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34화 (34/240)

서율이의 스케줄은 N방송사의 스타 나들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유명인사를 초청해서 격 없이 인터뷰 하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했다. 보통은 급 있는 연예인이나, 명사들이 초청되어 오는데 오늘은 특이하게 개척자 중 한 명이 손님으로 초대 된 것이다.

인터뷰는 꽤나 심도 있게 진행되어 갔다.

개척자의 업무와 그 사회적인 책임감. 개인적인 부담이나 향후 방향 등에 대해서는 가볍지 않은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가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스튜디오 뒤쪽에서 대기를 했다.

남규랑 같이 왔는데, 그는 다음 스케줄 때문에 통화를 하러 나간 참이었다. 생소한 공간에 생소한 일. 모든 게 낯설었지만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적응을 하려고 했다. 이런 것들도 앞으로 내가 해 나가야 하는 일이었다.

“……오. 저 여자가 그 마담?”

“예쁘지? 화면보다 실물이 나은데?”

그때, 작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못 들었겠지만 하급 청력 때문인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좋은 듯 하면서도 이럴 때는 또 불편하다. 등급이 올라가면 이 청력을 조절 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캬, 좋겠네. 얼굴도 반반하고 돈도 빵빵하게 벌고 말이야.”

“나도 개척자나 됐으면 이딴 일 안 하고 노는데 말이야. 누구는 하늘에서 금수저가 뚝하니 떨어졌네.”

“그러게 말이야. 게이트 한 번 넘어갔다 오면 수억씩 떨어진다면서? 남은 시간은 티비에나 기웃거리고. 진짜 날로 먹는 거 아니냐?”

꼭 대충 아는 것들이 저딴 소리를 지껄인다.

서율이의 스케줄을 보고 온 나로서는 그녀를 보고 편하다고 절대 말 할 수 없다. 어설프게 티비 속 모습으로 짐작 한 이들이 이럴 것이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소설을 쓰지. 가까이 가서 발이라도 밟아 줄까? 조금은 치기 어린 생각이 스쳐갔다.

“야, 야! 감독이 오래.”

“아 썅. 저 인간은 시킬 놈도 많으면서 꼭 나를 불러.”

“니 얼굴이 노동상이라 그래, 인마. 가서 욕이나 봐라.”

“쯧. 끝나고 소주나 한 잔 하자.”

하지만 뭔가 하기도 전에 둘은 따로 부름을 받은 채 흩어졌다.

조금 맥이 빠져서, 둘이 서 있던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 듣는 이 없는 곳에서의 험담. 이해는 간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이런 사소한 악의조차 걱정이 된다. 나 한 사람 욕한다고 뭐 별 일 있겠어? 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씩 뱉곤 하니까. 그런 악의가 모이고 모이다 보면 해일처럼 몰아쳐 오는 법이다. 서율이가 강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강한 아이는 아니다. 평소에도 이런 이야기들을 오가며 주워듣고 있을 터. 속으로 쌓아 둔 스트레스가 얼마나 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조금 더 잘 해 줘야겠다.

내가 다짐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 밖에는 없었다.

“어, 이거 왜 이래?”

그때, 음향을 관리하던 스태프 쪽에서 조금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두엇 정도가 모여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지금 인터뷰가 생방송은 아니지만, 출연자들이 조금 세다. 음향사고로 끊어 가면 나중에 한 소리 듣기 쉽다.

“라인 쪽이 나간 거 아니야? 뒤에 확인해 봤어?”

“벌써 확인했지!? 왜, 이래? 믹스쪽은 괜찮아? 불은 제대로 들어오고?”

“이쪽은 멀쩡한데? 갑자기 왜 소리가 먹히는 건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니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음성이 입력되는 부분에서 신호가 엉킨 것이다. 이럴 때는 한 쪽을 끄고 차례대로 다시 키면 해결 될 문제지만 그렇게 하면 당장 방송을 멈춰야 한다.

“믹스 쪽 신호를 우회해서 돌려요.”

“어, 어?”

“누구시죠?”

“도움이 필요 한 거 아니에요?”

넌지시 말을 다시 걸었다.

그러자 서로 얼굴을 잠시 보더니, 시선을 돌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고 나서 한 소리 듣는 것보다는 낫다 생각한 거겠지.

“이쪽 우회해서 돌리는 동안 잠시만 전원을 내려요.”

“그럼 소리가……”

“보조로 쓰는 거 하나 있죠? 그쪽으로 잠시 돌려요. 약간 튀겠지만 나중에 보정하면 티도 안 나요.”

“아, 그러면 되겠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저들도 지금 당장 당황해서 그런 거지 차근차근 봤다면 금세 해결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나이 많은 선임 스태프가 곁을 지켜야 하는데, 아마 다른 일로 빠진 거 같다. 방송가 인력 부족이야 뭐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선을 뽑아 우회하고, 그 사이에 리붓을 했다.

보조 장치로 소리를 담고, 그 틈에 다시 본래의 상태로 배열을 했다. 뚝딱. 전원을 키고 잠시 기다리자 문제없이 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하. 됐다.”

“고마워요. 이거 신세를 졌네요.”

“뭐, 별것도 아니죠. 우리 서율이 목소리나 예쁘게 나오게 해 주세요.”

“아, 그쪽이 서율 씨 데리고 온?”

답 대신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쪽도 짧게 수긍하더니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그려 보였다. 아마 서율이 쪽 음성을 더 신경 써 줄 것이다. 이게 뭐 대수로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작은 평판이 쌓여서 큰 명성을 이룬다고 하지 않나? 스태프 사이의 좋은 소식은 그녀의 이야기에도 좋은 양념이 될 것이다.

군에서 공관 불려 다니던 경험이 이렇게 도움이 되나 보다.

옛적과는 기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 동안 틈틈이 책을 독파해 두었다. 특기가 생성되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경험치는 쌓였을 것이다.

나름대로 일석이조의 결과였다.

아하하하하~

스튜디오 쪽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재미있는 얘기라도 나온 모양이다.

언제쯤 끝나려나?

기다리는 것도 꽤나 고역이다.

#

“삼촌~많이 기다리셨죠?”

인터뷰가 끝나고 대기실로 온 서율이가 앉기도 전에 앙탈을 부렸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유명인이라고 표정 관리를 하더니, 문 닫자마자 이런다. 이게 유명인의 삶이라는 걸까? 눈앞에서 보니 희극이 따로 없다.

“기다리기만 했는데 뭐.”

“그래도 그게 힘든 거죠. 좀 앉아요.”

“삼촌 아직 그렇게 안 늙었다.”

“피, 누가 늙었대요?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게 죄송해서 그렇죠.”

서율이가 샐쭉하게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진짜로 친 조카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보다 네가 피곤하겠지. 이쪽으로 앉아 봐라.”

의자를 앞으로 끌어와 툭툭 쳤다.

그녀가 길게 붙인 속눈썹을 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이 인터뷰가 마지막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안 왔다. 헤어나 메이크업에 손 대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설마? 라는 눈으로 봤다.

“아직 그런 재주까지는 없어. 피곤할거 같아서 안마나 좀 해주려고.”

“아~! 안마! 헤헤. 받아도 되는 거죠?”

“비싼 거지만 특별히 이번만 공짜로 해 주마.”

공짜라는 말에 그녀가 폴짝폴짝 뛰어 의자에 앉았다.

하얀 브라우스 안쪽으로 뽀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가슴이 조금 빨리 뛰는 거 같다.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본래의 목적을 되살렸다.

-봄의 기운

반지를 통해 유지되는 마법의 효능이다.

소유주의 피로를 풀어주며 손을 통해 타인에게도 사용 할 수 있다. 고생하는 서율이를 생각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능력이다. 피로회복. 자양강장제 하나만 잘 만들어도 떼 돈 버는 세상이니 이 손은 나름대로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등을 기댄 서율이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으, 으응……”

“왜?”

“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손이 좀 투박한가?”

“아, 아뇨.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냥 좀 시원하고, 뭐랄까……”

뒷말이 끝나지 않아 조금 기다렸지만 그녀는 맺지 못했다.

하얗던 목덜미가 슬금슬금 붉어 졌다. 왜일까 생각하다 한 가지를 깨닫고는 웃었다. 피로 회복은 일종의 자극이다. 마사지를 받으며 야릇하게 신음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내 손에 닿는 순간 마법이 발동되어 그녀의 몸을 휘돌았으니 그 느낌 때문에 다른 쪽의 착각을 한 모양이다.

귀엽기도 하고 살짝 자극적이기도 하다.

묘한 흥분을 가슴에 품은 채 그녀의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근육 하나 없이 말랑말랑한 몸은 마치 시루떡을 손으로 조물거리는 것 같았다.

“아, 으응……읍!”

그러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에, 서율이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몸이 풀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나온 모양이다. 급히 가리는 모양새가 우습지만, 반지가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짓궂게 웃으며 손끝에 힘을 더 주었다. 민망한 상황 탓인지 그녀는 그만 하라 말도 못하고 발끝만 세운 채 소리를 억눌렀다.

음. 아. 음.

조금은 민망한 신음 소리가 대기실 안쪽을 울렸다. 장난삼아 놀려줄까 해서 말없이 손에만 힘을 주었던 건데, 묘한 소리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나도 괜히 어색하다. 서율이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혀있고 손끝에 닿는 피부가 붉다. 손으로 막은 입에서는 거칠어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고 아랫배 쪽에서 뭔가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덜컹―!!!

“왁!”

“꺅!!!”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어, 뭐야? 분위기 왜 이래요?”

들어 온 건 남규였다.

통화가 끝나고 대기실로 바로 온 모양이다. 어색한 대기실 분위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와 서율이를 살폈다.

“음음. 다 된 거 같은데? 이제 일어나도 돼.”

“그, 그렇죠! 아하하하. 삼촌 솜씨가 아주 좋네요. 완전 상쾌해졌어요!!”

서율이가 벌떡 일어나서는 팔을 붕붕 돌렸다.

누가 봐도 어색한 모습이다. ‘끙……’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남규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러다 아예 감겠다.

“뭐야, 뭐야? 나 촉 되게 좋아.”

슬금슬금 다가온 남규가 되도 않는 개그를 흉내 냈다.

이놈은 첫 만남에서는 좀 진중한 거 같더니, 실없기로는 동식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됐다는 의미로 이마를 쿡 눌러 준 뒤, 대기실에 쌓아 둔 짐들을 들어 올렸다.

“허튼소리 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일도 끝났겠다, 후딱 돌아가자고.”

“에이 좀 놀려볼까 하는데. 사람이 유머가 그렇게 없어요.”

“유머 찾다가 골로 간 사람 소개시켜 줄까? 차 막히기 전에 후딱 빠져 나가자고.”

짤 없이 답하자 남규가 툴툴 거리며 남은 짐을 챙겼다.

그래도 남규나 동식이나 둘 다 경우가 없는 놈들은 아니라서 지내기에는 좋다. 후배로 들어와서 연장자가 간섭하면 싫어 할 만도 한데 말이다. 뒤에서 픽 웃고는 짐을 번쩍 들어서 어깨에 걸쳐 멨다.

“와, 준경 아저씨는 가끔 보면 나보다 힘이 센 거 같아요.”

“아저씨가 뭐냐. 너도 그냥 삼촌이라고 불러.”

“예이, 삼촌.”

이렇게 친해지는 거겠지.

주렁주렁 짐을 달고 문으로 향했다. 손이 빈 남규가 후다닥 가서 문을 열고는 먼저 빠져 나갔다. 이럴 때는 눈치 있어서 좋다.

꾸욱.

그렇게 돌아가기 위해 문을 통과하려는데, 누군가 소매를 잡았다.

남규는 나갔고, 방 안에 남은 건 누구뿐이겠는가? 돌아보니 조금은 상기 된 얼굴의 서율이가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스윽. 그때 서율이가 갑자기 다가왔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살짝 달아오른 체취와 화장품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며 뛰었다.

“아, 안마 고마웠어요.”

귀에 나지막하게 들려온 한 마디.

그것을 남긴 채 서율이가 종종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아, 그것 때문이었구나.

……대체 난 뭘 기대 한 걸까.

쿵쾅거리는 심장을 누른 채 그녀 뒤를 쫒아갔다.

※작가의 말

휴. 갑자기 사람이 몰리니 앞쪽 내용을 지적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네요.

경험을 바탕으로 쓴 건데, 아무래도 맞지 않은 부분이 있나 봅니다. 수정을 하고 와야 할 거 같아요. 고친 내용은 공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