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당!
다급하게 열리는 문에 라라와 루루가 깜짝 놀라서는 홑이불로 몸을 가렸다.
“베, 벨포드 씨?”
“깜짝 놀랐잖아요!”
놀란 얼굴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려 할 겨를이 없었다. 쿤이 그녀들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둘. 솔직하게 말 해.”
“뭐, 뭔데요?”
“갑자기 왜 그래요. 무서워요……”
다급한 태도에 둘이 겁먹은 얼굴을 했다.
쿤이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너희 둘 말이야. 제국의 황녀인건……아니지?”
일단은 부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정황이 딱 맞아 떨어져도 제국의 황녀와 엮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쿤은 제국에게 쫒기는 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적중당할 확률도 안 될 것이다.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하지만 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쿤의 기대를 배신했다.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거 같아 그가 잠시 휘청거렸다. 턱. 침대 옆 화장대를 손으로 짚은 채 간신히 견뎠다. 생각하던 것보다 충격이 더 컸다.
“아니, 그러니까 너희가 정말로 제국 황제의 손녀이자……공화국 공왕의 딸이라 이거야?”
“라라 언니, 맞는 거지?”
“응. 맞는 거 같아.”
맞는 거 같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인적사항을 서로에게 물으며 확인하는 모습에 쿤이 미간을 좁혔다.
“사실 루루랑 제가 그 사실을 안 건 얼마 안 됐거든요.”
표정을 읽었는지, 라라가 부연 설명을 해 왔다.
사실은 안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야기. 쿤이 혼탁한 머리를 툭툭 쳐 정리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전까지는 어떻게 알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전에 부친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나? 양부가 있었던 건가?”
“네. 저희 둘은 지금까지 루니 백작님 아래에서 양녀로 지내왔어요. 어릴 적부터 입양 돼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황가와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지금은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에는 꽤 혼란스러웠답니다.”
루니 백작이라면 쿤도 아는 이름이다.
무왕(武王) 루니. 그의 무력과 무공을 기려서 세간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그 루니 백작은 제국의 황제가 친정을 할 때 항상 대동하는 오른팔과 같은 인물이다. 라라와 루루가 황제의 외손녀라면 성장 할 때 까지 맡기기에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성년이 되어 진실을 알려주기 전까지는 숨겨서 키웠다는 말이군.’
앞뒤가 맞아 떨어지니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말인즉슨, 눈앞에 있는 순진 덩어리 둘이 정말로 제국의 황녀라는 말이다. 남작이나 자작은 아니라 여겼다. 잘하면 백작. 어쩌면 공작가의 여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황가의 혈통이라니! 이런 건 결단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쿤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혹시 그 사실이 문제가 되는 건가요?”
“왜요? 뭐가 문제인데요?”
이걸 질문이라고 하는 걸까.
쿤이 울컥해서 마빡을 한 대 씩 때려주려다, 간신히 호흡을 진정하고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냉정한 사고는 이럴 때 정말로 도움이 되는 특기였다. 심박수가 가라앉는 걸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녀를 납치하려는 시도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귀족과의 암투 정도와는 다루는 이야기의 규모가 달라. 공화국에 도착했다고 안심 할 수도 없거니와, 무사히 너희 이모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지 장담하기도 어려워. 그리고 도착 한다고 해도……과연 그게 끝일까? 제국 황제에게 등 돌릴 각오까지 선 사람들이다. 어떤 일이 일어 날 지 가늠하기 어렵다.”
“우, 우리 위험한 건가요?”
“어떻게 해요?”
비 맞은 병아리마냥 두 소녀가 쿤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거리는 눈동자가 거슬린다. 동정심에 앞서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두 소녀가 제국의 황녀라면 그냥 버리고 도망가는 걸로 일이 매듭 되지 않는다.
쿤 자신이 목격자인 것이다.
황제에 반기를 드는 시도를 누군가 봤다. 그런데 그 사람을 그냥 살려 두겠는가? 결단코 아니다. 일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추격해서 목을 따려 할 것이 분명하다. 일개 귀족가라면 유야무야 넘어 갈 수 있겠지만, 이번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미치겠네.’
엮여도 어떻게 이런 일에 엮였는지 모르겠다.
서 준경 신께서는 분명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서 ‘하급 행운’까지 내려주지 않았나? 이걸 행운이라 부를 수 있나? 제국 황녀와 엮이는 일이!?
“베, 벨포드 씨. 조용히 있을게요. 불편하다고 투정도 안 부릴 게요. 도와주시면 안 돼요?”
그때, 라라가 갑자기 손을 잡으며 간곡한 어투로 말을 붙여왔다.
그녀는 루루보다는 눈치가 빠르다. 쿤이 갈등하고 있음을 알아 챈 것이다. 생전 처음 와 보는(그녀들 기억에서는) 공화국에서 단 둘만 남겨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도, 도와주세요. 투정 안 부릴게요. 그냥 막 자라는 데서 잘게요!”
잽싸게 루루도 말을 덧붙였다.
언니 따라 쿤의 소매를 잡고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애원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있으면 위험 하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쿤이 잠시 바라보다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잡은 손을 떼어 낸 뒤 짧게 말 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발 빼기는 늦었다. 너희를 돕는 건 둘째 치고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목적지까지 가야겠어.”
두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동정? 일 그람 정도는 들어 있을 것이다. 쿤은 냉혹한 살인마는 아니지만 자신의 목숨 위에 다른 걸 쉽게 올리는 인물이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방법이 없다. 지금 두 소녀를 두고 도망가는 건 근시안적인 행동일 뿐이다. 두 소녀를 노리는 무리가 목적을 완수하면 뒤처리를 위해 쿤 자신을 잡으러 올 터. 제국의 정찰병이 쫒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위험이다.
본래 상정했던 계획대로, 두 소녀의 이모. 즉, 공왕의 아내를 찾아가야 한다. 언니의 자식이니 내치지는 않을 터. 적어도 그쪽까지 가면 신변은 보장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잘 하면 그 건을 빌미로 제국에 걸린 현상수배도 지울 수 있을지 모른다. 막막한 현실이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고자 했다.
“좋아. 그럼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보자고. 그 동안은 되도록 피하려고 했지만……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까.”
“무슨 이야기요?”
“너희 둘의 삶. 사소한 이야기. 무엇이라도 좋아. 적은 정보라도 알아두는 것이 앞으로의 일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겠지.”
쿤이 침대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팔짱을 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서두르기에 앞서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목적을 정했다면, 그 방향에 맞춰 정보를 찾아야 한다. 두 소녀의 이야기는 이를 위한 바탕이 될 것이다.
“저는……”
[하급 화술의 등급이 개방되었습니다.]
라라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쿤이 손을 들어 잠시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황급히 손등을 두드렸다.
[하급 화술 -> 중급 화술, 소모 신성 점수 500]
[하급 화술 -> 고백, 소모 신성 점수 500]
전과 마찬가지로 하급 화술이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급에서 중급으로 단순한 승급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독특한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도 가능했다. 중급 화술이야 뻔 한 내용이니, 아래쪽 고백을 손으로 눌렀다.
***
고백
대화 상대가 속에 깃든 말을 할 확률이 증가한다.
화술의 등급을 기반으로 하며, 지능에 추가 보정치를 받는다.
***
속마음을 끌어내기 쉬워지는 특기다.
쿤이 생각했다. 루루와 라라의 이야기를 듣기 전 갑자기 특기의 등급이 개방 된 이유가 무엇일까? 서 준경 신은 이유 없이 일을 행하지 않는다. 이건 분명 어떤 의도가 있음이다. 얼떨떨한 두 소녀를 그대로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서 준경 신께서 무언가를 전하려 한다.”
“신 님이요? 어디서요?”
“내게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당장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으니……확인을 해 봐야겠지.”
쿤이 소지품을 살폈다.
공물로 바칠 만 한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금화와 은화. 이미 몇 번이나 바쳤던 공물이다. 같은 것만 바치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다. 이왕이면 다른 것을 바쳐서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짐을 뒤져, 방울 군도에서 사 둔 비상약을 찾았다.
위급 시에 사용하려고 구입 해 둔 것이니 개인적인 가치로 따져도 제법 될 것이라 생각이 됐다. 화장대 앞쪽에 있는 작은 그릇을 꺼내와 그 위로 올려 두었다.
“서 준경 신이시여, 미천한 종복에게 부디 길을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릇 위로 푸른빛이 서리며 목소리에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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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라고?”
손을 뗀 채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쿤은 뜻밖의 특기를 발견해 냈다.
“삼촌 뭐해요? 거기서 서성이지 말고 서율이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요. 괜히 소향 누님 왔다가 걸리면 한 소리 들어요.”
“아아. 그래야지.”
뒤에서 들려오는 남규의 목소리에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주변은 한산했다. 게이트에 접촉이 되고 난 뒤로는 딱히 할 일이 없던 탓이다. 바삐 움직이던 연구원들도 가장 어려보이는 둘을 제외하고는 쉬러 들어갔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막내가 고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보다, 고백이라.
꽤 독특한 특기 아닌가?
화술의 경우는 여러 가지에 두루 쓰이기 때문에 범용적인 특기라 할 수 있다. 중급 화술로 승급을 하여 그 영향력을 더 받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고백’이라는 특기에 관심이 쏠린다.
고백의 특징은 상대가 속내를 더 잘 드러내게 만드는 것.
즉, 비밀이나 감춰 두었던 개인사를 듣기가 쉬워진다. 지금 내 상황에 대비시키면 어떠한가? 떠오르는 사람이 없나?
바로 미소에 대한 이야기다.
미소는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날의 그 얼굴은 좋아서 견디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필경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잘나지 못한 아빠가 덜컥 말 하라고 해서 그걸 토로 할 확률은 거의 없다. 저번에도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내가 이 특기를 승급시키고, 잘 차려입은 채 레인지로버를 끌고 앞에 나타난다면? 그래도 같은 반응을 보여줄까? 어쩌면 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서 속내를 털어놓을 지도 모른다.
이미 서율이의 소개로 사립탐정에게 의뢰까지 넣어 두었으니 무언가 앞뒤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앞 뒤 사정을 살피고, 미소의 속내를 확인 할 수 있다. 어떤 고충이 있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아빠 된 사람이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쿤에게 주는 신의 메시지로. 딸을 찾아야 하는 아빠로서.
고백. 부족한 포인트는 155였다.
※작가의 말
수줍게 고백을...음?
그나저나 제 작명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말이 없군요.
눈치 못 채신 건가?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