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나라.”
남자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다.
쇠를 바닥에 긁는 것처럼 거칠었다. 속에 실린 기세 역시 대단히 무거웠다. 쿤이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별별 일을 다 경험해 본 쿤이지만, 이렇게 무거운 느낌의 남자는 처음이었다.
“아, 아저씨! 따라왔어요?”
“죄송합니다. 주인님의 명인지라.”
소녀가 살짝 놀란 어투로 남자를 반겼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이에 답했다. 동작에 절도가 있고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다. 주인이라 칭한 것으로 봐서는 누군가를 섬기는 몸. 귀족가의 호위무사 정도로 생각이 되었다.
‘생각보다 대단한 집인가 보군.’
경험만큼 많은 사람을 봐 온 쿤이다.
이 정도의 남자를 호위 무사로 둘 정도면 예사 집안 일 리 없다. 목표로 삼은 두 소녀의 집안이 생각 보다 더 대단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저기요!”
그렇게 있는데 소녀가 쿤을 불렀다.
그녀는 발그레한 볼에 열기 띤 어조로 하고 있었다. 고개를 기울여 쿤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부르셨나요, 아가씨.”
“저기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속임수! 속임수요! 나는 전혀 몰랐는데.”
“떠돌아다니는 몸입니다. 이래저래 보고 들은 게 많죠. 상업도시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사기꾼입니다. 다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주의를 하심이 좋습니다.”
“와……! 여행자였어요?”
“후후. 포장하면 여행자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가난한 방랑자에 불과하죠.”
소녀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이 나이대의 소녀들. 특히 귀족가의 영애들은 ‘밖’에 대한 열망이 굉장히 강하다. 제국이 지배 정책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을 늘리고 있는 최근에는 그 경우가 더욱 심하다. 욕구를 꾹 눌렀던 영애들도 호기심을 표출하며 스스로 나서고 있다.
세상 경험이 많은 여행자들 그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배경이다.
“아,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야 할 거 같군요. 아가씨께서도 무사히 돈을 지켜 낼 수 있었고……더 있다가는 무서운 분들의 눈총을 사게 될 거 같습니다.”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귀족가의 예법을 따라했다.
물론 완전히 같을 수도 없고, 상대가 어디에 속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중요 한 건 상대를 배려하여 행동한다는 느낌. 그리고 나는 속셈이 없다. 라고 말 하는 깔끔한 태도.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불러라.’
쿤이 속으로 외쳤다.
천천히 두 걸음을 떼었다.
“자, 잠깐만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 쿤이 속으로 외치고는 한 호흡 쉬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왜 불렀냐는 표정. 흐트러짐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
“그래도 도와 주셨는데, 그냥 보내면 예의가 아니죠. 보답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소녀가 치맛자락을 잡은 채 말을 붙여왔다.
종종 걸으며 다가오자, 주변 검은 옷들이 물결처럼 따라왔다. 쿤이 꼴깍 하고 침을 삼켰다. 이 움직임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다. 자칫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목이 베일 것 같은 분위기. 앞서 단검을 꺼내 가판을 베었을 때 아무 일 없었던 게 기적인가 싶었다.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냥 보내면 안 되죠. 식사라도 한 끼 대접 할 수 있을까요?”
왔다. 쿤이 생각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정 그리 보답을 하고 싶다면 배를 타고 다음 마을에 갈 수 있게 여비를 조금만 보태 주심은 어떠신가요? 몸 하나 끌고 황야를 가로질렀더니, 그만 무일푼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다.
여행자가 돈 떨어져 막일을 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건 방랑의 자유. 돈에 구애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소녀에게는 제대로 먹힌 건지 눈을 반짝였다.
“황야를 가로 질렀다. 재미있는 얘기네요. 혹시 시간을 내어 저희에게 그 이야기의 단편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 소녀의 언니가 다가왔다.
차분한 목소리. 소녀와는 다른 분위기이지만 그녀 역시 목소리에 비슷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미인이 둘이라면 남자로서 거부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지만, 지금은 덜컥 받아들일 수 없다. 필요 한 건 밀항에 필요한 돈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그것만 딱 받고 물러나고 싶었다.
“저 같은 무지렁이가 어찌 아리따운 두 분과 함께 자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너그러운 제의만 가슴에 묻겠습니다.”
쿤이 부드럽게 답을 했다.
화술이 도움인지 정말로 말이 부드럽게 나왔다. ‘내가 이 정도로 어휘력이 좋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에이~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서 이야기 해 주세요. 여비라면 제가 드릴 게요! 자요, 여기!”
하지만 예의바른 답에 떨어 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동생 쪽이 예의 금화를 가지고 와서는 쿤의 손에 턱하니 얹었다. 반짝반짝. 쿤이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려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언니 쪽이 다가왔다.
“근처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길게 시간을 빼앗지 않을 테니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행자를 만나는 일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잖아요. 꼭 한 번 즈음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음……하지만.”
“아가씨께서 이리 말 하는데 와서 잠시 머무르는 게 어떻겠나?”
“!!”
쇠 긁는 소리는 쿤의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는 언니의 뒤쪽에 있었지 않나. 언제 뒤로 돌아 왔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름 용병으로 오랫동안 굴러먹었지만, 이런 움직임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싹했다. 그리고 알 것 같았다. 앞서 단검을 뽑아 가판을 베었을 때 남자는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다. 움직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베였겠구나!’
세상에 이런 능력자가 있다는 말을 왕왕 듣긴 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냉정한 사고가 아니었다면 이즈음에서 당황하여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르겠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더 이상 거절 할 수는 없군요. 그럼 잠시나마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고마워요!!”
“후후.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지 기대가 되는군요.”
[냉정한 사고의 등급이 개방되었습니다.]
[맹약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
쿤은 놀란 티가 나지 않도록 얼굴을 잘 다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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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를 따라 쿤은 근처에 있는 호화 여관으로 이동했다.
고위 귀족이나 거상들이 이용하는 건물로 주변에 울타리를 두르고 작은 정원을 깔아 밖과는 아예 차단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귀족은 맞는데, 혹시나 했던 것처럼 생각보다 더 높은 귀족인 듯싶었다.
여관에 구비된 테라스까지 가는 와중에 쿤은 두 소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언니 쪽은 라라. 동생 쪽은 루루였다.
이름을 밝히는 과정에서 검은 옷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는데, 그 기세에 쿤은 또 다시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라라와 루루는 이모의 생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중이라 했다.
쿤은 웬델을 거쳐서 갈 수 있는 지역을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묻지는 않았다. 귀족은 알면 알수록 다치는 법이다.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그럴싸한 여행 이야기나 조금 해 주고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벨포드 씨는 그럼 바이런 지역부터 계속 걸어오신 거예요?”
본명을 댈 수는 없고, 친우의 이름을 빌려왔다.
속으로 미안함을 표하며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운 의뢰에 엮이기 전에 있던 곳이 바이런 지역이다. 거짓을 말 할 때는 사실에 기반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말이 안 맞거나 오류가 생기는 것을 방지 할 수 있으니까. 앞의 두 소녀야 아무래도 좋지만, 팔짱 낀 채 노려보는 검은 옷의 남자는 말실수 하나면 머리를 쪼개버릴 능력이 있었다.
“바이런 지역은 말로 유명하죠? 하이포네 종이 그쪽에서 나온다고 들었어요!”
루루가 아는 게 나왔다고 냉큼 말을 받았다.
“유명하죠. 바이런 남부에 하이포네 종만 키우는 마을이 있을 정도니까요. 다 큰 하이포네는 중무장한 기사를 태우고도 몇 시간씩 달릴 정도로 체력이 좋다고 합니다. 게다가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섞인 갈기는 바람이 흩날릴 때는 멋스러움을 더해주죠. 기사들이 선호하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랍니다.”
쿤이 아는 건 딱 여기까지다.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고 속으로 부탁했다.
“맞아요! 달릴 때 정말로 예쁘죠! 그치, 언니?”
“그렇지. 하이포네가 은색 마갑을 찬 채 대지를 달릴 때는 마치 신화 속 유니콘을 보는 듯 했어.”
“유니콘! 벨포드 씨는 혹시 유니콘을 본 적이 있나요?”
아니 주제가 왜 갑자기 그리 넘어가는 거냐.
쿤이 어색하게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거짓말을 쳐도 될 게 있고, 아닐 게 있다. 유니콘이라니. 사라진 지 벌써 몇 백 년은 된 신비의 동물이다.
루루가 아쉬운지 입을 비죽거렸다.
“그럼 다른 건 본 적 없어요? 드래곤이나 페어리. 숲지기 같은 거요. 꼭 한 번은 보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봤다는 사람이 없어요.”
“루루야. 무슨 질문이 그래. 전부 다 환상속의 존재들이잖니. 벨포드 씨가 난감해 하잖아.”
“……사실 한 번 있어요.”
“네?”
쿤이 문득 말 했다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흘려버린 물이다.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반짝이는 두 소녀의 눈길을 받으며 조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아키온 벨리(Arkion Valley)에 들린 적이 있었죠. 대지를 반으로 가른 장엄한 협곡. 그 아름다움을 눈에 담기 위해서 간 거였어요.”
사실은 의뢰 때문에 스쳐가던 길이었다.
살짝 각색을 했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확실하게 해야 한다. 안 그러면 검은 옷의 남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평소와 같이 주변을 돌며 배경을 눈으로 담고, 맨 발로 협곡을 걸었죠. 자연을 몸으로 느끼며 그 기운을 받는 겁니다. 풍화 된 모래는 너무나 부드러워 마치 실크와 같았죠.”
“어머, 실크요?”
“어쩌면 그보다 더 부드러운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렇게 걸으며 협곡을 거닐고 있는데, 때 아니게 마적단과 마주치게 됐답니다.”
“세상에! 마적단이요!?”
“어떡해, 어떡해!”
두 소녀가 손을 꼭 쥔 채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쿤이 씩 웃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와 이야기하는 거지만, 그래도 어여쁜 두 소녀가 반응해 주니 기분은 좋았던 것이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름대로 호신술을 익혔지만 마적단의 숫자에는 이길 도리가 없었죠. 얼마 못 가 상처를 입고 포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키온 지역의 마적단이 얼마나 흉포한지 알고 있었죠. 잡힌다면 몸 성히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했어요. 그래서 도박을 걸었죠.”
“도박이요? 어떻게 했는데요?”
“혹시 숨겨둔 마법 도구 같은 거라도 있었나요?”
그런 게 있었다면, 여기서 이런 수다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쿤이 픽 웃고는 손가락을 아래쪽으로 향했다. 두 소녀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으로 귀여운 반응이었다.
“협곡으로 뛰어든 겁니다.”
“혀, 협곡으로요!”
“세상에! 아키온 협곡은 깊기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그럼 죽어요!”
“안 죽었으니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여행자는 망토가 필수입니다. 저 역시 그러했죠. 떨어지는 와중에 망토를 벗어 절벽에 솟은 돌 뿌리에 걸칠 수 있었습니다. 상처는 조금 입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망 칠 수 있었죠.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 부터입니다.”
쿤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작가의 말
속닥속닥.
즐겁게 보고 가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