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제단 위에서 동전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황급히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프거나 그런 곳은 없다. 다행이 이번에는 신벌이 내린 거 같지가 않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등을 두드려 창을 열었다.
***
이름 : 쿤 타이 / 서 준경(첫번째 단계) 종족 : 인간
힘 : 12 민첩성 : 10
체력 : 15 지능 : 12
스킬 : 맹약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 하급 은신, 하급 행운, 하급 화술
신성 점수 : 51
***
“맹약? 하급 행운? 하급 화술?”
처음 보는 게 무려 세 개나 되었다.
잠시 멍하니 보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생각했던 게 맞다. 제물은 그 당시 가장 가치가 있는 물건. 동전 셋을 바쳐서 세 개의 능력이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굵은 골자는 맞다는 얘기였다.
천천히 하나씩 상세 설명을 읽어갔다.
행운과 화술은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지만, 맹약은 조금 복잡했다.
***
맹약
약속을 지정하여, 성공과 실패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대가의 가치는 약속의 중요성에 기반하고, 반대급부가 존재하지 않는 약속은 대가를 보장받지 못한다.
맹약은 하나의 약속이 끝날 때 까지 중복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며, 하나의 맹약이 실패 할 시 영구적으로 능력치의 손상을 가져온다.
추가사항
맹약의 설정 시 기간을 반드시 정해야 한다.
맹약의 가치는 현 시점의 상황에 기인하여 변화한다.
맹약은 기본적으로 반대급부와 실패 손실. 두 가지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
일반 특기의 설명과는 다르게 ‘추가사항’이라는 것이 포함된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위에서 아래로 몇 번이나 반복해 읽으며 내용을 숙지했다. 직접 실험을 해 봐야 알 거 같지만 기본은 건 만큼 버는 것. 즉, 도박과 다를 바 없었다.
‘서 준경 신께서는 지금 내 상황을 보고 계시구나.’
행운과 화술. 그리고 맹약은 도박을 하라는 말과 같았다.
마침 마을 안에서 주사위 노름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여 밀항의 자금을 마련하라는 의미. 이보다 명확한 지침이 있나 싶다.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뒤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서 준경 신이시여. 그대의 지혜를 빌리겠습니다.”
조건을 보는 순간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허리를 쭉 피는 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자자~더 도전하실 분 없습니까? 돈 놓고 돈 먹기! 이보다 돈 벌기 쉬운 방법도 없습니다! 애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도전 할 수 있는 기회!”
앞서 살핀 광장에 도착하자, 노름꾼이 목소리를 더욱 올리고 있었다.
슬쩍 분위기를 살피니 돈벌이가 꽤 괜찮은 모양이다. 앞서 보였던 바람잡이는 없고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꽤나 조직적으로 이를 운영하는 모양이다.
“언니, 나도 한 번 해 보면 안 될까?”
“루루야, 네가?”
“응. 나 왠지 맞출 수 있을 거 같아. 언니, 한 번 만 해 볼게. 응?”
그때, 잘 갖춰 입은 두 여성의 목소리가 쿤의 귓가를 간질였다.
군중의 틈 사이를 파고 들어가 바로 옆에 섰다. 고급 화장품에 쉽게 보기 힘든 원단의 옷. 손끝은 관리를 받은 듯 예쁘게 정돈되어 있었다. 척 봐도 막 굴러먹는 여자는 아니었다.
‘이 둘이 좋겠군.’
쿤은 현재 돈이 없다.
노름을 하려고 해도 자본금이 있어야 가능 한 일. 하지만 서 준경 신은 그 상황조차 헤아렸는지 놀랍게도 행운과 화술. 그리고 맹약이라는 능력을 선사해 주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충분히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말투가 곱고 언니를 보는 눈이 따듯하군. 잘 자란 귀족가의 영애이려나?’
가끔 이렇게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는 귀족 영양이 있기는 하다.
특히 웬델 마을은 사람의 왕래가 많고 볼거리가 충만하여 호기심 가득한 소년, 소녀들이 나들이 오기에는 좋은 장소. 옆에 선 두 소녀들도 그런 경우일 확률이 높았다.
“어휴, 그럼 어쩔 수 없지. 한 번 해 보렴.”
언니로 보이는 소녀가 허락을 하자 동생이 박수를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통통 튀는 걸음이 나이대의 특징을 그대로 보였다.
“오, 숙녀 분께서 하시는 건가요?”
“헤헤. 네!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그럼 저야 영광 이죠~! 자자, 얼마를 걸 건가요?”
노름꾼의 눈이 빛났다.
딱 봐도 봉을 잡았다는 표정이다. 쿤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소녀는 허리춤에 찬 작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반짝이는 금화를 꺼내 들었다.
여기저기서 헛바람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화다. 반짝이는 광택과 표면에 새겨진 제국 황제의 얼굴은 절대로 따라 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정신인지 묻고 싶었다. 금화 한 닢이면 눈앞에 있는 가판을 통째로 살 수도 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저런 걸 함부로 꺼내도 되나 싶다.
“저, 정말 금화를 거시는 겁니까?”
“움. 이거 밖에는 없는데, 안 되는 건가요?”
“하하하. 안 될 리가요. 됩니다. 되고 말고요!”
노름꾼이 굳어있던 표정을 피더니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금화를 받아 냉큼 옆으로 올렸다. 혹시나 그만두고 발 뺄 까 걱정되는 모습이다. 이해는 간다. 노름으로 돈 뜯어봐야 언제 금화 하나 얻겠는가. 대박 기회라 생각하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그 돈은 내가 가져가겠다.’
속내를 감추며 쿤이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가판 앞에 선 소녀의 바로 뒤였다. 작게 중얼거려도 들을 수 있는 거리. 적당했다. 주변을 살피며 방해 될 인물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맹약.’
손등의 문양이 작게 반짝거리고 눈앞으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꽤나 큼직한 크기인데도 주변 사람들은 누구 하나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역시 신의 힘.’ 작게 감탄하며 쿤이 공란을 채워갔다.
***
맹약 : 반나절 안으로 소녀를 속여서 밀항 할 돈을 번다.
가치 : 500
페널티 : 모든 능력치 1하락.
***
맹약의 공란을 채우는 순간에 아차 했다. 반대급부에 대한 설정을 안 했기 때문.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가치가 즉시 매겨졌다. 그것도 무려 500. 지금까지 확인한 특기들의 소모 점수가 100인 것을 생각해 보면 이건 대단히 높은 것이다. 소녀를 속여서 돈을 획득하는 것이 그리도 대단한 일인가 싶었다.
‘그보다 나 어쩐지 익숙한데?’
스킬을 얻고 처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몇 번이고 사용 해 본 듯 능숙하게 다루었다. 조금은 이상하다. 하지만 이 또한 신의 은총이라 생각하니 납득 할 만 했다. 스킬도 주고 그에 걸 맞는 경험도 내려 준 모양이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신이던가. 다시 한 번 서 준경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쿤이었다.
“자자, 주사위 돌립니다!”
어쨌든 그 사이 노름꾼은 주사위를 그릇에 담아 마구 돌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이를 직시했다. 두근두근한 모양이다. 두 볼이 발그레했다.
그리고 탕! 노름꾼이 돌리던 것을 멈추고 그릇을 가판 정 중앙에 세웠다.
“자! 주사위는 과연 10보다 높을까요, 낮을까요?”
“음!! 으음~!”
소녀가 두 손을 꼭 쥔 채 고민했다.
간단히 살피자면 단순한 찍기. 하지만 소녀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손가락을 톡톡 치며 무언가를 계산했다. 그러다 계산이 끝났는지 고개를 팍 들고는 말했다.
“아래요! 10보다 아래가 분명해요!”
뭐가 그리 자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말 했다.
쿤이 재빠르게 노름꾼의 얼굴을 살폈다. 살짝 당황하는 기색. 운이 좋은 건지 소녀가 일단 맞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름꾼에게는 비중의 수법이 있다. 슬쩍 발을 뻗어서 가판에 마련 된 장치를 건드리려고 했다.
“이런, 또 속임수에 당하는군.”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어? 속임수요?”
소녀가 즉시 반응했다.
고개를 돌린 채 쿤을 돌아봤다. 발그레한 볼과 토끼 같은 눈망울. 확실히 거리에서 보기는 힘든 외모였다. 여자라면 질리도록 품어 본 쿤 조차 살짝 당황했을 정도.
“아, 들렸습니까? 이거 실례 했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께서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만……”
“어, 어이!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언제 속임수를 썼다고 그래?”
쿤이 정중하게 답을 하자, 가판의 노름꾼이 다급히 소리쳤다.
골드다. 골드를 딸 수 있는데, 엄한 놈이 방해를 하니 마음이 안 급해 질 수 없었다. 그의 눈짓을 따라 바람 잡던 놈들이 슬금슬금 쿤에게 접근했다.
“속임수를 안 썼다? 그럼 지금 당장 그릇을 열어봐도 되겠군.”
“얼마든지 열어 보라고. 나는 손도 안 대고 있어!”
“호오, 그래?”
쿤이 낮게 웃으며 그릇에 손을 댔다.
그러자 노름꾼이 즉시 발을 놀려서 장치를 작동시켰다. 가판 아래쪽에 달린 건 작은 자석이다. 노름꾼이 기울어진 축을 발로 밟으며 자석이 위로 올라가 주사위를 당기는 것이다. 주사위 역시 안쪽에 철을 담아서 무게 중심을 바꾼 것이라 원하는 대로 조작이 가능했다. 수작을 부릴 때 작은 소리가 나기야 하겠지만, 이는 주변 바람잡이들이 알아서 막는다.
“열면 합이 10보다 많겠지. 안 그래?”
“흥!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손도 대지 않았다고.”
“저기요, 정말로 속임수 인 건가요?”
“분명히 속임수입니다. 자, 직접 열어 보시죠.”
어디가 속임수라는 걸까. 소녀가 반신반의하며 그릇을 열었다.
4, 5, 2. 숫자의 합은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쿤이 지적한 대로 10을 넘어서는 숫자. 즉, 소녀가 패배한 그림이었다.
“어……그럴 리가 없는데?”
소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자신이 셈 한 것이 맞을 거라 확신했던 모양이다.
“보라고 나는 손도 안 댔어. 그냥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거라고!”
노름꾼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쿤이 나서 준 덕분에 소리를 가릴 것도 없이 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눈앞에서 떡하니 결과가 나왔으니 소녀도 어쩔 수 없을 터. 무려가 금화가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글쎄. 결과는 이렇게 해도 바뀌는데?”
쿤이 빠르게 단검을 뽑아 가판 아래쪽을 베어 낸 뒤 노름꾼의 발을 밀었다.
충격에 주사위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번호가 바뀐 것이다. 소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를 봤다. 그때 쿤이 다시금 아래쪽 장치를 위로 밀었다.
도르륵……!
자력이 발생하자, 만들어 둔 무게에 따라 주사위가 굴렀다.
굉장히 교묘한 방법으로 처리를 해 둔 것이라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티가 안 났다. 4, 5, 2. 주사위가 굴러 숫자가 바뀌었는데, 다시 쿤이 아래쪽을 건드리자 앞선 것과 같이 합이 11이 됐다. 누가 봐도 사기임을 알 수 있었다.
“어! 주사위가 멋대로 움직였어요!”
“아래쪽에 자석을 붙여서 조작하는 수법입니다. 기초적이지만 손만 주시하다보면 간과하기 쉬운 수법이죠.”
“아, 그래서 속임수라고 그랬군요!”
“당하는 걸 그냥 볼 수가 없어서요. 자, 돈은 다시 회수 하셔야죠.”
쿤이 부드럽게 답을 하며 노름꾼을 봤다.
그는 벌게진 눈으로 쿤을 쏘아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미 그의 동료들로 가득이다. 사기가 들통 난 이상 그냥 내빼는 것이 상책. 하지만 금화는 너무나 탐이 났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리수를 들 정도로. 그가 슬쩍 주위를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일종의 신호. 바로 돈을 탈취하여 웬델 마을의 자경단을 피해서 도망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억!”
“커억!!”
갑자기 주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노름꾼의 동료들.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다가오던 이들이 죄다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있군.’
쿤이 곁눈질로 살피며 마른 침을 삼켰다.
굳이 귀족 영애로 보이는 여인에게 수작을 건 이유다. 척 봐도 있는 집 사람 같은데 단 둘이 이곳에 나왔을 확률은 거의 없다. 주변에 없다면 조금 떨어져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터. 그리고 이들은 지역 사기꾼들의 손에서 쿤을 보호 해 줄 울타리가 될 것이다.
물론, 일이 잘 풀렸을 때.
‘행운이 도와준다면.’
화술과 운.
두 가지가 있기에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겠군.’
대충 자리는 마련했다.
무사히 밀항 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제부터가 중요 할 터.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신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새카만 옷에 유부에서 올라 온 듯 한 눈매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작가의 말
몇 가지 떡밥을 쇽쇽쇽.
재밌게 보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