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에게 의뢰를 넣고 난 다음날, 소향에게 연락을 받았다.
일손을 빌릴 겸 정식 사원 계약을 맺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구두로 약속을 한 채 일을 도왔다. 내부적으로 평가가 좋게 난 건지, 서율이가 입김을 넣었는지 생각보다 이르게 정식 직원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서율이에게 받은 은색 레인지로버를 이끌고 사무실로 향했다.
주차장에 딱 대고 차 문을 열고 내리니 주변에서 묘한 시선이 쏟아졌다. 고급 자동차에서 후줄근한 아저씨가 나오니 놀란 모양이다.
별 일이다 생각하며 주차장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춰 보는데, 확실히 고급스러운 레인지로버와 내 모습은 간극이 있었다. 회사 다닐 때야 어쩔 수 없이 양복을 입었지만 지금은 품 넓은 면바지에 셔츠. 아니면 위에 니트 정도가 전부다. 대부분 오래 된 옷들. 양쪽을 나란히 놓고 비춰 보니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졌다.
시간 날 때 어울리는 옷도 좀 사야 할 거 같다.
돈도 넉넉하게 들어왔고, 미소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다. 차림새로 사람을 가르는 건 아니지만, 후줄근한 모습 보다는 갖춰 입은 사람이 그래도 신뢰가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서 오세요.”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올라가니 소향과 서연이 자리에 있었다.
그나마 편한 동식이나 남규가 안 보이니 살짝 어색했다. 아무래도 기 센 여자 둘은 나와 상성이 잘 맞지 않는다. 헛기침을 하고는 둘 앞쪽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 앞에 계약서에요. 현재 준경 씨 상황을 고려해서 작성해 두었어요.”
몇 장 안 되는 계약서가 있었다.
“음……”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월 180에 행사별 추가 수당 지급. 사고나 만일의 일을 대비한 보험도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하루에 정해진 일과가 없고 휴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보조팀의 업무를 생각 해 보면 일주일 내내 시달릴 수도 있다. 잠시 고민하다 계약서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네요. 하루 평균 업무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게이트를 넘어 갈 때는 하루 종일. 그렇지 않을 때는 행사 따라 달라요.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지만, 개인 시간은 충분히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정식 사원이 되면 제가 하는 일은 어떻게 되죠?”
“나이도 있고, 경력도 있으니 그냥 막 일로 쓰는 건 조금 아니라고 생각 되는군요. 듣자하니 회사에 있을 때 정보관리 부서에 있었다고 했죠?”
“거창하게 이름 붙이면 그렇고, 우리끼리는 창고부서라 불렀죠.”
회사 안팎으로 오고가는 서류나 데이터의 양은 굉장히 많다.
그리고 바쁜 업무 중에서는 이를 보내놓고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내가 있던 부서에서는 이런 것들을 모아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을 했다. 업무 통계나 회계팀 고과 선정에도 같이 손잡고 일 하곤 했으니, 나름대로 중추였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럼 여기 있는 서연이와 함께, 일정 관리를 같이 해 주세요. 최근 들어 찾는 곳이 많다 보니 혼자서 처리하기 곤란해 하더군요.”
그녀의 말에 서연을 슬쩍 봤다.
첫 기억이 최악인 만큼 내키지 않았다. 지금은 다소곳이 않아 있지만 또 히스테리 부리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른다.
“물론, 게이트로 이동 할 때는 그쪽 일을 도와야 하는 건 잊지 말고요.”
“흠. 어떤 식으로 일정 관리를 하는지 좀 볼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죠. 서연아, 좀 도와 줘.”
서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트북을 가지고 내 옆으로 왔다.
어색함이 가슴 속에서 뭉큼뭉클 올라왔지만 억지로 찍어 눌렀다. 같이 일하게 되면 계속 볼 사이 아니던가. 견디고 참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일단 정리 된 내용부터 보여드릴게요.”
화면에 서율이의 스케줄이 쭉 떴다.
보는 순간 숨이 턱하니 막혔다. 이게 사람이 할 만 한 스케줄인가 싶었던 것이다. 게이트는 2~3주 간격으로 들어가고 남은 시간에는 방송, 만찬회, 강연, 포럼 등. 온갖 행사에 불려 다니고 있었다. 이 와중에 나를 만나기 위해서 시간을 뺐던 것이니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것 같다.
“꼭 이렇게 많은 스케줄이 필요한 겁니까?”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라도 주변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어떤 압박이 들어올지 모르는 거니까요.”
“개척자의 가치는 그렇게 쉬이 다룰 만 한 게 아닐 텐데요?”
“객관적으로? 맞죠. 하지만 본래부터 높은 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율이는 우연히 금덩이 하나 주은 시민에 불과해요. 그녀가 가진 가치를 인정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부리려고 하죠. 이 많은 스케줄은 그 증거라고 보시면 돼요.”
민간 사업 쪽으로 개척자가 위탁이 되었다 해도, 완전하게 독립됐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스케줄의 상당 부분이 공공 기관의 행사나 권력자들의 개별 요청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게이트 너머의 재화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조금 특별한 재주를 가진 일개 시민으로 여기고 있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의 가치를 안다면 무리한 스케줄을 금하고, 컨디션을 조절하고 최대한 게이트 너머의 일에만 집중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이 나라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지나치게 많아요. 이 중 개인의 요청은 조금 줄이는 것이 좋을 거 같네요.”
“하지만 거부하면 그쪽에서 말이 나올 텐데요?”
“말이 나와도 상관없는 사람들을 골라야죠. 음……일단 이 양반. 3선 의원이라는 명함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끈 떨어진 연 같은 신세에요. 아직도 목에 힘주고 사는 거 같지만, 요청을 거부했다고 크게 탈 날 거 같지는 않군요.”
“최재훈 의원이군요. 음. 확실히 준경 씨 말에 일리가 있네요.”
서연에게서 노트북을 받아 자료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사 다닐 때 익숙하게 다루었던 것이라 어렵지 않았다. 불필요한 것을 따로 빼고, 필수적인 것들만 스케줄에 정리하였다. 들어가는 시간과 리스크를 따져서 각 행사의 가치 비용을 매길 생각이다. 귀찮은 일이 되겠지만, 이래야 서율이가 좀 쉴 수 있을 거 같다.
[특기 정리의 달인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때,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정리의 달인’ 딱 봐도 하급을 붙이고 나온 것들과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역시 평생 동안 한 일이라 그런지 특기도 제법 괜찮게 나온 것 같다. 아마 누적되는 경험치가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자료 정리를 하다 보니 튀어 나온 거 같다.
타다닥. 타닥.
알림음과 상관없이 내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방금 생성된 특기 덕분인지 내용 정리가 더욱 쉬웠다.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한 눈에 쏙쏙 들어왔다. 아직 정보를 몰라 분류가 어려운 것들도 있었지만 10여 분 가량 타자를 두드리고 나니 서연이 만들어둔 스케줄표와는 다른 것이 완성 되었다.
“와아……”
옆에서 서연의 감탄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네요.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정리를 하시다니.”
“확실히 보는 게 편해졌어. 대단하네요.”
“흠흠. 뭐,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올라가는 입 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답을 했다.
하지만 어깨가 펴지고 가슴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리 해 둔 내용을 저장 한 다음에 다시 서연에게 넘겼다.
“상세 내용을 조금 더 조사한 다음에 정리하면 스케줄을 더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괜찮다면 직원들 시간 배치표도 같이 주세요. 쓸데없이 노동력 낭비되는 곳이 있으면 최대한 줄여 볼게요.”
“후후. 열의가 넘치는군요.”
“이거 참. 낙하산이라고 비웃은 게 미안해지네요.”
소향이 부드럽게 웃고, 서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속내가 어떻든 인정하고 좋아해 주는 반응이니 만족스럽다.
[경험치가 증가하였습니다.]
그때, 쿤으로 듣던 알림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경험치? 갑자기 이게 왜 떠오른 거지? 경험치는 쿤이 포교를 했을 때 쌓이는 것이 아니었나?
“준경 씨를 소개시켜 준 서율이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아, 아하하. 요즘 같을 때 직장 찾기가 쉽습니까? 제가 고마워해야죠.”
하지만 그 궁금함을 풀 만 한 상황은 아니다.
소향의 말에 대꾸를 한 뒤 계약서를 다시 들어 올렸다.
“몇 가지만 수정 한 뒤에 계약을 하죠.”
지금은 이것부터.
필요한 조건을 하나씩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
조금 더 나아진 계약으로 마무리를 한 뒤 사무실을 벗어났다.
한 2~30분 후에 서율이가 돌아와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 나가야 하니 그 길로 같이 가서 일을 좀 거들어 달라고 했다. 잠시 시간이 남았으니, 내 상태를 알아 볼 겸 자리를 비운 것이다.
화장실 거울을 보며 창을 열었다.
***
정리의 달인
정보를 취합, 정리하는 데 능숙해진다.
사소한 정보도 놓치지 않는다. 가장 효율적인 정리 형태가 느껴진다. 난잡하게 섞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중요 내용을 간파 할 수 있다.
***
일단 특기부터 살폈다.
정리의 달인. 이름 그대로의 내용이었다. 다만, 아래쪽에 설명된 것은 정리라기보다는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 쪽에 가까웠다. 단순 정리보다는 이쪽이 더 좋아 보였다.
그리고 다시 상태 창을 살폈다.
분명 경험치가 증가했다는 알림을 들었었다. 하지만 딱히 창에는 변화가 없었다. 애초부터 무슨 퍼센트로 경험치 바가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었던 것이다.
그러니 더욱 의아해진다.
대체 왜 경험치가 증가 했을까?
나는 포교를 한 적도 없으며, 포교 할 수도 없다.
내가 지나가는 사람 잡고 서 준경을 믿으라 하면 그게 얼마나……
“믿음?”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뭔가 잡힐 듯 머리에서 어른거렸다.
“신에 대한 표교는 믿음에 대한 것. 그리고 그 대상인 신은 바로 나잖아.”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는 건 우습지만, 쿤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러했다.
“여기서 경험치를 얻은 건 내 실력으로 인정을 받았을 때. 그것도 믿음이라 할 수 있나? 능력에 대한 믿음? 아니면 신뢰?”
뭔가 비슷비슷하다.
신의 포교로 믿음을 전파하는 것과, 짧게나마 내 능력을 보여서 인정받은 것. 결국 한 사람(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결부된다. 그 주체는 둘 다 나(서준경).
“대충 어떤 건지 감이 오는군.”
결국 관건은 나에 대한 성장으로 귀결된다.
신이든 인간이든. 개인의 능력이든 사회적인 지위든. 어느 쪽으로든 나의 성장이 시스템적인 능력 증가로 찾아오고, 이는 다시 내 삶을 살찌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자 다시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 일의 주체. 어떤 존재라 지칭한다면, 그는 과연 내게 뭘 바라는 걸까. 세상에 우연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가슴속 깊이 침잠했다.
※작가의 말
* 허리가 쑤셔서 병원에 좀 다녀 왔습니다. 역시 자세는 중요한 겁니다 ㅋ;
* 댓글에 코난 분들이 자주 보입니다. 여러분...릴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