는데 방해를 한다면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아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한 때의 인연은 완전히 잘라냈습니다.”
“……그렇군요.”
탐정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나름대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지만, 그게 잘 된다고 장담 하기는 어렵다. 손으로 입매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탐정이 시선이 따라왔다.
“남은 금액은 바로 입금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소송을 하든 전쟁을 하든, 일단 딸아이부터 그곳에서 빼내 올 생각입니다.”
“따라오겠습니까?”
“오겠죠. 아니, 오게 하겠습니다.”
그러려고 지난 며칠간 죽어라 운동을 한 거니까.
쓰린 속만을 부여잡은 채, 몸을 돌렸다.
한 가닥 남아있던 과거의 인연조차 잘라버린 하루였다.
※작가의 말
오늘은 조금 급히 올렸는데...
오타 있으면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