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6화 (16/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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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약

약속을 지정하여, 성공과 실패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대가의 가치는 약속의 중요성에 기반하고, 반대급부가 존재하지 않는 약속은 대가를 보장받지 못한다.

맹약은 하나의 약속이 끝날 때 까지 중복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며, 하나의 맹약이 실패 할 시 영구적으로 능력치의 손상을 가져온다.

***

미소와 헤어지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확인한 내용이다.

처음으로 생성 된 스킬이다. 흥분 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읽었다. 몇 줄 안 되는 설명이지만 조금은 두루뭉술한 표현이 있어서 단번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약속을 하고 대가를 받는다.

언뜻 보기에는 간단한 듯싶지만 실패 페널티와 반대급부에 대한 언급을 보니 그렇게 쉬이 생각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몇 번을 더 읽어 내린 뒤 방 가운데에 섰다.

읽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하게 알 수 없다.

일단은 써 볼 생각이었다. 스킬은 처음.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몰라 가만히 서 있다가 기본적인 게임 방식대로 그 이름을 외쳐 보았다.

“맹약.”

웅. 짧은 빛이 눈앞으로 스쳐갔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예 / 아니오의 선택문이 떠올랐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렇게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예’라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봤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눈앞으로 빛이 스쳐가고 반투명한 패널이 허공이 나타났다.

입체 디스플레이?

항상 거울에 비춰보던 것과는 다르다. 손으로 휘휘 저어보니 그대로 통과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앞서 눈앞으로 무언가 빛이 스쳐 갔었다. 망막에 집적 투영되는 방식.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렇게 이해를 했다.

***

맹약 :

가치 :

페널티 :

***

공란이 있는 서류와 같았다.

스킬이라면 파이어볼이나 가로 베기 같은 게 좋은데, 묘한 게 등장해 버렸다. 팔짱을 낀 채 내용을 살폈다.

맹약과 가치. 그리고 페널티. 앞서 설명대로 내가 무언가를 정하면 공란에 차곡차곡 새겨지는 모양이다. 가치와 페널티가 비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내가 거는 맹약에 따라 자동적으로 매겨지는 형태 인 듯싶다.

신기하다.

누군가 있어, 이를 처리해 주는 것일까. 게이트와 다른 세계. 그리고 이 시스템. 쿤은 나를 신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정말로 신이 있어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뭐, 상관없다.

나는 분명하게 맹세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신인지 악마인지 모르겠지만, 도와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든지 신세를 지겠다. 나중에 어떤 대가가 오든.

“일단은……팔굽혀 펴기 세 번을 한다.”

간단한 것으로 맹약을 정해 봤다.

공란에 내가 말 한 내용이 빠르게 채워졌다. 하지만 가치와 페널티의 공란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패널색이 전체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무언가 잘못 한 걸까?”

턱을 짚고 생각했다.

맹약이라는 건 말 그대로 약속이다. 팔굽혀 펴기 세 번을 하는 것도 나 자신에 대한 약속. 틀린 것은 없다. 하지만 굳이 빠졌다고 한다면……

“기간. 기간이 필요하군.”

무한한 시간 속에서 조건을 만족하려 한다면 그건 반칙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서 정해진 조건을 충족해야 맹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꽤나 철저하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팔굽혀 펴기를 한 시간 안에 한다.”

***

맹약 : 팔굽혀 펴기를 한 시간 안에 한다.

가치 : 0

페널티 : 힘 -1

***

제대로 짚은 모양이다.

공란이 빠르게 채워져 갔다. 하지만 가치 부분이 이상하다. ‘0’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 내가 건 조건의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 무엇이 잘못 된 걸까?

웅. 그리고 그때, 머릿속으로 예 / 아니오의 의문이 떠올랐다.

게임의 선택지를 이렇게 주는 모양이다. 아니오를 누른 뒤, 다시 공란으로 변한 패널을 바라봤다.

“가치. 내 맹약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살피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면 가치가 있을 수 없지. 한 시간에 팔굽혀 펴기 세 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할 수 있는 거잖아.”

어떤 식으로 매겨지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어렵고, 복잡하게. 쉽게 해 낼 수 없는 조건으로 걸어야 맹약의 가치가 높게 매겨지는 것이다.

“2분 안에 팔굽혀 펴기 서른 개를 하겠다.”

만만해 보이나? 쿤과 같은 스텟을 공유하지만 배 나온 아저씨의 몸은 그대로다. 이것이 결코 쉽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조금 기다리자 공란이 채워지고 가치 부분에 숫자가 새겨졌다.

“……0? 이번에도 가치가 없다고?”

2분 안에 팔굽혀 펴기 서른 개는 꽤나 힘든 일이다. 실패 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평가 된 가치는 0이다. 어째서일까. 입술을 잘근 씹으며 다시 생각을 해 봤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반대급부! 멍청이.”

손으로 머리를 세게 쳤다.

떡하니 설명에 쓰여 있는 걸 무시하고 있었다. 반대급부가 없는 맹약은 가치가 없는 것과 같다. 즉, 팔굽혀펴기를 성공하지 못했을 때 내가 받아야 하는 자체적인 페널티가 있어야 가치가 매겨진다는 뜻이다.

“자체 페널티에, 추가적 페널티까지. 젠장, 이거 이중 부과잖아? 무슨 세금도 아니고……”

돈 놓고 돈 먹기이나, 실패하면 돈도 잃고 손모가지도 날아간다.

지금의 이 스킬은 나에게 유리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도박이 그렇듯 이건 사용하는 사람이 아닌 시스템. 즉, 반대편이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쯧.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건 내 쪽인데. 잠시 생각을 하다 조건을 바꾸었다.

“2분 안에 팔굽혀펴기 서른 번을 한다. 실패하면……새끼손가락이 부러진다.”

이런 식으로도 될까?

맹약을 건 뒤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패널의 공란이 채워지고, 이내 가치가 산출되었다.

“1? 겨우 1?”

산출된 가치는 겨우 1이었다.

내가 받는 리스크는 실패 시 새끼손가락 골절과 힘 스텟1의 영구 하락. 누가 봐도 이건 내게 불공정한 거래였다. 아주 시스템이 치사하고 더러웠다. 이게 정말로 게임이었다면 당장 게시판에다가 욕으로 도배했을 것이다.

“젠장.”

하지만 누차 말 하지만 아쉬운 건 나다.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에 ‘예’라고 답을 한 뒤 자세를 잡았다. 눈앞에 ‘120초’ 라는 글자가 떠 오른 뒤 곧바로 줄어갔다. 준비 땅 도 없다. 이를 악물고는 팔굽혀 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후우……후우!!”

쿤의 기억과 경험이 남아 있지만 역시나 이질감이 심하다.

같은 방법으로 숨을 쉬고 같은 힘으로 밀어내는데도 어딘가 어색하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자세를 어렵게 했고, 호흡을 거칠게 만들었다.

10초, 5초. 그리고 1초.

시간이 빨리 줄어들었다. 몇 개나 했는지 세지를 못했다. 얼추 스무 개 이상까지는 한 거 같은데 서른 개는 자신이 없었다. 부들거리를 손을 힘껏 밀어 내고는 0이 되는 숫자와 함께 옆으로 고꾸라졌다.

“하아……하아……”

이걸로 한 가지는 더 알았다.

쿤과 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같은 스텟을 공유하고 있지만 육체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숫자로 인한 밸런스의 조정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움직이는 내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지금은 그것보다 맹약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 일.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아……그래도 성공하기는 했네.”

앞선 패널이 모두 지워지고 성공이라는 단어와 ‘1신성 포인트 획득’ 이라는 문구만이 남아 있었다. 1신성 포인트. 역시 맹약의 가치는 1:1 포인트 교환이 되는 것이다. 손가락에 힘 스텟 1걸고 얻은 것이 1신성 포인트. 참으로 남는 장사다.

“이 상태에서 같은 조건을 걸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팔굽혀 펴기를 하기 전의 몸 상태와 지금의 몸 상태는 다르다. 이 조건이라는 것이 실시간으로 상태를 반응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다시 맹약을 실행하고 공란에 같은 조건을 걸었다.

“가치 50. 예상대로네.”

훌쩍 뛰었다.

성공 할 가능성이 낮아지자, 그만큼 가치가 상승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다. 아마 내일 멀쩡해진 몸으로 같은 조건을 실행한다면 가치는 0으로 산출되지 않을까? 이미 한 번 성공해본 일에 대해서는 기대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당연하다. 계속적으로 사용 할 수 있는 꼼수를 막기 위해서도 분명히 있을 거 같다.

“만만치 않네.”

하나 생긴 스킬이 아주 머리를 벅벅 긁고 있다.

진짜로 파이어 볼이나 가로 베기 같은 게 나왔으면 싶다.

다시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천장을 바라 봤다. 미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힘들어도 참아야겠지. 그 아이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라도.

“힘내자, 서 준경.”

스스로를 다독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

꼬박 하루를 투자하여 스킬을 연마하고 해가 뜰 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한 가치의 산출. 조건에 따른 페널티의 변화와 성공에 따른 가치의 하락세 등. 너무나 유동적인 조건이 많았기 때문에 한 두 번의 실험으로는 전부 알 수가 없었다. 최대한 데이터를 많이 쌓고 그것에서 근접한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 현명했다.

그렇게 선잠을 자고 나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12시가 다 된 시점이었다. 전날 고지 받은 출근 시간은 오후 2시. 정확하게는 출근이라기보다는 미팅이었다. 씻고 옷 입고, 택시를 잡아서 이동하는 시간까지 생각 해 보면 꽤 빠듯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음……”

큼지막한 거울에 모습이 비춰졌다.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다. 조금은 피곤하고, 조금은 억울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눈여겨 자세히 보니 전보다 얼굴선이 도드라져 있는 것 같았다.

괜히 웃통 벗고 거울 앞에서 힘 한 번 줘 보기도 했다.

“살도 좀 붙은 건가? 어제 운동해서 그런가?”

팔굽혀펴기 좀 했다고 몸매가 잡힌다면 그 요령을 알아내기 위해서 전국의 모든 처자들이 암살자를 보낼 것이다. 생각해봐도 웃기지 않은 이야기다. 단단해진 배를 툭툭 치고는 부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

며칠 뒤 다시 연락을 받고, '하늘사랑'을 찾아갔다.

꽤 그럴듯한 빌딩이 눈앞에 있었다. 강남 땅값도 비싼데 이 정도 건물을 세우려면 돈이 상당히 많아야 할 거 같다. 서율이 등을 맡으며 돈을 벌었든가 아니면 돈 많은 갑부가 회사를 새웠든가. 어느 쪽이든 부러운 건 매 한가지다.

주변을 둘러보며 입구 쪽 데스크로 이동했다.

시간 맞춰서 회의실로 찾아오라 했으니 경비에게 물을 심산이었다. 식곤증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비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이 좋으면 뭐하나. 경비가 이 모양인데. 앞으로 가서는 데스크를 손으로 두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하늘 사랑……음.”

침을 후르륵 빨며 일어나던 경비가 날 보고는 인상을 팍 썼다.

경비라면 모름지기 건물의 얼굴과 같은 존재. 손님에게 인상을 쓰다니 교육이 좀 덜 된 친구 같다. 그의 볼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입을 열었다.

“회의실을 찾아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음. 회의실 말입니까? 선약이 되어 있나요?”

“선약……이라면 윤 남규 씨의 이름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약속 시간까지 5분 정도 남았으니, 적당한 때에 온 거 같다.

경비가 위쪽으로 연락을 하여 확인 할 때 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번듯한 건물 분위기에 비해서 오가는 사람이 적었다. 조용한 와중에 경비의 말소리만 크게 울렸다.

“……없다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응?”

그런데, 말끝이 조금 이상하다.

경비가 전화를 끊은 뒤 나를 요상하게 바라봤다.

“회의실 예약 상황 중에 윤 남규라는 분의 이름은 없는데요?”

“없다고요? 제대로 확인 해 본 것이 맞습니까?”

“게다가 오늘은 오전부터 저녁까지 쭉 예약이 잡혀 있어서 다른 분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보아하니 잘못 찾아오신 거 같습니다만.”

슬쩍 말투가 내려간다.

왠지 울컥한다. 방금 전까지 자고 있던 주제에 사람을 뭐로 보고. 주머니에서 남규가 건넨 명함을 꺼내서는 데스크 위에 올렸다.

“하늘사랑. 이 빌딩 아닙니까?”

“아, 맞기는 합니다만 그쪽이 말 한 윤 남규 씨는 예약에 없다니까요?”

“후. 다시 한 번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거, 없다니까 그래요. 자꾸 이상한 사람 찾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알아 봐요.”

“이봐요. 혹시 착오가 있을 지도 모르니, 다시 한 번 확인은 해 봐야 할 거 아닙니까?”

올라오는 분기를 누른 채 따졌다.

이런 착오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경비라면 응당 이에 걸맞은 자세를 취하며 확인을 해야 옳다. 아까도 늘어지게 자더니 도통 되먹지 못한 자세다. 경비라고 대충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면 다 되는 줄 아나?

“어? 준경 씨?”

그렇게 경비와 옥신각신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찰나.

뒤쪽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턱 밑까지 올라왔던 분기를 싹 씻어내는 청량한 목소리였다.

“죠엘?”

금발의 푸른 눈.

다시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죠엘이 그곳에 있었다.

※작가의 말

갑자기 추천 숫자가 공개됐어요!!

으악! 놀라라!

* 윤 남규가 맞습니다. 앞쪽 소개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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