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6화 (26/240)

쿤은 탈력으로 늘어진 몸을 독려해서 일으켜 세웠다.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조금 전까지 불처럼 타오르던 기력은 더 이상 없었다. 그것이 ‘분노’의 효과임을 안 것은 머리가 조금 명쾌해 졌을 때다.

죽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죽는 순간까지 저항을 한 건지 얼굴이 상처 투성이었다. 바닥에 남은 천을 들어 몸을 덮어 주고는 몸을 돌려세웠다. 묵념은 목 찔러 죽인 습격자의 시체로 충분했다.

‘시간이 없다.’

남자와 싸운 탓에 시간이 촉박하다.

다른 쪽으로 퍼진 일행에게 걸리지는 않은 듯하지만 머뭇거리다가는 모두 그르칠 수 있었다. 발끝에 힘을 주며 선실을 빠르게 지나쳤다.

얼마 안지나 1층 선실에서 갑판으로 통하는 문이 나왔다.

밖을 살피니 대부분 위로 올라갔는지 인적이 없었다. 들키지 않은 채 거꾸로 움직인 게 도움이 됐다. 심호흡을 하고는 벽면을 따라 갑판 쪽으로 나왔다.

‘있다.’

굵은 줄로 둘둘 말린 구명정이 갑판 구석에 놓여 있었다.

굉장히 어설퍼 보이는 외관이지만, 가볍고 튼튼해서 비상시에 쓰기에는 좋다. 게다가 지금과 같을 때는 차라리 허름한 것이 낫다. 혼자서 들어, 바다로 던지려면 단출한 구명정이 필요하니까.

‘저게 습격자들이 타고 온 배인가?’

아래쪽으로 작은 조각배가 보였다.

잘 해 봐야 대여섯 명 정도가 타고 올 수 있는 크기다. 여객선과 비교하면 매우 작다. 그 말인즉슨 그들 말고 내부 동조자가 도움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융……이라고 했나? 그냥 방조자가 아니었다는 말이군.’

결국 일은 더 어렵다는 말이다.

그의 실력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 싸우는 것은 절대로 무리다. 이를 앙다물고는 구명정 주변의 끈을 풀어냈다.

‘조각배에 한 명. 머뭇거리면 당한다.’

쿤이 심호흡을 한 채, 허리춤에 둘둘 말아 두었던 천을 꺼내 들었다.

객실에 있던 등에서 기름을 빼어 먹인 천이다. 던지게 쉽게 둥글게 만 뒤 손끝에 올렸다. 축축할 정도로 기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치익. 쿤이 단검을 갑판 모서리에 긁었다.

불꽃이 팍 하고 튀었다. 야숙하며 불 피우는 건 지겹도록 해 봤다. 이 정도는 쉬운 편. 뛰어오른 불꽃이 올려 둔 천으로 옮겨 붙었다.

후욱……!!

쿤이 망설임 없이 불덩어리가 된 천을 아래쪽 조각배로 던졌다. 거리가 조금 있지만 빗나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법 손재주는 있다. 단검 돌리고 돌 던져서 사람 맞추고. 이런 일에는 능숙하다.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불덩이가 조각배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뭐, 뭐야!? 불이다!!”

혼자서 망을 보던 남자가 기겁을 해서 천을 치우려 했다.

하지만 둥글게 말아 둔 천은 떨어지는 충격에 옆으로 축 퍼졌다. 기름까지 잔뜩 먹어 무거워진 천은 손으로 떼기 힘들 정도로 바닥과 일체가 되었다. 남자가 버둥거리던 사이 불은 금세 옮겨 붙었고 조각배는 이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불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바다로 뛰어 들었다.

“끄으으응!!”

지금이 기회.

쿤이 끈을 벗겨 둔 구명정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가벼운 나무로 만들었다지만 그래도 상당한 무게. 이마로 핏줄이 솟고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끄아아아아!!”

구명정을 못 내리면 계획은 여기서 끝이다.

없던 힘까지 죄다 끄집어내어 구명정을 들어 올렸다. 기우뚱 하며, 몸체가 난간에 걸치더니 엮인 고리를 타고 아래쪽으로 쭉 떨어졌다.

철썩~!!

꽤나 큰 소리가 났다.

선실 통로는 모르겠지만, 밖과 닿는 선실 안쪽에서는 분명 들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다음부터는 두 계집아이에게 달렸다. 훌쩍 몸을 날려 줄을 잡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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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 안에서 내통을 하고 있다면 단순히 사람 하나 납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쿤은 전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의 진중한 목소리에 두 소녀는 귀를 쫑긋거리며 집중을 했었다.

“사람을 부려 납치를 할 거였다면 선상보다 좋은 곳이 있었을 터. 이 장소를 선택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요?”

“지금 이곳은 제국과 공국의 경계. 정확하게는 공국 쪽에 가깝죠. 만약 납치 주모자를 공국 쪽으로 몰고자 하는 생각이라면 적당한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선상이라는 것은 배 안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목격자가 생길 수 없는 장소.”

“……설마?”

“네. 납치가 아닌. 배 안의 모든 사람을 죽여 일을 꾸밀 확률이 높습니다.”

그 당시는 최대한 겁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었다.

가능성이 높다기 보다는 그럴 수 있다 정도.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감일까? 아니면 이 또한 서 준경 신의 가호? 쿤은 확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어떤 목적으로 두 분을 납치한다 하여도 함부로 대하기는 힘들 겁니다. 이 정도의 일을 꾸미면서까지 감행하는 일이면, 두 분의 존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겠죠. 그렇기에 만약의 일이 생긴다 해도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당부하기를 이러했다.

“상황이 난감하다 하여도 당황하지 말고, 2층 객실 테라스로 갈 수 있게 요청하세요. 상대가 두 분을 중히 여긴다면 그 정도 조건은 받아 줄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 섰을 때 아래쪽에 제가 보인다면 바로 뛰어 내리세요.”

어린 두 소녀에게 맡기기에는 꽤나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쿤 스스로의 무력으로는 상황을 해결 할 수 없다. 기략으로 상황을 해쳐나가는 것이 최선.

‘와라, 와라……’

지금 상황이 딱 그러하다.

쿤은 전날의 대화를 머리에서 지운 채 객실 밖으로 튀어나온 테라스를 바라봤다. 고위급 인사들에게 제공하는 선실답게 도드라진 장소가 있었다. 지금 보이는 테라스가 그것. 쿤이 구명정을 띄워서 이동한 곳이 바로 그 테라스 아래쪽이다.

조각배에 타고 있던 남자는 헤엄을 쳐 여객선 옆 사다리에 붙어 있었다. 자기 몸 건사하기 위해 도망친 덕에 아직도 쿤을 발견하는 것이 늦어졌다. 그 사이에 그가 근처로 접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이, 방금 무슨 소리야!?”

“어! 뭐야? 배가 불타고 있잖아!!”

2층 객실 부근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객실의 창으로 불타는 조각배를 확인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다. 만약 다른 이들이 개입하여 구명정으로 다가온다면 쿤은 두 소녀를 버린 채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맹약이 실패 하겠지만 이곳에서 잡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제발. 제발. 서둘러라.’

노를 꽉 쥔 채 기도했다.

덜컹.

그리고 그때. 기도가 통했는지, 테라스 문이 열렸다.

테라스의 난간은 허리밖에 안 오는 낮은 높이다. 잠시 기다리자 기다리던 두 소녀의 얼굴이 그 위로 나타났다.

“뛰어!!”

쿤이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두 소녀가 전날 들은 대로 사람을 물리고 테라스로 나온 거라면 검은 옷의 남자들과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면 아래로 뛰어 내리기에는 충분한 틈이 된다. 이 순간 아니면 기회가 없다.

주춤. 주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망망대해를 눈 아래에 두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테라스로 나온 두 소녀가 난간을 잡은 채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머뭇거리면 늦는다.’

둘을 데리고 테라스까지 온 사람도 이상을 감지했을 것이다.

실력을 고려하면 한 호흡도 남지 않은 상황.

“쿠타타가 뒤에 있다!!!”

쿠타타. 통칭 밤의 악마라 불리는 존재의 이름이다.

어린 아이들이 잠에 들지 못하면 부모가 부르는 동화 속 존재. 쿠타타가 찾아와 잡아간다. 쿤은 지난 여정 중에 쿠타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라라와 루루는 진짜 인 것처럼 극적으로 반응하였고 그 날 저녁은 잠이 안 온다면서 칭얼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머뭇거리던 몸을 떠 밀어 주는 도우미가 되었다.

“꺄아아악!!”

“꺄아아아!!”

두 소녀가 그대로 바다로 낙하했다.

첨벙 소리가 들리고 물보라가 일었다. 쿤이 빠르게 노를 저어 다가가 둘을 건져냈다. 꼬륵꼬륵 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일단 내려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저기 있다!! 잡아, 멍청이들아!!”

곧바로 테라스 쪽에 검은 옷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활을 무장으로 챙겨 온 놈은 없었다. 악 바친 한 놈이 단검을 뽑아 던지려 하자, 곁에 있던 자가 말렸다. 혹시나 단검이 라라나 루루에게 맞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쿤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는 그대로 노를 저었다.

“배를 대!!!”

“타고 온 배가 불에 탔습니다!”

“뭐야!? 구명정은!? 다른 배들은 어디 있어!?”

위쪽에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바다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아쉽게도 이 배의 구명정은 쿤이 타고 있는 것, 하나뿐이다. 타고 온 배도 태웠으니 당장 그를 쫒는 건 무리. 여객선을 끌어 추격을 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고 그 정도면 쿤이 해류를 타고 방울 군도로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살았나……?’

쿤이 노를 저으며 힐끔 뒤를 돌아봤다.

뒤늦게 습격자들이 바다로 뛰어 들고 있다. 하지만 거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수영으로 쫒는다는 건 무리. 일단은 안전한 지역까지 빠져나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

하지만 그때, 아찔한 느낌과 함께 전신의 솜털이 전부 솟았다.

동시에 주변 경물이 느려지고 몇 가지 생각이 한 번에 머릿속을 지나갔다. 이건 무엇? 왜 갑자기 이런 느낌이? 생각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동시에 해답도 뱉었다.

‘위기. 무언가로 인한 위기.’

상황을 판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생각의 고리는 끊이지가 않았다. 곧이어 이를 대처해야 하는 방법이 폭죽처럼 튀어 올랐다. 앞으로 숙일까? 옆으로 몸을 돌릴까? 아니면 그대로 있을까? 몸의 느낌과 귀 끝으로 전해지는 작은 소리들. 몇 가지 단서들이 판단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무리.’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지금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상대 무리 중 이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거나, 융. 바로 그 자일 것이다.

틱. 틱. 하며 생각의 고리가 점차 가늘어져 갔다.

이어지던 사고가 종료되고 행동의 때가 온다는 의미다. 피할 수 없는 공격. 그것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한단 말인가.

쿤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

그리고 무언가 끊기는 느낌과 함께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앞이나 뒤. 몸 전체를 반전시키는 동작은 무리. 할 수 있는 한에서의 최선이었다.

스걱……!!!

그리고 그 결과는 어깨에 스쳐가는 커틀라스 하나로 되돌아 왔다.

피하지 않았다면 등부터 심장을 관통 당했을 것이다. 단검도 아니고 곡도를 이렇게 던지다니. 이건 인간의 솜씨가 아니다.

“꺄, 꺄아아악!! 벨포드 씨!!”

“피, 피가!!!”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던 둘이 피 튀는 쿤을 보며 다가왔다.

다시 솟구치던 위기감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이 융과 쿤 사이를 가린 것이다. 쿤이 이를 악 문채 웃음을 만들었다.

‘살았다.’

끼익.

한 팔로 양 쪽 노를 번갈아 저었다.

배는 점차 멀어져 갔다.

저 멀리서 융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한 걸까? 아니면 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한 건 하나.

이 난장판에서 쿤이 살아났다는 점이다.

※작가의 말

쿤의 이야기가 길게 늘어질까봐 빠르게 진행합니다.

다음 화에는 준경이 나오겠군요.

재밌게 보고 가세요.

오늘도 즐겁쿤, 신나쿤, 재미나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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