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정신을 수습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놀라운 우연이네요. 여기서 다시 보다니.”
“그러게요. 혹시나 하고 말을 걸었던 건데……이걸 인연이라고 말 하던가요?”
“기분 좋은 말이네요. 죠엘 씨 같은 분과 인연이라니.”
화술 덕인지 말이 부드럽게 나왔다.
속에 담긴 칭찬을 알아듣고 죠엘이 밝게 웃었다. 정말로 실내가 다 밝아지는 거 같다.
“아, 그보다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게 일 때문에 약속이 있었는데 어찌 된 건지 없다고 하네요. 설마 말없이 취소됐을 리는 없고……”
“여기 서요?”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보조 팀이니 뭐다 하며 길게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냥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아!’라며 짧게 탄성을 흘리고는 빙긋 웃었다.
“윤 남규 씨라면 보조팀 분이죠? 그럼 이 건물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해요. 둘 다 같은 이름을 쓰고 있어서 사람들이 종종 헷갈리곤 하거든요.”
“뒤쪽에요?”
“네. 옆길로 돌아가시면 입구가 보일 거예요. 그런데, 설마 준경 씨 보조팀 일로 오신 거예요? 그쪽 분들 얼굴은 대부분 다 알고 있는데.”
“아, 음. 최근에 그쪽에서 일을 하게 돼서요.”
이 나이에 말단으로 들어갔다 말 하는 것이 창피하다.
하지만 그걸 숨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잘못 한 게 없다. 지금 처지가 조금 안 좋다고 부끄러워하기 싫었다.
죠엘이 보조 팀에서 일 한다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여기며 눈빛이 변할까? 살짝 걱정이 되었다.
“와아~! 우리는 정말로 인연이 있네요! 우연히 만난 사람이 일 하는 곳도 비슷하다니!”
“비슷해요?”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조금 미흡했네요. 전 UGIU(Unknown Gate Inquiry Union)소속 연구원이에요. 이번에 국방부와 협약으로 해서, 민간 연구팀이 들어왔는데 그곳에 합류하게 됐거든요.”
“U……뭐라고요?”
“아하하. 그냥 게이트에 관련된 것들을 연구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하늘사랑과는 같은 빌딩을 쓰고 있죠. 같은 집 동지! 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녀가 발랄하게 소개했다.
즉, 그녀는 게이트를 연구하는 연구원이고 이번에 정부와 계약해서 조사팀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조사팀이 하늘사랑이 쓰는 건물에 같이 자리를 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사촌. 이거야 말로 인연이 아닌가.
대충 이런 내용인가?
“오가면서 가끔 볼 수도 있겠군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왠지 준경 씨는 좋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그런 게 있어요. 같이 있으면 행운이 옮겨 올 거 같아요.”
“보통은 반대라고 생각 할 거 같습니다만.”
“그럼 서로서로 옮기도록 해요.”
물러나지 않고 웃으며 대꾸해 온다.
어떤 남자라도 그녀 앞에 데려다 놓은 열에 아홉은 반하고 말 것이다. 치명적일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가씨다.
웅~! 우우웅!
그때, 주머니가 잘게 울렸다.
한창 분위기가 좋았는데 누구일까 싶다. 냉큼 꺼내서 살펴보니, 모르는 번호. 개통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폰에 걸 만 한 사람이 없다. 잠시 생각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저씨! 아직도 안 오고 뭐해요?”
역시 예상대로 남규였다.
핸드폰을 보니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지난 상태. 내 입장에서는 빌딩을 잘못 알고 헤맨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늦고 말았다. 사정을 대충 설명하고 빨리 가겠다고 말을 했다.
“아……바쁜데 붙잡고 있어 버렸네요.”
“하하, 괜찮아요. 죠엘 양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저기 있는 경비 양반과 싸우고 있었을 테니까요.”
“저 분하고요? 아, 잠시 만요.”
뒤쪽, 멍하니 서 있는 경비를 손으로 가리키자 그녀가 눈썹을 앙큼하게 올리더니 그 앞으로 걸어갔다. 경비는 다가오는 그녀 모습이 바짝 긴장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 내가 그 심정 안다. 그녀 앞에서 태평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기, 경비 아저씨. 저 아시죠? 두 달 전에 이곳으로 오면서 인사 했던.”
“아, 아! 물론이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여기 오가면서 하늘사랑 헷갈려 하는 분들을 많이 봤음도 알겠네요?”
“그, 그건……”
죠엘이 데스크를 손으로 짚더니 얼굴을 쑥 내밀었다.
경비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하늘사랑 잘못 찾아온 사람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왜 곧바로 그걸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명함을 봤으면 바로 상황을 이해했을 텐데요.”
“그, 그게 바로 생각이 안 나고 그래서……”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제가 오가면서 다른 분들께 설명하는 걸 몇 번이나 봤는데요! 경비는 그 건물의 얼굴과 같아요. 잘못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손님을 이렇게 대하면 어떻게 해요?”
“죄, 죄송합니다.”
박력 있게 몰아치자 경비가 사과를 했다.
아마 자던 걸 깨웠다고 꼬장을 부린 모양이다. 이해는 하지만 선택이 잘못 됐다. 만약 내가 회사의 중역이라든지 그런 인물이었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 낮은 직급이면 직급 나름대로의 처신 방법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내가 볼 때 저 경비는 그리 오래 갈 역량이 못 된다.
“저보다 준경 씨한테 사과를 하세요. 실랑이 한 탓에 약속까지 늦고 말았잖아요.”
“저, 저기 죄송합니다. 잠결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네요.”
“괜찮습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
담담하게 사과를 받아 주니, 경비가 얼굴을 붉혔다.
상황이 정리되고 누군가 사과를 한다면 감정을 내세우기 보다는 일단 포용하는 것이 좋다. 그게 더 효과가 큰 법이니까.
사회생활의 기본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후후. 멋진 얼굴이네요.”
“아……좀 부끄럽네요. 그보다 약속 때문에 먼저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렇죠! 빨리 가세요. 괜히 늦었다고 더 혼나면 제가 다 싫을 거 같아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힘차게 손짓하는 그녀에게 여지를 남기며 몸을 돌렸다.
나이 먹고 볼품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꽤 깔끔하지 않나 싶다.
딱히 잘 보이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
“아저씨 너무 늦었잖아요!”
죠엘의 말대로 건물 밖으로 한 바퀴 돌자 다른 입구가 있었다.
건물이 참 묘한 형태다. 왜 이렇게 지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걸까?
부랴부랴 계단을 뛰어 땀 좀 흘리며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동식이가 발끈하며 반겼다.
“미안, 미안. 반대쪽 건물에서 헤맸지 뭐야.”
잠시 뭐라 뭐라 한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네들도 처음 왔을 때는 헤맸다고 한다. 다음부터 잘 찾아오라는 말로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보니 꽤 큰 회의실에 사람이 달랑 셋이다.
나와 동식이. 그리고 남규.
그날 보았던 서연이라는 여자도 없다. 이렇게 단출히 모여서 일을 하는 걸까?
“좀 있으면 사람들 올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동식이가 답을 해 줬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살폈다. 오기로 했던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아마도 높은 사람이겠지. 괜히 긴장이 됐다.
그렇게 두런두런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자,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식이와 남규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도 덩달아 엉덩이를 떼었다.
“다들 모여 있네.”
먼저 들어온 사람은 소향과 서연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서율과 처음 보는 남자가 따라왔다.
남자는 척 봐도 귀티가 흘렀다. 큰 키에 딱 맞게 갖춰 입은 슈트.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은 마치 런웨이에 서는 모델과 같은 포스를 뿜어내게 했다. 서율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환상의 짝이었다.
배 아프게도 말이다.
“바로 출발해야 하니까, 간단하게 설명 할 게. 인천에 있는 게이트. 우리가 이 둘을 케어 할 거야. 어제 저녁에 J.T쪽 사람들이 넘어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나 봐. 당장 땜빵 할 사람이 없다고 우리한테 SOS를 보내왔어.”
“아……그래서 급하게 모이라고 했군요?”
“알다시피 정부쪽에서는 스케줄 늦어지는 걸 아주 질색해. 이번에 못 들어가면 J.T만 아니라 우리까지도 함께 싸잡아서 들들 볶일 위험이 있어. 서율이가 조금 무리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괜찮아요, 언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말단.
일단 닥치고 있었다.
다만, 지금 상황이 전날 남규와 약속했던 미팅이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인천 쪽 게이트나 교통사고로 인한 땜빵. 이건 분명 개척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럼 다들 그렇게 알고 일단 타. 그리고 거기 준경 씨. 정식 계약이 아닌 건 알지만 오늘은 손 좀 빌려줘야겠어요. 괜찮겠죠?”
“그렇게 하죠.”
아니라고 말 할 처지도 아니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터는 이들과 함께 같이 일어섰다. 서율이가 몸을 돌리는 와중에 살짝 눈인사를 했다. 나도 티 안 나게 이를 받았다.
“……?”
그런데, 그 순간 살짝 기분 나쁜 눈빛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쿤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곧바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시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착각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일행의 뒤를 쫒았다.
#
“무슨 일이야?”
승합차에 올라 탄 뒤 동식에게 물었다.
일행은 둘로 나뉘었다. 소향이 서율과 이름 모를 남자를 맡았고, 서연이 남은 사람을 맡았다. 지금 운전대를 잡은 건 남규. 보조석에는 서연이 앉아 있다. 뒷좌석에 덩그러니 놓여서 할 일도 없고, 의문이나 풀까 싶었다.
“아저씨 오기 전에 연락 받았어요. 급하게 사람 필요하니까 전부 모여서 대기라하고요.”
“듣자하니 사고 나서 사람 손이 필요하다는 거 같던데. 우리가 그쪽에 도우러 가는 거야?”
“네. 스케쥴 상 인천으로 개척자가 투입되어야 할 시간인데, 전날 사고가 나는 바람에 죄다 다쳤나 봐요. 덕분에 서율 누나랑 남혁 형이 땜빵하게 된 거죠. 둘 다 개척자들 중에서는 회복이 빠른 편이라 여유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보조팀만 아니라 개척자들도 한꺼번에 사고에 휘말렸다는 얘기 같다. 확실히 서율이는 게이트를 넘어간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블로그에서 읽어 본 바에 의하면 몇 주 단위로 쉬어야 한다고 했는데. 몸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아, 근데 그 남자. 누구야? 처음 보는데.”
그러다 문득 지나치게 잘 생겼던 남자가 떠올랐다.
방에 있던 사람들 중 모르는 이는 그 뿐이니, 아마 언급한 남혁이라는 인물 일 터. 이름 말고 조금 더 자세한 신상정보를 알고 싶었다.
“차 남혁 몰라요? 요즘 CF도 많이 찍어서 꽤 유명 할 텐데.”
“도통 티비는 안 봐서. 많이 유명해?”
“진짜 아저씨 티내네요. 서율 누나랑 마찬가지로 개척자들 중에서 이미지를 담당하고 있어요. 워낙 잘 생기고 집안도 좋아서 인기가 쩔죠.”
“부럽네. 키도 크던데.”
“에효, 말 해 봐야 무엇 하겠어요. 금 수저란 금 수저는 몽땅 다 들고 태어났는데. 이미 날 때부터 주식 부자잖아요. L그룹 장남. 캬~나도 한 번 그렇게 살아 봤으면 좋겠다.”
“인마 그러려면 다시 태어나야 해.”
“태어나도 너는 안 될 걸?”
“윽! 둘 다 왜 나만 가지고 놀려요!?”
동식의 말은 남규와 서연이 받았다.
시시콜콜하게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는 되는가 보다. 서연도 첫 날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늘은 조금 얌전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보다 내 주의를 끈 것은 다른 내용이다.
동식이 말 한 것 중 귀에 쏙 하고 박혀 든 것.
“L그룹 장남이라고?”
나를 치고 미소와 결혼한 남자.
아내가 말하기로는 그가 L그룹 사장의 아들이라고 했다.
설마 같은 인물일까?
※작가의 말
* 본문에서는 스킵했지만, 준경은 사고 이력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 합의 된 사건에 대해서 당사자가 요구하면 정보 열람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아시는 분 혹시 있을까요? 찾기가 쉽지 않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