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신앙이라는 것은 본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농사에 몸담은 사람은 비의 신이나 풍요의 신에 기도를 올리곤 한다.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은 전쟁의 신. 혹은 생명의 신에게 자신의 안전을 위탁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음식이면 음식, 출산이면 출산. 필요한 것들에 맞춰서 신의 이름은 퍼져왔고, 그 은복을 누림에 있어서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은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지배민들을 하나로 묶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기에 본래 있던 민간신앙을 모두 금지시키고 하늘의 신 아스모포스를 섬기게 했다. 제단이 있던 곳은 모두 아스모포스의 신상이 들어섰고, 이에 반발하는 이들은 모두 죄를 물어 투옥되었다. 그것이 벌써 수년 전. 제국 내, 혹은 그 인방 지역에서는 다신에 대한 믿음은 죄와 같이 여겨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스모포스가 아닌 다른 신을 믿으라는 쿤의 제안은 꽤나 파격적인 것이었다.
설사 라라와 루루가 다신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도.
“서 준경 신을 말인가요?”
[경험치가 증가했습니다.]
라라가 서 준경이라는 신명을 언급하자, 다시 알람이 들려왔다.
쿤이 ‘역시……’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희도 어릴 때부터 아스모포스를 섬겨 왔는데요?”
“상관없다. 서 준경 신께서는 구별 없이 모두를 대하신다. 그분은 위기에 처한 종복을 돕기를 원하시고, 은혜로 험난한 여정에 빛을 밝혀 주신다. 지금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그분께서 도움의 손을 내미신다면 어렵지 않게 해쳐나갈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그래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데요?”
망설이는 라라와는 달리 루루는 관심을 보였다.
성격 차이다. 라라는 조금 신중한 면모가 있는 반명, 루루는 일단 달려든다. 그 만큼 감정의 변화도 크고 사람의 말도 쉽게 믿는다. 이번에는 그 성격이 쿤을 돕고 있다.
“일단은 그 분께 제물을 올려야 하는데……”
쿤이 창고 주변을 돌아봤다.
나무 상자가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쓸 만 한 게 있나, 눈알을 굴리며 찾자 구석에 오래 된 물그릇이 하나 보였다. 안쪽에서 노예를 가두었던지, 아니면 작은 짐승을 길렀던 모양이다. 들어서 소매로 안을 닦았다. 비루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형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쿤이 그릇을 바닥에 놓고는 손등을 위로 한 채 두 소녀에게 보여주었다.
“서 준경 신이시여. 당신에게 공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평소에는 이렇게 안 한다.
그냥 물건만 틱 올리고 고개를 숙이면 공물이 바쳐진다. 하지만 포교에 중요한 게 뭐겠는가? 그럴싸한 모양새다. 사람은 보는 것에 현혹되기 쉽다. 그리고 이는 서 준경 신 역시 동감하는 바인가 싶다.
푸른빛이 손등에서 새어나오고, 그릇이 은은하게 빛났다.
“와, 와아!! 이, 이게 말로만 듣던 성력인가요!?”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대단해……굉장히 신성스러운 느낌이야.”
“투박한 물그릇에서 은총을 내리시다니, 서 준경 신은 굉장히 마음이 넓으신 분이군요.”
정해진 제단과 격식이 없이도 신성력이 발휘되고 있다.
커다랗고 웅장한 제식만 보아왔던 라라와 루루의 입장에서는 이 광경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손으로 그릇을 툭툭 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나는 그 분께 바라는 것을 빌며 공물을 바친다.”
“공물이면 어떤 걸 바쳐야 하나요? 황금이나 코어메탈? 아니면 오래된 고문이나, 성스러운 보검?”
“……나는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바쳐왔다. 서 준경 신께서는 가치 있는 것들을 원하신다. 그 가치라는 것은 비단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을 터. 일단은 소중히 여기던 물건 같은 걸 넣어 봐라.”
단검이나 동화. 혹은 그릇. 황금과 코어메탈을 언급하는데, 그걸 나열하기는 조금 창피했다. 쿤이 두루뭉술하게 답을 한 뒤 그릇을 툭툭 쳤다.
“그럼 이걸로 해 볼게요.”
“루루야. 잠시만. 너 정말로 서 준경 신을 믿으려고 하는 거야?”
“아빠가 그랬잖아. 신의 믿음은 어디에나 있는 거라고. 지금 같을 때 믿음을 줄 대상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루루가 의외로 당차게 나오자 라라가 할 말을 잃었다.
믿음 줄 대상이 있다면 충분하다. 아스모포스를 직접 알현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말 없는 라라를 잠시 바라보다, 루루가 귀에 걸고 있던 귀고리를 뺐다.
은색에 무늬가 없는 투박한 형태였다. 혹시 또 마법 도구인가 싶어 쿤이 봤지만, 그녀가 미리 읽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릴 적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거예요. 대단하지 않은 물건이지만 지금 가진 다른 것들보다 훨씬 가치가 높아요. 이 정도면 공물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쿤도 아직 공물에 대한 것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흐릿하게 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가.’ 루루가 작게 속삭이고는 귀고리를 그릇 위에 올려놨다.
화악.
옅은 빛이 그릇 안쪽에서 새어나왔다.
신비한 광경. 루루와 라라가 눈을 크게 뜬 채 이를 비켜봤다. 쿤도 마찬가지. 이런 건 처음이었다. 그 동안 공물이 사라지는 건 단순했다. 그냥 눈을 깜박이면 사라져 있었으니까. 이렇게 화려한 효과를 남긴 적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빛이 잦아들었다.
그릇 위에 올려 둔 귀고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40의 신성점수를 획득했습니다.]
[축복이 개방되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단계가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 1증가합니다.]
동시에 주르륵 올라오는 알림.
쿤은 하나하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눈알을 굴려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신성점수를 획득하고 축복이 개방? 경험치야 그렇다 치지만 단계는 또 뭔가 싶다.
“되, 된 거예요?”
그때, 루루가 물어왔다.
눈을 반짝이고 있다. 눈앞에서 공물이 사라졌으니 신과 소통이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쿤이 어떻게 답을 해야 할 지 잠시 망설였다.
“잠시만.”
쿤이 손짓을 하며 손등을 두드려서 창을 열었다.
모를 때는 확인하는 게 옳은 판단이다.
***
이름 : 쿤 타이 / 서 준경(두 번째 단계) 종족 : 인간
힘 : 13 민첩성 : 11
체력 : 16 지능 : 13
스킬 : 맹약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 - 집중 사고, 하급 은신, 하급 행운, 하급 화술, 하급 위기 감지, 하급 청력
축복 : 하급 신관의 축복, 하급 상처 치유의 축복, 하급 질병 치유의 축복
신성 점수 : 201
***
뭔가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특히 아래쪽 축복 창이 눈에 띄었다. 두 번째 단계로 들어서면서 생긴 건지, 아니면 신도가 늘어서 이리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큰 변화가 생긴 건 분명했다.
일단 가장 앞쪽의 하급 신관의 축복부터 눌러 봤다.
***
하급 신관의 축복
공물을 바친 대상에 한해서 하급 신관의 표식을 남길 수 있다.
하급 신관은 선택된 자(쿤 타이)의 하위 계층으로 들어가며, 공물 가치의 일 할을 신성 점수로 치환한다.
하급 신관은 축복을 내려 준 대상과 연결이 되며 상호 동의하에 끊을 때 까지 이는 영구히 지속된다.
***
“세례?”
쿤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하급 신관의 축복이라는 건 고위 신관이 일반 신도에게 내리는 세례와 흡사했다. 공물의 가치 일 할이 신성 점수로 치환되고 연결된다는 요상한 설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러했다.
“세례요? 뭐가 보여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라라와 루루가 물어왔다.
쿤이 고개를 든 채 잠시 머뭇거렸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 지 난감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었다. 루루는 신도가 되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그대로 응해주면 된다.
“하급 신관의 축복.”
쿤이 손을 내밀며 루루를 향해 그리 말 했다.
그러자 푸른빛이 손등에서 새어나가 루루의 손에 얽혀 붙었다. 그녀는 신비한 광경이 멍하니 보다 손에 달라붙는 기운에 깜짝 놀라며 쿤과 라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걸 받아들이면 신관이 되는 거야.”
“어, 어떻게요?”
“그냥 신관이 되겠다고 말을 해.”
“시, 신관이 될게요.”
쿤도 아는 바는 없지만, 상식선에서 답을 해 주었다.
그러자 루루의 손등에서 맴돌던 빛이 이내 쑥 하고는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옅은 황색의 문양. 쿤의 것과는 색과 모양이 다르지만, 무언가 독특한 것이 그녀의 손등에 새겨졌다.
“와, 와아! 이게 뭐에요?”
“뭔데? 루루야, 뭔가 생겼어? 어디에?”
“어? 언니는 이게 안 보여?”
“뭐가? 손등에 뭐가 있어?”
“응. 노란 색으로 예쁜 문양이 생겼어.”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루루에게 새겨진 문양도 일반인에게는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둘을 잠시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루루, 한 번 문양을 손으로 두드려 봐.”
“이, 이렇게요?”
루루가 손등을 툭툭 쳤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다 고개를 기울이며 쿤을 봤다.
“아무것도 안 생겨?”
“뭐가요?”
“음. 잠시만 있어 봐.”
쿤이 답 대신 손등을 두드려서 창을 다시 열었다.
앞서 보았던 것과 같은 창 아래로 루루의 얼굴이 작게 떠 올라와 있었다. 실력 좋은 화공의 그림과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 손으로 툭 쳐 봤다.
***
루루(하급 신관)
하급 축복 개방 - 50
***
루루의 이름과 설명. 짧은 선택지가 아래로 떠올랐다.
찬찬히 살펴보니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사용한 능력은 하급 신관의 축복. 즉, 누군가를 하급 신관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이 축복을 받은 사람은 서 준경 신을 모시는 신도가 되며, 쿤 자신과 연결이 된다.
아래에 나온 하급 축복 개방이라는 것은 상위 신도가 내려 줄 수 있는 축복.
즉, 신의 권능이다.
‘그렇군! 그녀는 하급 신관, 나는 고위 신관이야.’
타당하다. 신에게 가장 먼저 선택받은 존재가 고위 신관의 위를 받아, 그 아래의 신관을 모집하는 일. 늘어나는 신도는 신의 힘이 되고,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결국 계급이 필요하다. 지금 개방 된 축복은 그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응?’
그런데, 그때 띄워 둔 창의 일부가 바뀌었다.
[하급 신관의 축복(1/5)]
‘무한정 사용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구나.’
당연한 말이다.
제한 없이 사용 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길 가던 사람 잡아서 공물을 바치고 신도가 되라고 하면 그만이다. 숫자가 정해졌다는 말은 단계가 올라가거나 다른 조건을 만족시키면 늘어 날 것이라 생각이 된다.
“벨포드 씨, 이걸로 된 거예요?”
“음. 아무래도 넌 하급 신관이 된 거 같아.”
“하급 신관이요?”
순진하게 물어오는 루루를 보며 쿤이 생각했다.
과연 어떻게 설명을 해야 그녀가 가장 긍정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일까. 첫 신관이다. 음식점도 첫 개시가 좋아야 하루가 즐거운 법. 신도가 된 그녀가 긍정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주어야, 두 번째, 세 번째 오는 사람도 좋게 반응 할 확률이 높다.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넌 이제부터 나와 마찬가지로 서 준경 신을 모시는 신관이 된 거야. 아까 공물을 바치는 걸 봤지? 그렇게 마음에 우러나는 공물을 바치게 되면 신께서 이에 반응을 하실 거야.”
“신께서요? 어떻게요?”
“직접 겪어보는 게 낫겠지. 본래는 앞선 공물로 부족한 것이지만, 내가 특별히 신께 간청을 해 볼게.”
쿤이 어마어마한 것이라도 된 냥 말을 한 뒤 눈을 감았다.
누차 말하지만 모양새가 중요하다.
루루의 심정소리를 귀로 음미하다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시 창을 재빨리 열어서 하급 축복을 개방하였다.
사아아아……
연 노란 색 빛줄기가 루루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100점 만점에 100점 짜리 연출이다. 루루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 봤다. 새어나오던 빛은 눈을 몇 번 깜박일 시간 동안 머무르다 천천히 사라졌다.
“어, 어때?”
말없이 보던 라라가 물었다.
깜빡. 루루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 더 없이 밝은 목소리로 답을 했다.
“상쾌해……상쾌해! 정말로 기분이 좋아졌어! 언니,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악취나 거슬리는 촉감이 전혀 안 이상해. 완전히 새 몸 같아. 세상에! 갑자기 이렇게 바뀔 수 있나?”
“그, 그 정도야?”
“응! 신의 축복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와아~!”
밀항을 하기 위해 창고에 숨어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건지, 루루가 목소리를 높이며 방방 뛰었다. 쿤이 황급히 입을 손으로 막이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게 정말로 기분을 좋게 만든 것 같았다.
방실방실.
라라가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녀를 한참이다 바라봤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주먹을 꼭 쥐고는 쿤을 돌아봤다.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벨포드 씨. 저도 개종을 하겠어요.”
말은 안 하였으나, 땀 냄새와 거친 옷의 촉감.
생소한 일의 스트레스는 그녀를 꽤나 짓누르고 있었다.
신의 축복. 그것이 필요했다.
※작가의 말
피라미드의 진정한 시작이군요.
모든 신도(신관)을 준경이 직접 관리하지는 않습니다. 준경이 케어하는 건 오직 쿤 뿐입니다.
* 하급 신관의 축복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신성 점수가 소모됩니다.
* 한 번 신도(신관)이 되면 공물을 쿤에게 양도하여 제물로 바칠 수 없습니다.
* 현재 경험치는 포교로만 오릅니다. 레벨 상승시 올 스텟 증가와 추가 능력의 개방이 있습니다.
* 준경은 포교를 할 수 없습니다.
* 준경이 경험치 얻는 방법은 차후 등장합니다.
재밌게 보고 가세요.
변화 편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준경의 이야기도 살살 나오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