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5화 (25/240)

쿤은 조금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추위 때문? 아니다. 이건 본능이 경고하는 자명종과 같다. 침대 옆 와인을 한 잔 따라 입술을 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찰대의 단검을 허리 쪽에 찔러 넣고 몸을 움직여 상태를 점검했다.

긴장으로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것에 비해서는 상태가 괜찮았다. 몸 깊은 곳에서 미약한 청량감도 느껴졌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뭘 해도 괜찮았다. 어쩌면 신께서 보우 하시는 걸지도. 손을 모아 서 준경 신에게 기도를 한 번 한 뒤 방문을 살짝 밀었다.

‘없다.’

어제부터 이상함이 감지되었다.

3일간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이 갑자기 이탈을 시작 한 것이다. 군기가 빠져서 그런 걸리는 없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호출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럼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윽……!”

“너……! 그르륵.”

정말 기가 막힌 순간에 일어났다.

문 밖 코너 어귀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입을 손으로 막은 듯 억눌린 소리였다.

‘기습……’

예상했던 바이지만 실제로 다가오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배 안에 있던 남자들과 자신의 실력 차이는 명백하다. 하나 둘 정도는 어떻게 보신을 해 보겠지만, 그 이상은 절대로 무리. 정면 대결은 꿈을 꾸지도 못한다. 지금은 어떻게든 미리 세워 둔 계획대로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숨을 낮게 쉬며 발을 떼었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 치는 것 같다.

눈을 부릅뜬 채 살금살금 걸었다. 오감이 올올히 살아나 베일 듯 날카로워졌다. 끈끈한 해풍이 솜털 위로 지나갔다.

스……

작은 소리.

발을 멈추고 벽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숨소리도 나지 않게 입을 닫았다. 작게 흐르던 소리가 이내 가까워지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검은 옷에 검은 망토. 눈을 가린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항해가 진행되는 동안 배 안의 사람들은 최대한 눈에 담아 두었다.

단언하건데 처음 보는 사람이다.

‘이미 승선을 했구나……!’

기습이 오기 전까지 몸을 최선의 상태로 만들고자 일단 수면에 들었던 건데, 아차 했으면 자다가 골로 갈 뻔 했다. 이렇게 좋은 시점에 일어 난 것도 서 준경 신의 보살핌이 있기 때문. 속으로 은총에 감사를 하며 멀어지는 남자의 뒤를 눈으로 쫒았다.

현재 쿤이 있는 곳은 1층 선실.

습격자가 움직인 방향은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라라와 루루의 객실이 있다.

‘두 사람이 잘 해 줘야 하는데……’

설사 두 사람을 완벽하게 설득했다고 해도 쿤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물며 둘은 그런가? 하면서도 일말의 의심은 버리지 못했다. 그 동안 몸을 맡겼던 호위 중 일부가 배신하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쿤이 믿으라고 말 하는 상황이니까. 그렇기에 쿤은 적당히 의심을 심어 주었을 때, 한 가지 조건을 걸어 두었다.

‘지금은 믿는 수밖에.’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지금은 그녀들이 현명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고 본래 목적을 향해서 움직여야 할 때다. 숨을 고르고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

“아래층은 전부 처리했나?”

1층 선실을 타고 갑판 쪽으로 걸어가던 중 쿤은 낯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계단이 갈라지는 지역. 앞서 보았던 검은 옷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손에는 날카롭게 휘는 커틀라스를 들고 있었는데, 끝에서 반짝이는 액체는 분명 피였다.

“객실에 없던 사람이 몇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둘은 밖에서 잡았지만, 아직 하나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누구지? 걱정해야 하는 놈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융이 마지막에 태운 인물인데, 떠돌이 여행자라고 합니다. 아마 바람을 쐬러 나갔다 길이 어긋난 모양인데 잡히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흠.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지. 람, 호피. 너희 둘도 아래쪽을 살펴라.”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인물들이 통로를 타고 흩어졌다.

남은 이들은 작게 속삭이고는 위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이내 조용해졌다. 쿤은 그제야 막았던 입에서 손을 떼고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선실이 제압되었다면 이제 금방이다. 서둘러야겠어.’

쿤이 원하는 건 갑판에 비치 된 구명정.

왕래가 많은 여객선이라 그런지 잘 정비되어 놓여 있던 걸 확인해 놨다. 갑판까지 전부 장악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회만 잡을 수 있다면 구명정을 던지고 바다로 도망 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마법사가 아닌 이상에서야 바다로 도망치는 사람을 잡기는 어렵다.

끼이익……!

“어?”

“뭐!?”

그때, 갑자기 쿤이 걸어가던 통로 옆 객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옷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1층은 모두 수색을 끝내고 따로 인원을 배분 한 것이 아니었나? 쿤은 크게 당황을 했다.

“너……”

남자는 빠르게 당황을 수습하고는 허리에 찬 커틀라스를 뽑으려 했다.

그가 객실 안에서 뭘 하려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대로 남겨두면 위험하다. 쿤이 앞으로 뛰어 들며 남자와 몸을 부딪쳤다.

쿵. 열려있던 문으로 두 사람이 엉겨 붙으며 굴러 떨어졌다.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큭!!’ 남자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틀어 쿤을 튕겨냈다. 엉키던 쿤이 객실 옆 작은 의자에 부딪힌 채 데굴데굴 굴렀다.

“이 새……!”

쉬익!!

말을 할 틈을 줄 수는 없다.

쿤이 구르던 탄력으로 몸을 세우며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서 던졌다. 바람이 잘게 갈라지고 남자가 기겁을 하며 몸을 돌렸다. 터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 박힌 단검이 크게 울었다.

‘뽑게 해서는 안 돼!’

커틀라스는 베는 데 특화 된 무기다.

기량이 비슷하다면 무기를 뽑게 내어주면 막아 낼 방도가 없다. 이를 악물고 몸을 앞으로 튕기며 손을 뻗어 침대 옆 화병을 쥐었다.

콰창!!

남자가 손을 들어 화병을 막았다.

병이 깨어지고 물과 파편이 요란스레 튀었다. 반짝 반짝. 둘 사이로 조명에 반사된 물빛이 화려하게 흔들렸다. 잠시나마 시선이 그곳으로 빼앗겼다.

쩍―!!

아래쪽 사각에서 무릎이 올라와 쿤의 턱을 때렸다.

남자가 화병을 막는 것과 동시에 올려 친 것이다. 기민한 반응. 이격을 준비하던 쿤이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비틀비틀. 머리가 흔들려 두어 걸음을 힘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퍼억! 퍽!!

남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타를 갈겼다.

얼굴이 양쪽으로 돌아가고 머리가 더욱 세게 울렸다. 눈앞이 핑핑 돌아가 적을 살필 수가 없었다. ‘큭!’ 이를 악물고 몸을 앞으로 강하게 숙였다.

빠악. 얻어 걸렸다. 추가타를 위해 다가오던 남자와 쿤의 머리가 강하게 충돌했다. 핑 하고 머리가 돌았다. 속도 울렁거리는 게 오래 갈 타격 같았다.

“퉤!”

하지만 지금은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고인 핏물을 앞으로 뱉은 뒤 허리춤을 잡아채며 남자를 강하게 당겼다. 근접에서는 제국식 씨름이 최고다. 중심이 무너진 남자가 쿤 쪽으로 딸려왔다.

퍼억!!

하지만 남자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넘어지던 방향을 따라 팔꿈치를 휘둘러 쿤의 얼굴을 찍은 것이다. 얼굴 옆면이 길게 찢어져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찔할 정도의 고통이 몸을 쑤셔왔다. 스르릉. 귀로 칼날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자세를 바로 잡으며 커틀러스를 뽑고 있는 것이다.

“……!!!”

그때, 돌아가는 시선 속으로 객실 침대위의 모습이 잡혔다.

벌거벗은 채 싸늘하게 죽어 있는 여인. 하복부가 벌어져 있고 그 사이로 핏물이 언뜻 보였다. 쿤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왜 남자만 그 순간에 그 장소로 모이지 않았는지를. 잘 훈련된 정예병들 중에서도 욕구를 참지 못하는 자들은 있다. 이번에도 그러하다. 남자는 객실의 사람들을 처리하던 중에 여자를 보고 흑심을 품어 범한 것이다.

그리고 잔인하게 베었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쿤은 용병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더럽게 굴러먹는 인생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키는 것이 있다. 어미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다 나온 남자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

핑―!! 핑! 핑――!

눈앞으로 불꽃이 튀었다.

갑자기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어지럽던 시야가 바로 서고, 타격으로 풀렸던 팔과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그리고 커틀라스를 뽑아 든 채 비죽이 웃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까득.

이를 갈며 쿤이 앞으로 튕겨나갔다.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 위로 날 선 바람이 스쳐갔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베어졌다. 평소라면 피할 수 없는 공격.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었다. 발끝에 힘을 쥐어 몸을 세웠다.

쩌억. 정수리로 남자의 턱을 받았다.

피와 함께 이빨 몇 개가 옆으로 튀었다. ‘커르륵!!’ 무언가 외치고 싶지만 힘에 밀려 어렵다. 조금 전 기회가 있었을 때 주변에 도움을 처했어야 한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여 방심 한 게 잘못.

아니, 그 전에 짐승 같은 짓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남았던 것이 잘못이다.

쩌억!! 쩍!!

좌우로 한 방씩.

앞서 당했던 것을 그대로 갚아 주었다. 남자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좌우로 요동쳤다. 멱살을 잡은 뒤 강하게 당겼다.

“죽어라, 쓰레기.”

“……!!”

제국식 씨름의 기교로 남자를 들어 메친 뒤, 벽에 박혀있던 단검을 뽑아 그대로 목에 찔러 넣었다. 그륵. 그륵. 핏물과 거품이 입가에서 올라왔다. 팔과 다리가 살려달라는 듯 요동쳤다. 하지만 힘을 빼지 않았다.

대신 눈으로 물었다.

너는 저 이름 모를 여자를 죽일 때 물어나 봤냐고.

※작가의 말

오늘은 연참을 합니다. 다음 편도 보러 오세요.

지나가시기 전에 잊은 건 없는지 꼼꼼히 살펴 주세요.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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