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곽 쪽에 가끔 가던 레스토랑이 있다.
한적한 곳이라 사람도 많지 않고, 주인과도 친해서 따로 방을 안내 받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서율이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일반 식당으로 가는 건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새 차 드라이브도 할 겸 해서 말이다.
부우우웅.
가볍지 않고 중량감 있게 밀려가는 느낌이 괜찮다.
남자라면 SUV.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아내의 취향 따라 중형 세단을 몰아야 했다. 이제 와서야 취향 맞는 차를 몰 수 있다는 게 씁쓸하기도 하면서 못내 후련하기도 하다. 창을 반쯤 연 채 바람을 얼굴로 맞았다.
“아하하. 삼촌 얼굴 웃겨요.”
“흠흠.”
분위기와 얼굴이 꼭 맞으라는 법은 없다.
내렸던 창문을 다시 올린 뒤 앞을 살폈다. 외곽지역으로 나오니 빼곡하던 빌딩들이 사라지고, 숲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 속이 상쾌해 지는 기분이다. 이래서 사람이 드라이브를 나오는 거 같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서율이를 힐끔 본 뒤 물었다.
“많이 바쁘지?”
“음~뭐, 그렇죠. 오라는 곳도 많고, 가라는 곳도 많고.”
“그래도 오늘은 용케 나왔네? 회사에서 안 잡았어?”
게이트 너머로 가는 거야 휴식 시간이 필요해서 넘어 간다 쳐도, 다른 행사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워낙 개척자들이 사회적 이슈로 자리잡다보니 부르는 곳이 넘치고 넘친다. 연줄 좀 된다 싶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에 전화를 해서 자기네 쪽 일에 얼굴 한 번 비춰 줄 수 없냐고 묻곤 한다. 그 스트레스 때문에 소향의 성격이 날카로워 진다고 하니 얼핏 이해는 간다.
서율이가 창 밖 풍경에서 시선을 돌리며 답을 했다.
“오늘 하루는 전부 빼 달라고 말 했어요. 안 그러면 행사 불참도 각오하라고 으름장 놨죠.”
“하하. 그렇게 세게 나가도 되는 거야?”
“사실 아쉬운 건 제가 아니니까요. 잘 보여야 한답니다.”
“오~갑의 횡포.”
“말이 그렇다는 거라고요.”
횡포고 뭐고 부릴 사람이었다면, 깨어난 나를 보며 그리 반기지 않았겠지. 죄책감에 반응하는 건 용서를 구하고 그 신의를 얻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무시하고 배척하여, 그것을 떨쳐내려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미안 할 때 미안하다 말 하고, 잘못 했을 때 잘못한다 말 하는 것.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그럼, 서율이의 금 같은 시간을 위해서라도 내가 최선을 다해야겠네.”
“아, 됐어요. 그냥 가서 밥 먹고 편히 쉬다가 오면 돼요. 그 정도면 저한테는 충분한 힐링이랍니다.”
“월드스타같은 대답인데, 그건?”
“에헴. 이제 알아보셨어요?”
평일에 이렇게 만난 서율이는 평소보다 밝았다.
회사와 게이트 인근에서는 무언가 억눌린 느낌이 심했다. 잘 해야 한다는 압박이라고 해야 할까. 주변 사람들 눈치도 꽤나 보고 힘겨워 하는 면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럴 거 같다. 개척자가 현재 높은 가치의 인간으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만큼 부담도 심하다. 전 세계, 각국에 나타난 게이트와 개척자의 숫자는 한정적. 군, 정치권, 민간기업, 운동권 등. 그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목소리 높이려 드는 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내 부하 직원으로 있을 때가 사회 초년기.
몇 년 지났다고 그것에 익숙해진 능구렁이가 되지는 않는다. 부담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오늘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쉬엄쉬엄 하라고. 나도 겪어보니 알겠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
“음……”
“이 일을 안 하면 죽을 거 같고, 고과에서 까이면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거 같지. 하지만 그렇게 절박 한 일은 많지 않아. 돌이켜 보면 너무 삶에 매몰되어 있었던 거뿐이지. 혹시 놓치고 지나가는 건 없었나. 내가 소홀히 한 건 없었는지.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살펴보라고.”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그녀는 2년 반의 삶을 잘라내 버린 나만큼이나 변화에 휘둘리고 있을 것이다. 그대로 환경에 휘둘려서 살다보면 자기가 원하고, 찾아야 하는 게 뭔지를 놓치고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다.
나도 그랬으니까.
“삼촌도 그랬어요?”
“……그랬지. 2년 반이라는 시간이 그대로 있었다 해도, 지금의 나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결국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나왔던 것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지.”
“아, 죄송해요. 그런 걸 물어보려고 한 건 아닌데……”
아내는 둘째 치더라도 미소와의 관계는 놓치고 간 것이 너무 많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라도 내가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미안해하는 서율이에게 괜찮다고 말을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미소도 드라이브는 꽤 좋아 했는데. 나중에 이 차 탈 일이 오면 운전하겠다고 달려드는 거 아닐까 모르겠어.”
“아, 그럼 그냥 지금 불러요. 시간도 넉넉한데 괜찮으면 태워서 가죠 뭐.”
“음……그건 좀 곤란해.”
태연하게 답을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왔다.
끓는 소리에 서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봤다. 살짝 걱정하는 기색. 또 무언가 잘못 말 했나 싶어 전전긍긍이다. 악의는 없는데, 가끔 이렇게 잘 찌른다. 머리를 긁적이고는 답을 했다.
“그냥 좀 지금은 사이가 그래.”
“……왜요? 삼촌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거뿐이잖아요. 깨어났으면 당연히 좋아해야 할 거 같은데.”
“그건……”
살짝 더웠다.
창문을 반쯤 내렸다. 솔잎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내 일. 끌어안고 갈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연을 혼자서 안고 끙끙거리는 건 꽤나 괴롭다. 나도 마찬가지. 옛적 같았다면 오래된 친구를 불러 술 한 잔에 털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2년 반의 공백을 남기고 난 뒤로는 일부러 찾지 않았다.
약하게 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짐을 하고 딱 뭉쳐서 나아가려는데, 옛 향취를 지닌 사람들과 엮이게 되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수 있었다. 지금은 나와. 내 앞일만 보며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 머뭇거림을 읽었는지 서율이가 다시 말을 붙여왔다.
“무슨 일이 있다면 제게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요? 사고가 난 것도 저 때문이고……힘든 일이 있으면 같이 나누고 싶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그래도……”
촉촉한 눈매를 보니까, 또 다그치기가 힘들다.
이래서 여자는 얼굴이 무기인가보다. 창밖을 슬쩍 내다 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안다. 사실 나도 털어놓고 누군가와 의논하고 싶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부르는 건 결국 소통에 대한 요구 때문이다. 홀로 외딴 섬에 표류한 사람이 나뭇가지 세워놓고는 지미니, 벤이니 하면서 이름 붙이는 것과 같다.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황당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쉬겠다고 나온 아이한테 이렇게 부담을 더 주는 것이 못나다 싶지만, 이미 입이 열리고 있다. 반짝이는 서율이의 눈을 곁눈질로 살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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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럴 수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서율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해자가 딸과 결혼을 해서 살고 있다니. 그런데 그 딸은 또 어떤 이유로 그 집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지를 못한다.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고,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울지 마. 새 차에서 울면 시트 갈아야 하잖아.”
“후아. 후아. 안 울어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자기 아빠를 친 사람과 같이 살다니……”
“무슨 이유가 있겠지. 말 못 할 이유가.”
그래야 했다.
“삼촌, 근데 그 남자가 L그룹 사장 아들이라고 했죠?”
“아아. 하지만 너랑 같이 왔던 그 사람은 아닌 거 같아. 이름도 다르고, 결혼도 안 했다면서.”
“아뇨, 그게 아니라 들은 게 있어서 그래요. 차 남혁 씨가 예전에 말 한 적이 있거든요. 매일같이 말썽 부리던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결혼 시켜서 내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요.”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네. 개척자가 되고나서 얼마 안 지난 시점에 몇 번 같이 만났었거든요. 그때야 워낙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국가가 직접 수습을 했었죠. 보름? 그 정도를 한 곳에서 같이 지냈었어요.”
내가 찾아본 자료에서는 차남혁에게 동생이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L그룹의 자제 정도면 사생활이 꽤 드러나야 정상. 동생이라 말 한 것이 친동생이 아닌 걸까?
“묘하네. 직접 가서 멱살 잡고 물어보면 간단하지만, 미소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럼! 그럼, 제가 좀 알아볼까요?”
“응? 무슨 소리야 그건?”
“아는 사람 중에 이런 쪽으로 아주 대단하신 분이 있거든요. 반년 전이었나? 스토커로 고생 할 때 그 분이 도움을 주셨어요. 이번에도 부탁하면 들어주실 거 같은데.”
“사립탐정 같은 거냐? 심부름센터?”
“비슷해요. 사람 찾고, 뒷조사 하는 데는 자기만한 인물이 없다나? 조금 짓궂은 면이 있기는 하지만 좋은 분이세요.”
처음에는 조금 아니다 싶었는데, 듣다보니 또 혹하는 구석이 있다.
미소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남편이 어떤 인간인지. 내가 제대로 아는 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대놓고 쳐들어가는 것도 못할 짓. 이럴 때 전문적으로 이를 캐내 주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면 그게 또 한 가지 방법이 될 것도 같다.
게다가 서율이가 이렇게까지 말 하는 걸로 봐서는 사람이 나쁜 거 같지도 않다.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 만나 볼게. 자리를 마련해 줄래?”
“그렇게 해요! 제가 연락 넣어 둘게요.”
“비용은? 무료로 일 할 리는 없을 테고.”
“그 비용도 제가……”
“아니야. 차야 어쩔 수 없이 받았다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내가 지불 할 테니까 비용만 말 해 봐.”
공짜가 좋다지만, 죄책감 이용해서 돈 뜨는 악질이고 싶지는 않다.
차 받았으면 됐다. 이 정도에서 지난 일은 툭툭 털어 낼 필요가 있다.
서율이가 손을 꼬물거리고 고민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평범한 사람이면 오백만 원. 접근이 어려운 유명인사면 천만 원. 리스크가 큰 인물이면 이천만원. 이렇게 알고 있어요.”
“L그룹 자손이면 세 번째에 속하겠네?”
“네……”
“그 정도면 괜찮아. 너무 불쌍하게 보지 말라고.”
“안 그랬어요, 뭐……”
서율이가 입을 비죽이며 답을 했다.
그렇게 돈 없어 보였나? 물론, 당장 가진 거야 집과 얼마 안 남은 통장 잔고이지만 그래도 이 천 만 원 정도는 마련 할 능력이 있다.
“그럼 그렇게 부탁을 할 게.”
어쨌든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정리해야 할 거 같다.
목적지로 삼았던 음식점이 슬슬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한참을 달리고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내 배에서도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오늘은 좀 많이 먹어야 할 거 같다.
※작가의 말
오늘은 한 편 더 갑니다.
전개 상 조금 설명이 많은 부분이라 빨리 뽑는게 좋을 거 같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