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율이와는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인적 없는 곳에서 느긋이 고기를 썰고 바람을 몸으로 받았다. 그녀는 늘어진 얼굴로 좋아했다. 나도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답답한 일들이 가슴 한 구석에 있지만, 그것에 매몰돼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 기분 전환을 하면서 머리를 맑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목표를 새롭게 세운 시점이었으니, 서율이가 좋은 타이밍에 나온 셈이었다.
헤어지고 난 뒤 다시 연락을 받았다.
사립탐정과 연락이 닿았는데, 일주일 뒤에 만남을 가지자는 것이다. 진행하는 일이 있어서 그때가 돼서야 시간이 난다고 한다. 조금 시간이 아깝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았다고 하고는 내 일로 돌아왔다.
우선 찾아간 곳은 체육관이었다.
“파하하하! 잘 찾아 오셨수다. 나이 먹으면 건강이 최고지.”
프로 선수도 몇 명 배출했다고 선전을 해 놓았는데, 딱히 신용은 안 간다. 어차피 혼자 할 만 한 운동을 찾은 거니 크게 상관은 없어서 등록을 했다. 우락부락한 관장이 반겼다. 등록하는 사람이 없었던 건지, 그 반김의 정도가 조금 과했다.
“그래, 운동은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냥 간단한 것 정도만……”
쿤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나 스스로를 개발 할 수 있는 방법은 액션 & 스킬 타입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맹약을 사용해서 소소하게라도 신성 점수를 벌어야 한다.
간단하게 말 하면 이런 것이다.
“일단 줄넘기부터 해 볼게요.”
줄을 잡고 천천히 뛰었다.
하나, 둘. 오랜만이라 어색하기는 했지만, 쿤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지 어렵지 않게 리듬을 탈 수 있었다. 100개를 넘어가고 200개도 쉽게 통과했다. 숨이 차고 팔에 힘이 떨어지는 건 300개를 딱 넘은 시점부터. 쿤을 생각하면 너무 허약한 수준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많이 한 것이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창을 살폈다.
[신성 포인트 : 177]
본래 있던 171에서 6점이 늘어 있었다.
줄넘기를 시작하기 전에 걸어 둔 맹약 때문이다. 내가 그 동안 알아 낸 바에 의하면 맹약은 일단 달성 여부가 가장 큰 비율을 지녔다. 리스크로 거는 조건은 그보다는 비중이 조금 약하다. 아주 쉽게 달성 할 수 있는 일에 목숨을 걸어도 그리 가치는 높게 산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이의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하다.
리스크를 크게 걸어도 좋을 만큼 성공확률이 높은데, 시작 가치가 0이 아닌 조건. 이건 반복적인 실험으로 데이터를 누적하는 수밖에 없다. 100번 줄넘기를 조건으로 걸고 리스크를 양 팔 절단으로 하면 가치가 얼마일까? 200번 줄넘기를 조건으로 걸고 리스크를 양 다리 절단으로 걸면 가치가 얼마나 나올까?
체육관 활동을 통해서 특기의 활성화를 노리며, 누적 데이터를 수집. 이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신성점수 획득에 들어선다. 이게 내 일차적인 계획이다.
체육관에 등록한 날 부터 이런 작업을 계속 해 나갔다.
줄넘기 좀 하고 노트에 끼적이는 나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봤다. 처음에는 잘 왔다며 반겨주던 관장도 이상한 내 태도에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상관없다. 나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까.
첫 시작에 줄넘기 500번. 조건은 양 팔의 골절. 시간은 한 시간. 이게 만일의 상황까지 고려하여 내가 넉넉하게 설정한 맹약이다. 가치 획득은 5점.
그 다음은 300번. 조건은 동일하게. 시간은 한 시간. 지친 몸 때문에 가치는 역시 5점이 된다. 이렇게 두 세트를 해서 얻는 포인트는 총 10.
하지만 줄넘기만 하려고 체육관에 등록 한 건 아니다.
나야 필요 없지만, 쿤의 경우는 또 다르다. 그에게 도움이 될 만 한 특기라도 하나 깨우쳐야 하지 않겠는가? 관장을 조르고 졸라서 주먹질 하는 방법을 배웠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발을 앞으로 내밀며 체중을 실어서 날리는 스트레이트. 만화에서도 많이 봤고, 누구나 한 번 쯤 따라해 본 동작이다. 하지만 체육관에서 실제로 배우는 건 꽤나 느낌이 달랐다. 특히 샌드백이나 관장을 미트를 두드릴 때는 상황에 맞는 몸의 자세가 따로 요구되었다.
아마 관장은 겨우 하나 잡은 문하생이 흥미 떨어질까 봐서 재미꺼리로 익히라 알려 준 거 같지만, 내 입장에서는 좋은 가르침이었다. 스트레이트 300번에 조건으로 양 팔 골절. 시간은 한 시간. 포인트 5점짜리로 기록된 내 맹약 리스트다.
“후우……”
흘린 땀을 씻어내고 샤워 실 거울 앞에 섰다.
뿌옇기 피어 오른 증기 탓인지 얼굴이 예전보다 조금 나아 보였다. 늘어졌던 살들도 탄력을 찾아 돌아와 있고, 힘없던 몸에도 근육이 좀 붙어 있다. 생각을 해 봤는데, 운동을 하면서 나와 쿤 사이의 간극이 메워져서 그런 건 아닐까 싶다. 스텟 수치에 맞는 몸 상태로 끌어 올린다고 해야 할까? 선수로 치자면 부상을 회복하여 재활을 하는 것과 같았다.
***
이름 : 서준경 / 쿤 타이(Lv2) 종족 : 인간
힘 : 14 민첩성 : 12
체력 : 17 지능 : 13
스킬 : 맹약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 - 집중 사고, 하급 은신, 하급 행운, 하급 화술, 하급 위기 감지, 하급 청력, 하급 체력 단련, 하급 힘 단련, 하급 민첩성 단련, 학생의 자세
축복 : 하급 신관의 축복, 하급 상처 치유의 축복, 하급 질병 치유의 축복
신성 점수 : 321
루루(하급 신관)
하급 축복 개방 - 50
라라(하급 신관)
하급 축복 개방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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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동안 변한 내 상태다.
특기에 몇 가지가 생겨났고, 신성 점수도 늘었다. 매일같이 6~7시간 정도를 운동한 결과다. 이런 와중에 필요한 책들도 틈틈이 독파하고 있으니 잠 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 하지만 나쁘지 않다. 내가 언제 이렇게 열정을 불태워 보았나 싶을 정도니까.
하급 단련 시리즈는 가장 단순한 특기다. 해당 스텟을 1 증가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게임으로 치자면 일종의 패시브. 사실 가장 먼저 나왔어야 할 능력인데 내가 운동과 거리가 멀다보니 조금 늦게 생성이 되었다.
재미있는 건 가장 마지막에 있는 특기다.
***
학생의 자세
모든 특기 생성 경험치를 감소시킨다.
***
분명하게 특기 생성 경험 치라고 쓰여 있다. 즉, 액션 & 스킬 타입으로 특기가 생성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경험치가 계속 누적되고 있다는 말이다. 화술을 많이 사용하여 화술 경험치가, 운동을 많이 해서 운동 경험치가. 단순한 내용이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직 책으로 통한 특기는 생성이 안 됐군.”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5일 동안 잠을 줄여가면서 지리, 법학, 요리, 봉제, 사냥, 주조. 온갖 책들을 사다가 읽었다. 솔직히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많았는지 눈 비비며 머리에 때려 박았다. 하지만 역시 나와 전혀 무관했던 영역이라 그런지 특기의 생성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문제겠지.”
들인 시간만큼 결과로 돌아온다.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신성 포인트가 압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맛이 있다.
“사무에 필요한 것들부터 천천히 익혀야겠군.”
보조팀에서 내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사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일정 관리나 인맥 케어를 위한 대화 스킬도 요구된다. 외국어도 배울 수 있으면 좋고.
“시간은 내 편이다.”
쿤을 통해서 쌓는 관계와 내 쪽에서 얻는 특기들.
하나씩 차곡차곡 얻어서 위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으로 만들 것이다. 노력? 노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
서율이가 소개한 사립 탐정을 만나기 하루 전.
나는 뜻밖의 사람에게 연락을 받았다.
“후후. 오랜만이네요.”
죠엘이었다.
여전히 화사한 얼굴을 한 채, 집 근처로 찾아왔다. 느닷없는 연락에 집 근처 방문까지. 솔직히 의아할 뿐이었다.
“그러네요.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일 뿐이죠. 연구팀 일이 막 시작된 터라 정리하기 바빠요.”
“그렇게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아, 이거 때문에요.”
그녀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보여 주었다.
내가 일전에 건네주었던 그 동화다.
“제가 드렸던 동전이군요.”
“그 동안 꽤나 연구를 했는데, 아직도 연대분석이 제대로 안 되고 있어요. 쓰인 동을 분석해 보면 길어봐야 천년 사이. 하지만 사용된 조판 양식이나 그림의 특징들은 그 연대와 동떨어져 있어요. 아니, 솔직히 말 하면 어느 시대라고 단정을 하기가 힘들어요.”
“연대 미상의 물건이라 이건가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그렇게 밖에는 말 할 수가 없겠네요.”
죠엘인 입을 비죽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고고학 쪽에 꽤나 자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물건은 지구상의 것이 아닌데. 그녀가 덜컥 밝혀내는 게 이상하다.
“아차차. 정신 좀 봐.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다른 용무가 있나요?”
“네. 얼마 전에 고향 친구를 만났는데, 이 동전에 흥미를 보이더라고요.”
“그 분도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건가요?”
“아하하. 아니요. 그 애는 단순한 수집광이에요. 특이한 것들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죠.”
“아, 그럼?”
“네. 동전이 마음에 든다고, 원 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뒤 구입을 하고 싶어 하네요. 아쉽지만 언제까지 이 동전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괜찮다면 거래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말인즉슨 동전을 사겠다는 건가? 출처도 모르는 것들을?
“혹시 동전을 구입 할 때 다른 것들은 안 사셨나요? 같은 양식이라면 한꺼번에 사고 싶다는데.”
“아, 잠시 만요. 그러니까 이 동전을 사고 싶다는 거죠?”
“네. 너무 이상하게 볼 거 없어요. 수집가에게 있어서 물건에 대한 가치는 남들과 다른 법이니까요.”
표정을 읽었는지 죠엘이 웃으며 답을 했다.
그렇게 이상했나? 얼굴을 매만지며 머리를 굴렸다.
동전. 꽤 있다. 금화 하나에 은화는 꾸러미로 받았다. 안 그래도 처분이 곤란한 물건이라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상황. 출처 불문하여 수집용으로 사 준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행운이다.
“혹시……”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간질간질한 속내를 감추며 슬쩍 운을 띄웠다.
“다른 물건에는 관심이 없나요?”
마치 장사꾼처럼.
※작가의 말
일 한 만큼 벌어라!!
준경의 루트는 굳어졌습니다. 일하는 신. 노동 신.
덤으로 장사꾼의 신도...ㅋ
재밌게 보고 가세요. 혹시 전편에서 잊고 온 게 있다면 살짝 돌아가서 남기고 와도 좋습니다.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