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14화 (14/240)

서연은 남자친구를 만나러 떠나고, 나는 남규와 동식이에게 보조팀 업무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베이스는 잡무 담당이었다. 맡은 개척자의 심부름이나 자질구래한 일들. 최대한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보조팀의 업무였다.

그 외로는 연예인의 매니저와 거의 흡사했다.

일정 확인과 군부대나 경찰과의 소통(거의 대부분 소향이 한다고 한다.). 행사지까지 운전을 하거나 인력 통제에 대한 일도 맡아서 한다. 게이트 부근이야 아직도 군과 경찰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지만, 그곳에서만 박혀있는 건 아니니까. 이동하거나 다른 행사에 참여 할 때는 이래저래 하는 일이 많아진다.

“일단 준경 아저씨는 정식 직원이 아니니 당분간은 뒤처리 담당을 해야 할 거예요. 자세한 건 동식이와 함께 움직이면서 차근차근 배우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가 보세요.”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는 건가?”

“서율 씨는 게이트를 넘어갔다 온 지 얼마 안 되니까요. 당분간은 행사에 끌려 다니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쪽일은 아직 아저씨와는 관련이 없죠. 이렇게만 알고 돌아가셨다가 내일 다시 사무실로 오시면 돼요.”

“사무실?”

“소향 누님이 아무 말 없었어요?”

동식이를 만나서 일 배우라고 했지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고개를 흔들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주었다. [하늘사랑]이라는 글자가 상단에 적혀 있고, 아래쪽으로는 주소와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꽤나 조악한 형태였다.

“우리 회사에요. 서율 씨하고 윤주 씨를 담당하고 있죠. 다음에 오시면 그것도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한 회사에서 모든 개척자를 관리하는 건 아닌가 보다.

하긴, 그렇게 해 버리면 또 그것도 특혜니 뭐니 하면서 말이 많이 나올 것이다. 가뜩이나 특이한 일로 여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나름대로 신경을 쓴 거겠지.

명함을 품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로 한 번 더 가 보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보겠지.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한 뒤 물러나는 것이 좋아 보였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물러났다.

#

게이트 인근 지역을 벗어나, 집 근처까지 오자 인적이 드물어졌다.

여전히 방송사니 데모 인력이니 뭐다 해서 게이트 주변은 시장 통을 이루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니 그 사이에서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한적한 길에 이르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흠.”

그렇게 걷다, 쿤에게 받은 동화를 꺼내 봤다. 조금 투박하지만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다. 동전 수집하는 사람들은 이런 느낌 때문에 모으는 싶다. 만약 이런 걸 팔면 얼마나 할까? 겉면의 동 가격으로는 얼마 안 할 거 같고, 미적인 가치로 환산하면 그나마 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괜히 장물거래 같은 걸로 곤란에 빠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모양이니 지금은 장식품용으로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돌리다가 가볍게 튕겨 봤다.

동전이 빙글빙글 돌았다.

팅~!

‘아……’ 쿤이라면 놓쳤을 리 없는 동전을 실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서로 같은 능력을 공유하고, 같은 감각으로 움직이지만 역시나 약간의 차이는 존재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동전을 줍기 위해 발을 떼었다.

“어머.”

“응?”

바닥을 구른 동전이 빨간 구두에 부딪힌 뒤 멈춰 섰다.

구두의 주인이 허리를 굽혀서 동전을 집어 들더니 조금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아래만 보고 동전을 쫒던 내 시선도 덩달아 같이 올라왔다.

"!!"

눈앞에 정신이 번쩍 들 만 한 미인이 서 있었다.

서율이와 비슷. 아니,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보다 한 끗발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게다가 혼혈이다. 눈이 파란색이고 머리가 옅은 금빛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본다.

하지만 일단 외국인.

입이 딱 붙어서 아무런 말이 안 나왔다.

사회생활 했다고 다 영어 잘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국내용이었으니까.

“이 동전 주인이세요?”

그때, 푸른 눈의 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도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부드럽게 사람을 감싸는 목소리. 톡톡 튀는 명량함은 없지만 차분한 기품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 한 건 그녀가 건넨 말이 완벽한 한국어였다는 것이다.

“아, 네. 제가 주인입니다만……”

냉정한 사고가 여기서는 도움이 안 되는 걸까?

내가 듣기에도 어눌한 발음으로 답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서율이야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계라서 그럭저럭 말을 붙일 수 있었던 거지, 나 같은 중년의 남성이 끝장나는 미녀와 일대일로 대화 나눌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괜히 목이 타서 마른 침만 꼴깍 삼키고 말았다.

“굉장히 특이한 동전이네요. 주조방식은 조금 어설프지만, 표면의 가공 처리는 또 상당히 뛰어나요. 게다가 이 표현 양식. 인물에 대한 기세가 굉장히 잘 나타나 있어요. 어딘가 왕국의 산물일까요?”

“아……”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특이한 물건을 보면 흥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뭐라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사과의 말을 건네 왔다. 이것이 모나리자의 미소인가 싶다. 긴장으로 바삭거리던 가슴이 확 하고 티였다. 가끔 그런 인물들이 있다.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그녀가 딱 그랬다.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말을 받았다.

“괜찮아요. 관심 가는 분야라면 그럴 수 있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러고 보니 소개도 안 했네요. 죠엘 루 안투리아라고해요. 죠엘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아, 저는 서 준경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무릎을 숙이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조금 당황하며 나도 마주 인사를 했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이름까지 알려주며 인사를 하나? 조금 이상하지만 그녀가 하니 그게 또 당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준경 씨. 그럼 혹시 이 동전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나요?”

“글쎄요. 저도 우연히 얻게 된 물건이라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네요. 그냥 흔한 동전 아닐까요?”

“아니에요. 주조 방식은 굉장히 어설프지만, 이 표현 양식은 단순하지 않아요. 아마도 상당한 규모의 왕국. 혹은 제국의 유산일 확률이 높아요. 여기 보면 높은 단이 그려져 있죠? 이건 그들을 지배하는 왕가나 왕에 대한 표식이에요. 또, 그 아래쪽은……”

설명을 하기 시작한 그녀는 내게 바짝 다가왔다.

샴푸 냄새? 무언가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벌렁거리며 뛰었다. 이런 거리는 나이든 내 몸에는 좋지 못하다. 뒷목을 긁으며 헛기침을 했다.

“아! 죄송해요. 또 흥분했죠? 고치려고 하는데도 쉽지가 않네요.”

혀를 베어 물며 웃었다.

고아한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이 보였다. 티비 속 연예인들과 비교를 해 봐도 밀리지 않는다. 아니, 이쪽이 훨씬 더 아름답고 생기 있다. 혹시 아직 게이트 너머에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만큼.

“그렇게 궁금하시면 그냥 가지고 가셔서 살펴보세요.”

말을 하는 순간 아차 했다.

방금 전에 동전의 처리를 미루기로 하지 않았던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괜한 짓 하기는 이르다 판단을 했던 것이다. 헌데, 지금 여자에 홀랑 넘어가서 그냥 가지고 가라고 말을 하다니.

서 준경아.

발기도 안 되는 주제에 너도 남자라고 말 하는 거냐.

“아! 정말인가요? 그래도 되나요?”

“아, 음……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이제 와서 눈앞의 미인에게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냉정한 사고가 나와서 팍 하고 끊어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 냉정한 사고마저도 홀딱 넘어가 있는 거 같다.

그녀가 동전을 받아서 반짝이는 눈으로 보더니 냉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혹시 나 지금 사기 당한 걸까. 작은 의심이 생겨났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죠? 혹시 필요한 거라든지 원하는 거라든지 있나요?”

“딱히 그런 걸 바라고 드린 건 아닙니다만……”

“하지만 어머니께서 신세를 졌다면 꼭 갚으라 했어요. 이 동전은 그 동안 모은 수집품들 사이에서도 단 한 번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에요. 어쩌면 지금껏 알지 못했던 숨겨진 왕조의 물건일지도 모르죠. 그런 걸 받아놓은 채 그냥 가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진지하게 말을 붙여오는 모습이 신세를 못 갚으면 멱살이라도 쥘 기세였다.

조금 난감했다. 속내야 그냥 돈이라도 불러볼까 싶지만, 어느 정도를 불어야 할지도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속물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자라면 여자 앞에서 잰 채 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아내한테 이혼 서류를 배송 받았으면서도 그 본성은 전부 버리지 못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다 가장 그럴싸한 답을 내 놓았다.

“동전에 대해서 뭐라도 알아내면 제게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 식사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면 충분 할 거 같은데.”

“아……정말로 그거면 되나요?”

“충분해요. 그쪽 같은 분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겠죠.”

[특기 하급 화술이 생성 되었습니다.]

엥? 갑자기 떠오른 알림에 순간 멈칫했다.

화술? 말 하는 기술이라는 건가? 하지만 갑자기 왜 지금이지? 설마 조엘에게 던진 마지막 말 때문에?

“후후. 기분 좋은 말이네요. 오늘은 운이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신기한 동전에 좋은 사람까지 만나게 되고.”

“……하하. 저야말로 운이 좋죠.”

“역시 어머니의 나라로 오기를 잘 한 거 같아요. 그 동안 고민 하던 게 조금 풀리는 기분이네요.”

“음?”

“아, 아니에요. 혼잣말이 나오고 말았네요. 그보다 연락 할 번호를 주실 수 있나요?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황급히 폰을 꺼냈다.

명함이라도 딱 꺼내서 건네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듯 한 명함이 없다. 번호를 찍네 마네 하면서 잠시 꼼지락 거리고 나서야 겨우 번호를 교환 할 수 있었다. 그녀도 스마트폰 조작이 어색한지 나와 마찬가지로 헤맸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이 동전. 정말로 고마워요.”

“나중을 기대하도록 할게요.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후후. 근사하게 한 턱 내도록 할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정말로 그 말을 지킬지 아닐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인사하고 물러나는 그녀를 보는 내 기분은 굉장히 좋았다. 남자란 어쩔 수 없는 동물인가 보다.

[하급 화술]을 살피기 위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작가의 말

후...남자란.

예전에 연예인을 집적 보고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주변에 사람이 막 몰린 상황이 아니라 그런지 쉽게 말이 안 나오더군요.

얼굴도 무기라면 무기 ㄷㄷ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