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4화 (24/240)

이른 아침.

쿤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안내를 받아 여관 밖으로 나왔다.

8두 마차가 떡하니 여관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다. 고위급 인사들이 머무르는 장소임에도 이는 꽤 희귀한 구경거리인 모양. 수군거리는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잘 주무셨나요?”

조금 있자 라라가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채 나왔다.

활동성이 가미 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챙 넓은 모자. 나들이 가는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벨포드 씨! 벨포드 씨! 좋은 아침!”

뒤를 이어 루루도 나왔다.

눈 밑이 조금 까만 것이 아직 잠이 덜 깬 모양.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활기는 넘쳤다. 손을 쭉 핀 채 신나게 인사를 하며 뛰어 왔다.

“이쪽으로.”

나올 사람이 다 나오자, 검은 옷의 남자가 안내를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른다. 알 필요 없다는 쪽에 더 가까울까? 쿤이 힐끔 남자의 얼굴을 살핀 뒤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겉으로 보는 것만큼 화려하고 안락했다. 엉덩이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몸을 푹 묻었다.

“가는 길에도 재미있는 얘기 많이 해 주세요!”

타자마자 루루가 그리 외쳤다.

라라도 비슷한 눈길로 바라봤다.

‘공국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경험 많은 용병이라고 해도 이야기꾼이 아닌 이상에야 한계가 있다. 아마 공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야기 꺼리다 바닥나지 않을까?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라면서 베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상상.’ 쿤이 머리를 흔들며 창밖을 바라봤다.

‘위기 감지.’

전날 서 준경 신에게서 받은 특기 하나를 떠올렸다.

집중 사고와 함께 신이 점지한 특기. 바로 ‘하급 위기 감지’였다. 마법 반지가 어느 정도의 가치로 평가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은 분명히 반응을 보여 주었다. 집중 사고와 함께 필요한 특기를 주겠다……이렇게 말이다.

‘차라리 공국까지 도착해서 이야기꺼리 없다고 타박 받는 게 낫겠군.’

그렇지 않다면 가는 중에 위기에 봉착한다는 말이니까.

신이 직접 위험하다 특기까지 점지해 준 상황이니 너무나 명백하다. 맹약으로 맺어진 1000의 가치가 그냥 우연한 게 아니었다. 괜히 한숨이 나왔다.

다그닥.

말이 발을 굴렀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부두로 이동한 일행은 공국으로 향하는 정기선에 몸을 실었다.

방은 당연히 특실. 공국은 제국과 적대적인 상황이지만 무역까지 단절한 것은 아니다. 민간의 왕래나 사업적 거래는 여전히 활발하다. 웬델을 통해서 둘을 오가는 귀족이나 공화국 측 주요 인사들이 여럿 있으니 그에 걸 맞는 호화 객실도 구비되어 있었다.

쿤이 걱정하던 것은 신분 검사였다. 혹시나 제국 측에서 수배지를 뿌렸다면 불시 검사에 걸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검은 옷의 남자가 무어라 말 하며 신분증 같은 걸 보여주자 바짝 언 직원들의 안내를 받은 채 일행은 초고속으로 배에 올라 탈 수 있었다. 검사? 그런 건 없었다. 다들 허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굽힐 뿐.

배는 좋았고, 여정은 평온했다.

쿤이 힘들어 한 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라라와 루루는 여정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이야기와 신비. 그리고 사랑을 원했다. 소녀의 욕구라는 게 그리도 대단한 지 쿤은 그때 처음 알았다. 밥 먹다가도 눈을 반짝이고, 잠들기 전에도 베개를 들고 찾아와 이야기를 청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좀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검은 옷의 남자는 오히려 이를 독려했다. 물론, 말로 한 건 아니고 그 잘난 눈빛과 몸짓으로 그러했다. 안 하면 확 베어 버리겠다. 더럽고 차사해서 때려 칠까 하다가도 그 위압감을 몸으로 받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짜 냈다. 귀찮음과 피로를 느끼는 것이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니까.

철썩~! 철썩~!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벌써 3일이다.

이제는 거리로 따져도 제국보다 공국에 더 가깝다. 아마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공국의 순찰선과도 조우 할 수 있을 것이다. 길게 잡아도 이틀. 그 안에 배는 공국에 당도한다.

‘불안하네.’

분명 위험이 있다는 것은 맞다.

그런데, 지난 3일간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양질의 스테이크와 와인이 매끼마다 나오고 필요하다면 선실로 악단을 부를 수도 있었다. 너무 평화로우면 괜히 불안해 지는 법이다. 폭풍 전의 고요함이라 하지 않던가.

쿤은 머지않아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루루 아가씨께서 찾는다.”

“……!”

이게 특기인가 싶다.

어느새 쿤의 뒤편으로 검은 옷의 남자가 와 있었다.

“또 이야기 인가요? 이제는 저도 슬슬 소재가 바닥나 가는데 말이죠.”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두 분께서는 그것으로도 충분 할 테니까.”

“평소에 밖으로 잘 나오지 않나 보죠?”

“……이렇게 먼 거리를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쿤이 슬쩍 옆을 돌아봤다.

들어가서 이야기나 해라. 짧게 말을 자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분고분 받아주고 있다.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맛이 조금 짜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곱게 크신 분들이군요. 이야기를 잘 가려서 해야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네가 아는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들로……들려주도록 해라.”

“신기하군요. 보통 귀족가의 수행원이라면 저 같은 놈은 얼씬도 못하게 할 텐데 말이죠.”

“수행이라.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을까……”

“네?”

“아무것도 아니다. 들어가라, 아가씨께서 기다리신다.”

작게 속삭이는 말에 다시금 말을 붙였지만, 남자는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들어가라고 종용하는 얼굴에는 타협 불가능한 완고함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하고는 선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쿤이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쿤은 작은 속삼임을 들을 수 있었다. ‘하급 청력’ 때문이다. 평소라면 바람 소리에 묻혀서 지나갈 속삼임이 꽤나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을까.’자조하는 남자의 목소리.

‘위험하다.’

선실로 통하는 곳에 들어 온 뒤 문을 닫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몸 안쪽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에 계속 울리고 있었다. 위기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조금 전 남자의 혼잣말과 함께 섞어서 판단해 보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배신……!’

수행원 자격이 없다 자조한다는 것은 이미 그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포기했다는 것과 같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그가 일을 벌이는 걸지도 모른다.

“후우.”

속이 답답하다.

남자는 지금껏 용병 일을 하면서 봐 왔던 사람 중 가장 강하다. 어설프게 기습한다고 단검 들고 설치며 뽑기도 전에 목이 베일 것이다. 대적? 절대 무리. 지금은 어떻게든 맹약의 조건을 따르며 도망 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했다.

‘어떻게? 망망대해에서 벗어 날 방법이 있나?’

웬델을 지나 공국으로 통하는 해로는 쿤도 안다.

중간 기착 없이 닷새 정도를 내리 달려서 도착하는 경로다. 두 소녀에게 위기임을 설득시켜서 빠져나가게 한다 해도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일까?

“벨포드 씨? 안 들어오고 뭐해요?”

소식이 없자 직접 루루가 나왔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에 쓴 모자에서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났다.

‘방울! 아, 그래!’

그러자 쿤의 머리를 팍 하고 스쳐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웬델과 공국 측 도착점인 자기엘카 항구의 중간 지대. 바로 방울 군도였다. 섬들이 방울 모양으로 점점이 모여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예로부터 해적들이 아지트로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군도 쪽 해류만 탈 수 있다면 알아서 흘러 들어가겠군.’

해적이라고 해서 접근하는 이들을 모두 싸잡아 죽이는 무도한 자들은 아니다. 본래는 꽤 이름이 있던 왕국의 터전이었는데 어떤 일로 말미암아 땅이 군도 형태로 갈라졌고, 망국을 추억하던 이들이 흩어져서 해적이 되어 버렸다.

제국과 공국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에 삼각 무역을 하기도 하고, 이름을 섞어 단 채 해적질을 하기도 한다. 양측에서 오는 물자가 꽤 많고 이래저래 형성된 시장이 꽤 커서 양국 모두 손을 대기를 꺼려하고 있다. 군도의 해적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다. 그 탓에 기본적으로 군도를 방문한 사람에 대해서는 해적들이 손을 안 댄다.

물론, 해적에게 절대적인 신용을 요구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문제는 두 아가씨인데……’

혼자서 도망치는 거라면 배에 비치된 구명정을 훔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맹약에 갱신 된 내용을 살피자면 루루와 라라를 공국으로 안내하라 돼 있다. 시작은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바뀐 내용은 신의 의지일 확률이 높다. 이를 무시하고 혼자서 도망치는 건 좋지 않다.

“벨포드 씨?”

“안에 라라 아가씨도 있나요?”

“네. 왜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렇다면 필요 한 건 위기의 순간, 둘을 꾀어내어 도망 칠 방법.

눈을 깜빡이는 루루를 앞세워 방 안으로 향했다.

#

“나, 납치요!?”

라라가 깜짝 놀라 소리치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쿤이 입에 손을 올린 채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조금 진정이 되자 동그래진 눈을 앞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루루도 비슷한 표정. 두 소녀는 다른 듯 하면서도 이런 면에서는 닮아 있었다. 쿤이 몸을 살짝 숙이며 은밀한 염탐자의 얼굴로 속삭였다.

“제가 여행자로 다니면서 몇 가지 기술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갖은 위험에서 목숨을 살려 준 것도 바로 그 기술들이죠. 잘 듣고, 남보다 빠르게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

“하지만 그렇다고……”

“갑판에서 바람을 쐬다 선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두 분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납치를 해서 몸값을 받아 내려는 생각이죠.”

“그, 그럼 빨리 융 아저씨한테 말을 해야……”

“안 됩니다.”

그러면 계획이 어그러지니까.

쿤이 속내를 감춘 채 라라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리고 살짝 방 문 너머를 살폈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문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 하지만 그것이 더 불안하다. 목 언저리를 당겨 풀고는 다시 말 했다.

“이들은 두 분의 호위 중 일부와 작당을 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말 하는 건 위험한 판단이죠.”

“융 아저씨는 배신 할 분이 아니세요. 그분에게 먼저 말을 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아요.”

“맞아. 융 아저씨는 어릴 때 부터 우리를 지켜 주신 분일 걸. 그 분이라면 믿을 수 있어요.”

꽤 신뢰가 깊다.

쿤이 코끝을 찡그린 뒤 잠시 머리를 굴렸다. 냉정한 사고 덕인지, 침착하게 몇 가지를 고려 해 볼 수 있었다. 입술을 혀로 핥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모르는 거죠. 혹시 이곳까지 오는 길에 뭔가 수상한 행적은 없었습니까?”

일반적으로 이렇게 묻는 건 죽여 달라는 신호와 같다.

귀족에게 귀족 호위를 의심하라 말 하는 거니까. 하지만 며칠 동안 쿤은 두 소녀와 많이 친해졌다.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두 소녀는 이렇게 밑밥을 깔아도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두 소녀는 머리까지 맞댄 채 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숙고에 들어갔다. 진지하게 의심스러운 행동이 없었는지를 되짚어 보는 것이다.

“아……!”

그러다 루루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뭔가 생각 난 게 있어?”

“그러니까 여행 출발하기 전에……융 아저씨가 처음 보는 사람하고 얘기하는 모습을 봤거든. 그렇게 화 난 얼굴은 처음이었어. 그때는 그냥 무슨 일이 있겠거니 했는데……”

“그런 걸 왜 얘기 안 했어?”

“하지만 그러면 가지 못하게 막을 지도 모르잖아. 그러기는 싫었다고.”

루루가 입을 비죽이며 변명을 했다.

사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다. 어쩌면 사소한 일 문제로 다투었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적당한 분위기만 조성하면 그 작은 일 가지고도 커다란 음모를 만들 수 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절 이 배에 태울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확실히 그는 수상한 구석이 있군요.”

“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두 분은 모르시겠지만, 제가 동행을 부탁받았을 당시 즐거운 마음으로 허락 한 게 아닙니다. 두 분이 싫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도 즐겁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으면 좋죠. 하지만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되도록이면 피하고자 하는 게 제 본심이었죠. 하지만 그 분은……거부하면 당장이라도 목을 벨 듯 저를 보았죠. 저는 감히 그 기운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

무서운 듯 쿤이 몸을 숙였다.

표정과 몸짓은 만점이었다. 마치 꽤나 숙여 본 자의 자세였다. 그런 적 있나? 떠오르는 건 없지만 일단 잘 되니 가볍게 넘겼다. 눈만 살짝 올려 두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그런 것도 모르고……”

“벨포드 씨 미안해요.”

잘 먹힌 거 같다.

둘은 이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태도로 돌아섰다. 믿어야 할 호위가 배신자일 지도 모른다고 하니, 곱게 자란 둘로서는 판단이 잘 서지 않은 것이다.

‘이 정도면 됐네.’

쿤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둘을 봤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뒷목이 서늘하다. 위기 감지 능력이 아니라도 굴러먹던 통빡이 외치고 있다. 이제 곧 위험한 일이 생긴다. 바로 이렇게.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그러니 여기에서 준비를 한다.

두 소녀를 속이는 일이지만 죄책감은 없다. 어차피 무슨 일이든 휘말려 안 좋은 꼴 당할 처지 아니던가. 이렇게나마 해 주는 게 돕는 일이다.

바짝 다가오는 두 소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작가의 말

사실 굉장히 어설픈 수작이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몇 편 정도는 쿤의 탈출기가 이어질 거 같습니다. 준경을 바라시는 분들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일해라 쿤, 벌어라 쿤, 잘했 쿤이 열심히 노동을 해서 공물을 바칠 겁니다.

* 내일은 연참을 해 볼까 합니다. 힘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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