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크리스티나라고 해요.]
첫 만남에 건넨 인사말이다.
죠엘이 소개시켜 준 친구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도회적인 여성이었다. 척 봐도 있는 집 자제 같았다. 대뜸 영어로 인사를 거는 통에 조금 당황을 해야 했다.
중간에 통역은 죠엘이 해 줬다.
나도 영어는 조금 하지만 능숙하게 대처 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듣는 건 그럭저럭 가능하니 말만 부탁하면 됐다.
“정말로 동화랑 세트가 되는 물건이 있냐고 묻는데요?”
“세트인지는 모르겠지만……당시에 같이 구해 온 것들이 있거든요. 일단 꺼내 볼게요.”
가방을 열어 지금까지 받았던 공물을 꺼냈다.
벨포드의 단검. 동화와 은화. 그리고 번쩍이는 금화. 가장 마지막에 놓인 건 라라와 루루에게서 받은 귀고리와 팔찌였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길거리에 물건 팔러 온 잡상인 같았다.
“와아~! 저도 좀 봐도 되죠?”
“그럼요. 천천히 살펴보세요.”
고객님 말씀인데 어련하시겠습니까.
마음껏 보라고 한 뒤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여자는 신이 나서는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서 난 건지 큼지막한 안경까지 쓴 채 하나하나 살폈다. 죠엘은 고고학자의 느낌이었고 크리스티나는 고객의 모습이었다.
“준경 씨, 이 물건들도 다 같은 곳에서 구입 한 거죠?”
“네, 뭐 그렇죠.”
살짝 두루뭉술하게 답을 했다.
정확하게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답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페루나 티벳 쪽을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물어보지 않는 쪽이 내 입장에서는 좋다.
“어때? 마음에 들어?”
시선을 돌리고 묻는 죠엘에게 크리스티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정말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라라가 넘긴 팔찌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내가 볼 때는 그냥 평범한 물건 같았는데, 죠엘은 그 안쪽에 새겨진 문양이 일종의 축문 같다며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기원, 바람 등. 옛 사람의 염원이 들어간 물건은 수집가에게 있어서는 보물과 같다.
그렇기에 크리스티나가 이렇게 좋아 하는 것이라 말을 했다.
“헤에. 정말?”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중 죠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돌아보는데, 약간의 즐거움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물건에 대해 생각하느냐고 크리스티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좋은 얘기라도 한 걸까?
“크리스티나가 전부 구입하고 싶대요. 연대 미상의 문명이 가지고 있던 흔적들. 그 아스라한 추억의 단편들은 단순한 물질적 가치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하네요.”
“……그, 그렇습니까?”
“이건 정말로 흥분 되는 일이에요. 안 그런가요? 잊힌 문명의 물건이 시간 속에 묻혀 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이렇게 전해지는 것. 정말 로맨틱하지 않아요!?”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이 아가씨는 첫 만남에도 그렇고 뭔가 집중하면 크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저 얼굴로 이런 태도라면 뭇 남자 고혈압으로 쓰러뜨렸을 거 같다.
가볍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찬성해 주었다.
[물건 하나하나에 들어간 정성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그래서 가치를 매기기가 더욱 어렵네요. 원하시는 금액이 있다면 말씀 해 주세요.]
그때, 크리스티나가 내 얼굴을 보며 정면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백지 수표를 내민다는 건가? 부르면 얼마든지 사 준다는?
순간, 백 억 쯤 불러볼까 했지만 이내 머리에서 지웠다. 아무리 꿈에 빠져 사는 돈 많은 집 아가씨라고 해도 될 게 있고, 아닐 게 있다. 어느 정도를 불러야 서로 만족하고 넘어 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준경 씨. 크리스티나는 수집품에는 돈을 안 아껴요. 마음에 드는 것 같으니 넉넉하게 불러도 괜찮아요.”
“하지만 얼마나 불러야 할 지 감이 잘 잡히지 않으니……”
“음. 그럼 제가 좀 떠 볼까요?”
“그래주면 고맙죠.”
친구니까 조금 더 편하게 부를 수 있다.
일단은 어느 정도 금액에서 얘기가 오가는지 들은 뒤 다음에 판단을 내릴 생각이었다.
[크리스티나, 전부 해서 10만 달러 어때? 이렇게 독특한 물건들은 쉽게 구할 수가 없다고.]
[오, 10만? 죠엘. 나는 물건에 대한 가치를 분명하게 매기는 사람이야. 그건 너무 낮다고. 너 조차 알지 못하는 문명의 흔적이야. 어디 가서 이런 걸 또 구할 수 있겠어? 나는 스크루지가 아니라고.]
[우리 크리스티나가 오늘 지갑을 열겠다는 얘기네?]
[파파가 돌아왔거든. 용돈은 부족하지 않아. 이런 즐거운 만남을 해 준 대가로 돈 몇 푼 나가는 것은 아깝지 않은 이야기야.]
[아하하. 정말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그래서 어느 정도의 가격을 지불 할 생각이야?]
[네가 말 한 것의 10배. 그래야 정당한 가치를 매겼다고 자부 할 수 있을 거 같아.]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처음 10만 달러를 언급했을 때도 심장이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뭐? 10배? 그 말은 100만 달러를 말 한다. 다른 국가의 달러를 말 하는 것은 아닐 테니, 한화로 치자면 대충 11억 정도 된다.
11억. 평생 동안 직장에서 일 하면서도 꿈 꾼 적 없는 돈이다.
그런 걸 골동품(다른 세계의 것이라 해도) 좀 팔았다고 덜컥 손에 쥘 수 있는 건가? 행운이라고 웃기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 조금 더 컸다. 즐거우면서도 쓰린 느낌? 참 묘했다, 이거.
“준경 씨, 얘기는 들었어요?”
“아, 네. 너무 거액이라 조금 얼떨떨하네요.”
“후후, 신경 쓰지 마세요. 크리스티나에게 그 정도 돈은 용돈 중에서도 일부에요. 마음에 든 물건을 구입하는데, 아까워하는 성격은 아니죠.”
“휴. 뭔가 별 세계 이야기 같군요.”
“그래서 어때요? 파실 건가요?”
잠시 생각했다.
공물. 쿤이 열심히 벌어다 준 물건들이다. 이것들을 그냥 냉큼 팔아버리는 것이 살짝 양심이 걸리기는 한다. 게다가 아직도 약간의 걱정은 남아 있다. 과연 게이트 너머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함부로 팔아도 될까 싶은.
하지만 연대 미상의 물건을 개인에게 파는 일이다. 만약 이런 일로 무슨 꼬투리가 잡힐 거라면 무엇도 할 수가 없다. 기회가 있을 때 잡는 것도 용기라면 용기. 처분 할 가능성이 낮았던 물건들에게 주인이 왔다면 여기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11억이다.
“팔아야죠.”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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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억. 크리스티나의 태도로 보았을 때, 더 부른다면 아마 값을 더 쳐 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했다. 공물을 받는 건 이 일로 끝이 아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물건이 생기게 된다. 그때를 생각해서 그녀와의 관계는 좋은 것으로 남기는 게 좋다.
다만, 추가로 생기는 물건들에 대해서는 과연 출처를 어찌 할 지가 관건이었다. 이미 여행지에서 사 왔다는 변명은 사용 한 상황. 다른 변명이 필요했다.
“뭐, 지금 생각 할 일은 아니지.”
계좌에 찍힌 돈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11억. 크리스티나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연락을 하더니, 알려 준 계좌로 바로 송금을 했다. 이렇게 쿨 한 여자를 봤다. 돈 많고 도도한 여자를 싫어하는 나이지만, 오늘 만큼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11억을 용돈으로 사용하는 여자. 어떤 집안인지 상상도 안 간다.
“좋은 일이 있나 봐요?”
그렇게 혼자 히죽이고 있는데, 서율이가 들어왔다.
죠엘과 만나고 다음 날. 사립 탐정과 약속했던 시간이다. 단 둘이 만나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와서 동석하겠다고 찾아왔다.
“서율이 같은 미인을 자주 보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그러네.”
“어머, 입 발린 소리.”
“가끔은 입술에 침 좀 발라야지.”
기분이 좋으니, 말도 술술 나왔다.
서율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반달 웃음을 지으며 받아 주었다. 전날은 죠엘 오늘은 서율이. 확실히 눈이 호강하기는 한다. 내 평생 이런 미인들을 언제 또 만나 보겠는가. 기회가 될 때 열심히 눈에 담아 둘 생각이다.
“건물 앞에 도착했다고 해요. 곧 들어올 거예요.”
“꽤나 바쁜가 보네?”
“아무래도 이쪽으로는 조금 유명하니까요. 삼촌도 덕 좀 보세요.”
그랬으면 좋겠다.
늘어진 얼굴을 살짝 가다듬고는 허리를 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꽤나 진지하고 무섭다.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끼익.
이내, 사무실 문이 열리고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정도? 때가 탄 와이셔츠에 테 굵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머리를 제대로 정리 안 해서 조금은 지저분해 보이는 느낌이다. 이 사람이 정말로 유명한 사립탐정일까?
“오이, 우리 서율 양 왔으이?”
“아이 참. 아저씨! 일 하러 오셨잖아요!”
“에이, 우리 사이에 왜 그럴까?”
남자는 흐물흐물 웃었다.
능글맞은 변태 같기도 하고, 실없는 한량 같기도 했다. 그가 지분거리다 내 쪽을 돌아봤다. 안경알 안쪽으로 눈이 빛났다.
“그래, 그쪽이 의뢰인 인 겁니까? 우리 서율이 소개로 온?”
“그쪽 서율이 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의뢰를 하러 온 건 맞습니다.”
“뭐,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L그룹의 자제분을 염탐 해 달라?”
그가 의자를 끌러 앉더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기세가 한 번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것이 남자가 가진 본래의 모습일 것이다. 나도 허리를 조금 세우고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에 대한 염탐도 좋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딸아이의 생활입니다.”
“결혼 이후에 잘 살고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고 싶습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주변에서 괴롭힘은 없는지. 남편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죄다 알고 싶습니다.”
“워워. 진정 하시죠.”
나도 모르게 흥분을 했던 모양이다.
낮게 헛기침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이 몸이 하는 일이니 알아내는 거야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군요.”
“듣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 일을 할 각오가 있습니까?”
“무슨 소리죠?”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당신이 알고 싶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으로든 말이죠.”
남자의 눈이 심유하게 빛났다.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상상이 마구 떠올랐다. 학대를 받거나 모진 고생을 하면서 지내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나는 완전히 잊고 그 집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면 어떻게 할까. 확실하게 답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만큼 상상은 무서웠다.
목 언저리가 답답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는 가볍게 당겼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이 보였다. 그대로 들어 쭉 마시고는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안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는 만큼 걱정이 생기고 불안이 피어난다. 어쩌면 딸 아이 생각은 잊고 이번에 얻은 돈으로 내 삶이나 잘 꾸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 어느 아빠가 그럴 수 있겠는가.
“각오는 돼 있습니다. 전부 다 파헤쳐 주십시오. 먼지하나 까지 전부 다.”
“후후. 그렇게 나오신다면야.”
남자가 웃었다.
어딘가 만족한 기색. 일부러 떠 본 모양이다. 단순히 아는 것과, 그것을 감당 할 수 있는 건 다른 일이니까.
“어디, 샅샅이 털어 봅시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마음에 든다.
※작가의 말
혹시 몰라 올려두는 예약연제!!
* 금액 설정은 고민을 좀 했습니다. 11억이 지나치게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슥 보던 친구가 말 하더군요. 선 하나 죽 긋고 수십억에 팔리기도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 고액거래에 대해서는 세무조사가 따로 들어가는 것으로 아는데, 맞나요? 이쪽은 크리스티나의 재무 담당 변호사가 알아서 처리 한 것으로 상정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