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에서 빠져나온 나는 동식이에게 잠시 볼일 좀 본다고 하고는 화장실로 이동했다. 뒤에서 장이 짧냐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충 무시했다. 나름대로 농담일 뿐이다. 자기보다 배나 많은 나이의 후배가 들어왔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친해 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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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제국 정찰병 단검
가치 : 10
이름 : 제국 금화
가치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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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를 열어 보니 제물로 바친 단검과 금화가 보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화려한 접시는 보이지가 않았다. 번쩍이던 장식을 보자면 꽤나 돈이 될 법한 물건이었는데.
“역시 확실하게 소유한 물건에 한해서만 작동을 하나 보네.”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죽여서 빼앗았든 도둑질을 했든, 일단 자신의 소지가 확실히 결정되었을 때나 공물로 힘을 발휘하는 듯싶었다. 아니라면 상점가서 좋아 보이는 거 집어다가 냉큼 제단에 바치면 그만이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쿤의 맹약 상태.
그가 스킬을 보고 적극 활용한 것은 좋지만 너무 성급했다. 500이라는 가치를 봤으면 일단 물렀어야 한다. 반대급부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덜컥 수락하는 건 곤란한 일. 게다가 지금은 그 내용이 바뀌며 1000의 가치를 책정하고 있다. 현재 쿤이 이루어야 하는 일이 그 만큼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귀족 영애 둘과 공국으로 향하는 일정.
이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을까? 쿤의 배경은 대충 중세. 드래곤이니 요정이니 환상적인 대상들이 나오지만 귀족과 공국. 사용하는 물건 등을 반추해서 생각하면 중세 정도로 여기는 것이 편하다.
짐승의 습격? 가능하다. 하지만 그 검은 옷의 남자가 보통 사람 같지는 않고, 위협이 될 만 한 상황이 오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조난 사고? 현대에도 배가 침몰하기 일쑤인데 쿤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쉬이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오히려 1000이라는 가치가 적다. 배가 난파된 상황에서 쿤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몇 가지를 추리고 남은 건 바로 제 3자에 의한 습격.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종종 나온다. 귀족 영애를 노린 습격자. 이모의 생일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동한다고 했으니, 적대적인 인물이 있다면 노리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다. 게다가 이건 혹시나 하는 생각인데……
“만약 반전을 넣는다면, 검은 옷의 남자가 배신자라는 거지.”
느낌이 쎄하니 온다.
왜 쿤을 굳이 일행에 포함시켰을까? 귀족과 여행자는 신분이 다르다. 흥미를 채운다는 목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억지로 잡아 태우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무언가 그렇게 하고 싶은. 혹은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가는 길이나마 즐거우라는 배려.
종복이 배신을 하는 거라면 남은 충성심의 발로로 그럴 수 있다. 저승 가는 길에 노잣돈 넣듯이 재밌어 하는 이야기나 실컷 들으라고 쿤을 억지로 태운 걸지도 모른다.
“……너무 나갔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이 많으니 하나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중요 한 건 내가 쿤의 상황을 호전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을지 모르는 귀족들과 고 위험의 모험 길에 올랐다. 여기서 손 놓는다면 쿤은 게임 오버.
나 역시 게임 오버가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과연 어떻게 해야 쿤을 도울 수 있을까?
개방된 스킬을 얻는 것? 지능 보정은 모르겠지만 집중사고는 만약의 경우를 확실하게 대비 할 수 있다. 특기를 획득 할 때 그 목록을 보면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들이 나열된다. 만약 이번에 개방 된 특기도 그 연장선이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함이 옳다.
“필요 포인트는 339.”
적지 않다. 맹약으로 매일같이 노가다를 한다고 해도 얼마나 걸릴지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맹약은 기본적으로 리스크가 큰 일. 반드시 성공한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다른 방식. 포인트를 벌어서 쿤을 도와 줄 방법이 필요했다.
“잠깐만……”
그러다 살짝 걸리는 게 있었다.
“내가 무조건 벌어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는 내가 포인트로 사서 베풀어 주는 형식이었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그러했다.
쿤은 그래서 포인트가 부족함에도 공물을 바치며 내게 기대어 왔다.
하지만 모자라는 건 모자란 것이다. 여기서 내가 또 억지로 포인트를 맞춰주면 쿤은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잠시 생각했다.
500포인트의 특기. 필요하다는 생각은 든다. 다만, 내가 이것을 억지로 맞춰주는 형태는 곤란하다. 쿤에게 말을 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알게끔 행할 필요가 있다.
현재 신성 점수는 161.
“공물의 대가로 점수는 들어왔지만, 그 이상은 없다.”
충분한 공물에는 축복을. 그렇지 못한 것에는 신벌을.
그리고 어중간한 공물에는 침묵을.
쿤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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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쿤이 제단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올린 것 중 단검과 금화만 사라졌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가져와 올려 둔 공물은 통용이 되지 않았다. 신벌이 내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손등을 두드렸다.
“……”
변한 건 신성 점수 뿐.
전혀 변하지 않았다. 새로운 특기도 특기의 승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쿤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공물의 대가로 110의 점수가 상승한 것은 분명하나 신은 그 이상의 일을 해 주지 않았다.
‘공물이 부족하다는 것일까?’
500점의 승급 요구량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점수가 부족하다.
하지만 전처럼 신벌이 내리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아예 잘못 된 공물을 바친 건 아니다. 즉, 맞게 하기는 했으나 양이 부족하다.
‘의외로 탐욕스러운 신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신은 신이다. 생각으로 한 것 역시 전해질지 모른다. 기껏 살아서 왔는데, 벼락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다른 공물을 더 바쳐야 한다는 말인데……’
똑똑똑!
쿤이 그렇게 공물에 대해서 고민하던 순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꽤 늦은 시간. 고개를 기울이며 문가로 나아갔다.
“음? 루루 아가씨 아닙니까?”
문 앞에 있는 건 분홍색 잠옷을 입은 루루였다.
머리에는 양 갈래로 방울이 달린 모자를 썼는데 ‘헤헤.’ 거리며 웃을 때 마다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벨포드 씨 아직 안자죠?”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 시간에 무슨 일이죠?”
“낮에 듣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덜컥 찾아오고 말았어요. 조금만 더 이야기 해 주실 수 없나요?”
쿤이 속으로 웃었다.
야심한 시간에 남자를 찾아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 작은 숙녀는 모르고 있다. 그것도 잠옷 차림에. 장소와 환경만 달랐어도 쿤은 음흉한 속내를 품은 채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행동하다가는 목이 베이기 쉬운 곳.
문가에 선 남자들을 곁눈질로 살핀 뒤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겁니까? 여염집 아가씨께서 이리 낯선 사내를 찾아오다가는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이기 쉽답니다.”
“무슨 소문이요?”
순진한 눈으로 물어오면 답을 하기가 곤란하다.
쿤이 머리를 긁적이며 문가에 선 사내들을 바라봤다. 목석같던 그들조차 이 건은 반응하기 힘든지 시선을 피하고 있다. 이 사람들도 은근히 고생이었던 건가? 쿤이 속으로 슬쩍 웃었다.
“그럼 잠시만 입니다. 너무 오래 있으면 다른 분들이 걱정을 해요.”
“헤헤. 고마워요! 자기 전에 조금만 더 듣고 싶었어요!”
쿤은 이리 말 하며, 문가의 남자들을 살폈다.
그들은 별 다른 반응이 없다. 허락한다는 말 일까? 아니면 가풍이 개방적인 걸까? 어느 쪽이든 일단은 잘 됐다고 생각을 했다.
‘공물이 필요했으니 잘 됐군.’
영웅담 속, 공주를 납치하는 악당과 같이 웃은 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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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찾아오셨나요?”
“음음! 사랑 이야기요! 서약의 기사가 얼음 공주를 찾아가던. 그런 이야기 없나요?”
“하하. 사랑 이야기라. 그러고 보니, 물의 도시 베네치를 지나오면서 비슷한 걸 들은 기억이 있군요.”
“정말요!?”
사랑에 대해서 막 관심이 있을 나이다.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비슷한 주제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더니 진짜로 듣고 싶었던 건 이쪽인가 싶다. 언니가 있을 때는 말 하지 않고 이리 찾아온 걸 보면 은근히 그런 쪽으로 부끄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쿤이 방 안에 비치된 와인을 따 그녀 앞쪽에 따라주었다.
도수가 거의 없어, 차대용으로 마시기도 하는 물건이다. 향긋한 냄새에 루루가 싱긋 웃었다. 이제 막 피어나는 꽃 같다.
“그런데 루루 아가씨.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나요?”
“네? 어떤 이야기요?”
잔에 따른 와인을 홀짝이며 루루가 고개를 기울였다.
쿤이 그녀 앞으로 앉으며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부터 할 말은 밖에 들려서는 곤란했다.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드시 그 만큼의 마음을 지불해야 한다는 이야기요.”
“마음? 무슨 의미에요?”
“사랑은 흔히 하늘이 점지해 준다고들 하죠.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엮인 것과 같아, 우리도 모르는 곳에서 영향을 받아 마구 꼬이곤 한답니다. 동화 속 슬픈 사랑의 이야기나 애절한 노래들은 모두 그 탓에 생겨나는 것이지요.”
“어머……”
루루가 두 손을 모은 채 반응했다.
쿤이 속으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이건 여행 중에 바드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아니다. 기억도 안 나는 어느 여관의 여급이 가슴을 내어 놓은 채 헛간 지붕을 보며 읊조린 이야기다. 당시에는 너희도 그런 걸 믿느냐, 라고 짓궂게 놀렸는데 이리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기에 다른 이의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 만큼의 마음을 지불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운명의 실이 어디선가 꼬여버릴 지 모르는 일이죠. 운명의 상대가 바로 곁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답니다.”
“그, 그건 싫어요! 어떻게 하면 마음을 지불 할 수 있어요?”
“마음은 말 그대로 마음이죠. 무언가로 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쿤이 속으로 말했다.
금, 보석, 장신구. 뭐라도 좋다. 금화와 단검이 110의 신성 점수를 올렸으니, 그녀에게 받는 물건이 충분히 가치만 된다면 부족분을 메울 수 있다. 속이는 건 미안하지만 가려는 걸 잡은 건 그녀 쪽 아니겠는가.
조여 오는 마음을 감춘 채 루루를 봤다.
“혹시 이것도 될까요?”
그때, 그녀가 품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꺼냈다.
무늬도 없고 볼품없어 보이는 외양이다. 쿤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리 가치가 높아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이어 나오는 그녀의 말에 그런 생각은 싹 지워야 했다.
“열다섯 살 생일 때 받은 마법 반지인데. 이걸로 괜찮을까요?”
※작가의 말
흐억. 늦을 뻔 했네요.
재밌게 보고 가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