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과거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진행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밤의 꿈같은 이야기. 다만, 같이 의뢰를 나가던 동료들에게는 해 본 적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용이 너무 유치하기 때문이다. 직접 겪은 그 조차 꿈이겠거니 하며 기억의 뒤편으로 넣어 두었을 정도로.
하지만 눈앞의 두 소녀에게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여행자가 늘어놓는 동화 같은 이야기. 그것이 허황되더라도 소녀들이 바라는 건 결국 밤에 이불을 덮고 꿈에서 상상할 작은 도구에 불과하니까.
“제가 협곡 아래에서 본 것은 겨울 밤 하늘을 닮은 듯 한 수정이었습니다.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아름다웠죠. 그 영롱한 빛깔은 하늘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테오라마스(밤의 여신, 구전되는 동화 속 존재)의 눈물과 같았죠.”
적당히 신화 속 이름을 꺼내서 붙이면 효과가 배가된다.
두 소녀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화술과 행운 덕인지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쿤이 목 언저리를 살짝 당겨서 풀며 말을 이었다.
“수정안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마치 태고 적의 엘프와도 같고, 숲 속 나무의 노래를 부르는 숲지기와도 닮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둘 모두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몽롱한 모습은 마치 꿈의 단편을 잘라 낸 듯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자아냈으니까요.”
“호, 혹시 요정이 아니었을까요!?”
루루가 손을 번쩍 들면서 물었다.
선생님과 제자가 아닌데 말이다. 쿤이 속으로 작게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쉽다는 제스처.
“하아. 아쉽게도 제 견문으로는 그것을 확인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긴 시간동안 수정을 바라 볼 수도 없었죠. 멍 하니 그 빛에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협곡 위에서 말발굽 소리가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설마, 마적들이 따라온 건가요?”
“아키온의 마적들은 너무나 집요하죠. 아무리 협곡이 깊어도 그들이라면 곧 쫒아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서 빨리 자리를 털고 도망쳐야 했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수정을 한 번 더 볼까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말을 늘이고 고개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두 소녀의 고개 역시 덩달아 앞으로 다가왔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수정을 설명하던 것처럼 밤하늘을 박아 놓은 했다. 신비를 찾을 것 없이, 거울만 봐도 충분할 듯싶다. 쿤이 가볍게 감탄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짠! 하고 사라졌습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남은 건 협곡의 바위와 먼지 뿐. 그 아름답던 수정은 온데간데없었죠.”
짠하며 손짓을 하자, 두 소녀가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반응이 좋은 관객들이다. 쿤이 씩 웃으며 우아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것이 제 경험담의 끝입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뒤에 찾아가 봤지만, 어디에서도 그 수정은 찾을 수 없었답니다.”
“와아……그 수정은 그럼 뭐였을까요? 역시 요정 아닐까요?”
“루루. 요정은 황무지에 안 어울리는 거 같지 않니? 나는 태곳적에 봉인 된 고대 정령 같아. 협곡에 균열이 생기면서 나타났던 거지.”
“에이, 그게 더 이상해. 황무지라고 왜 요정이 없어? 모래요정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잖아.”
“아하하. 모래요정이 뭐니?”
두 소녀는 시시한 이야기에도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음껏 웃었다.
쿤이 잠시 둘을 내버려 둔 채 가만히 있었다. 밀항을 위해서 이용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순진한 모습이었다.
“벨포드 씨! 벨포드 씨! 다른 얘기는요? 다른 얘기는 없어요!?”
루루가 다시 힘차게 말을 붙여왔다.
참 기운이 넘치는 소녀다. 쿤이 검은 옷의 남자를 힐끔 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두 소녀를 만족 시키려면 조금 더 고생을 해야 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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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의 열정은 쿤이 입술이 바짝 마를 때 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조금 상식 있는 언니, 라라가 쿤이 힘들어 보인다는 말로 중재를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야기로 날 새는 경험을 할 뻔 했다.
쿤은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슬슬 물러났으면 하는 기색을 비추었다.
두 소녀도 만족했겠다, 신분 안 맞는 여행자가 굳이 사이에 끼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저기요! 저기요! 벨포는 씨는 여행자라고 했죠? 그럼 다음번에는 어디로 가세요?”
하지만 그렇게 물러나기 위한 길에 마지막으로 관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루루가 여전히 활기찬 얼굴로 이렇게 물어왔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가느냐. 왜 그걸 물어 볼까? 간단하다 방향이 같으면 따라와서 이야기 좀 더 하란 뜻이다.
쿤은 절대적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귀족. 얽혀서 좋을 게 없는 이들이다. 물론, 그들과 같이 가면 밀항을 굳이 안 해도 되고, 혹시 모를 검문에서도 안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은 귀족이라는 두 글자로 퇴색이 된다.
손을 흔들며 대답을 뭉뚱그렸다.
“하하. 여행자가 가는 길은 그저 그때의 감에 따른 것이지요. 바람이 속삭이고 강물이 외치는 길을 따라서 발길을 돌릴 뿐이랍니다.”
“우와……하지만, 가야 할 곳이 있다고 경비를 부탁하지 않았나요?”
이 잔망스러운 계집애를 봤나.
쿤이 속말을 꾹 누르며 간신히 웃음을 만들었다.
“여행자의 걸음은 고귀하신 분들과는 맞지 않답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가 적당 할 거 같습니다.”
“아……혹시 테베스 공국으로 가는 거면 동행할까 했는데.”
“테베스에 말입니까?”
너무 의외의 지명에 쿤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바로 아차 했다.
“어? 설마 벨포드 씨도 테베스로 가나요!?”
루루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어왔다.
옆에 선 라라도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 미녀의 관심이라면 쌍 수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귀족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는 테베……”
“테베스로 가는 건가? 잘 됐군. 두 분 아가씨와 동행을 하면 될 테니.”
“……!!”
검은 옷의 남자다.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뒤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그 반응보다 그의 이런 행동이 의문이었다. 갑가기 이게 무슨 짓인가?
‘날 붙여 놓는다고? 어째서?’
아니라는 말이 입가로 올라왔다.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생각 해 보니, 맹약의 대가가 너무 높았다. 반나절 안에 달성하면 500점이라니. 아무리 봐도 대가가 너무 후했다.
마치, 실패의 대가가 지독한 것처럼.
“역시 테베스로 가는군. 잘 됐어. 두 분께서 심심하지 않겠군.”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 전에 남자가 앞을 막아서며 말을 잘랐다.
무심한. 그리고 섬뜩한 눈이 쿤의 몸을 저미고 지나갔다. 거부를 한다? 살아서 돌아 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속으로 외쳤지만 무의미했다.
무언가 잘못 걸렸다. 하급 행운을 믿고 선택한 대상은 꽤나 뒤가 구린 먹이였다. 남자가 스산한 기운을 흘리며 옆으로 물러났을 때, 쿤은 고개를 끄덕 일 수밖에 없었다.
“와아~! 가면서도 재밌는 얘기 많이 해 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즐거워 보이는 두 소녀의 얼굴을 앞에 둔 채.
#
동행이 결정 난 직후, 쿤은 여관에 방을 하나 배정받았다.
화려한 가구와 멋진 장식품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상황이 꽤나 막막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
문을 닫고 손등을 두드려 창을 살폈다.
***
맹약 : 일주일 내에 라라와 루루를 테베스 공국으로 데리고 간다.
가치 : 1000
페널티 : 모든 능력치 1하락.
***
맹약의 내용이 다른 것으로 갱신되어 있었다.
가치도 변했다. 쿤이 팔짱을 낀 채 이게 무슨 의미일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본래 맹약을 약속을 한 뒤 그것을 지켜내면 가치에 맞는 보상이 돌아오는 능력. 하지만 지금은 그 약속의 내용 자체가 변화했다.
‘내가 돈만 받고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돼도, 본래의 목적과 연결이 된다면 새롭게 갱신이 되는 거구나. 가치 역시 알아서 재조정되고.’
그렇다면 이 맹약이라는 스킬은 꽤나 사용하기 까다로운 것이었다.
특정 행위를 달성하여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중간에 많은 과정들이 들어 갈 터. 그것들이 약속 자체에 영향을 줘 버리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가 어렵게 된다. 500의 가치가 1000의 가치로 바뀌었다는 것은 지금 이 상황이 달성하기 어렵고, 반대급부 역시 매우 심하다는 뜻.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을 갈 수는 없다. 방 밖에서 검은 옷의 남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경비? 비교 할 수조차 없다. 슬쩍 틈을 엿보았는데, 단검이라도 뽑을라치면 그대로 목이 베일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라라와 루루의 정체가 더 의심스럽지만……’
의문투성이지만 생각해서 답 나올 게 아니었다.
일단은 손등을 두드려서 변화된 사항을 확인했다.
***
이름 : 쿤 타이 / 서 준경(첫번째 단계) 종족 : 인간
힘 : 12 민첩성 : 10
체력 : 15 지능 : 12
스킬 : 맹약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 하급 은신, 하급 행운, 하급 화술
신성 점수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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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냉정한 사고 옆으로 (+)모양이 붙어 있다.
앞서 들었던 바에 의하면 냉정한 사고의 등급이 개방되었다 했다. 등급이라면 상중하로 나뉘는 것을 의미 할 터. 잠시 생각하다 (+)를 손으로 눌러 봤다.
[냉정한 사고 -> 집중 사고, 소모 신성 점수 500]
[냉정한 사고 -> 지능 보정, 소모 신성 점수 500]
두 가지 사항이 튀어나왔다.
집중 사고와 지능 보정. 냉정한 사고의 등급이 개방되었다고 하니, 윗단계의 능력 일 터. 단어 자체를 잠시 살피다 위의 것부터 눌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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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사고
냉정한 사고의 발동 시 집중해서 파악하는 문제에 한해서 5~10배가량의 사고 속도를 증진시킨다. 사용 후 어지럼증이 올 수 있다. 지능에 비례하여 빈도와 속도가 증가한다.
***
집중 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를 집중해서 한다는 말이다.
5~10배가량 사고 속도가 증가한다면 생각 할 시간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 짧은 순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매우 유용한 능력 일 수 있다.
몇 번을 더 읽고 다음 능력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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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보정
영구적으로 지능이 1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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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특기는 더욱 간단했다.
지능을 영구적으로 1 증가시켜준다는 것. 1이라는 수치가 어느 정도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구적이라는 수식어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흠.”
둘 다 소모되는 신성 점수는 500이다.
하급이라는 접두사가 붙는 특기보다는 확실하게 비싼 가격.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높은 등급으로 책정되고 가격이 비쌀 리 없다. 분명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지금 가진 신성 점수는 51. 이걸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얻을 수 없다.
‘역시 이럴 때는 서 준경 신께 빌어 보는 수밖에 없군.’
상황이 난감하게 흐르고 있다.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건 어디선가 내려다보고 있을 서 준경 신 뿐.
쿤이 방 안의 접시를 가져와 중앙에 놓고 임시 제단을 만들었다.
‘공물은 지금 이 순간에 내게 가장 가치가 있는 것들……’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일지. 단검? 입고 있는 옷? 금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물건을 콕 집어서 가치 있다 말하기 힘들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만약을 대비 할 수 있는 몸이 제일.
‘으음.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생각을 해 보자.’
실수해서 신벌을 한 번 더 받더라도 지금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물은 어디까지나 신에게 바치는 제물. 가치 있는 것을 하나로 정할 수 없다면 조금 순위가 떨어지더라도 비슷한 걸 많이 바치는 수밖에 없다.
‘일단……’
쿤이 방 주변을 둘러봤다.
멋진 가구들이 즐비해 있다. 금과 은으로 장식한 그릇들과 화려한 그림. 번적이는 조명이 눈에 쏙쏙 박혔다. 일전에 투박한 그릇을 공물로 바쳤다가 신벌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반대로 화려 한 것을 넣어 볼 생각이었다.
비록 그게 본래 자신에게 속한 물건이 아니라 해도, 바치고자 하는 금화와 단검을 돋보이는 수준이라면 그래도 용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것에 신벌이 내린다면 다음 공물에 참조 할 만 한 사항이 되기도 한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근처에 굴러다니던 금색 접시를 집어 들었다.
순금은 아니겠지만 조각된 문양이 매우 화려한 것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는 그럴싸했다. 그 위로 루루에게 받았던 금화 하나와 제국 정찰병을 죽이고 얻은 단검을 올려 두었다.
‘서 준경 신이시여, 미천한 종복에게 은혜를 내리시기를.’
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작가의 말
변화 뒤쪽에 다른 부제목을 다는게 좋을까요?
달면 어떤 식이 좋을지...전 챕터명 말고는 다른 걸 달아 본 적이 없어서리 ㅎㅎ
* 맹약의 경우 일정 조건을 클리어 했을때, 연계되는 내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 만약 연참을 한다면 역시 주말이 좋은가요?
* 그나저나 슬슬 현시창에 보정을 넣어 줄 때가 됐군요.
잼게 보고 가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