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윽!!”
쿤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이마를 부여잡으며 물러났다.
누군가 한 대 세게 때린 것처럼 이마가 아팠다. 손을 대어 훑어보니 피도 베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설마……”
간이식으로 차려 둔 제단을 보니, 공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쓰린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 판단했군.’
고통이 행복의 증거일리는 없으니, 이는 공물이 잘못 되었다는 뜻과 같다.
저울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신답게 상벌은 아주 분명했다. 손등을 두드려 창을 살펴보아도 확실히 무언가 늘어 난 것은 없었다.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는 얘기로군.’
조금은 막막하다.
쿤이 침대에 엉덩이를 걸친 채 생각에 잠겼다. 전에 바쳤던 단검과 이번의 그릇. 차이점은 여러 가지 있었다. 한쪽은 살상 도구이고, 다른 한쪽은 집안일 하는 곳에 쓰이는 물건. 단검은 철제 날을 지녔고, 그릇은 흙을 구워 만들었다는 정도.
‘아, 혹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쿤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모두 꺼내 들었다. 은화 하나와 동화 둘. 이게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내게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지금 내 상황에 가치가 있는 물건. 적을 맞이한 상황에서 단검을 바쳤다면, 돈이 필요한 지금은 돈을 바치라는 거겠군.”
간단하다.
세상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고, 그것마저 상황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많은 황금보다 목마를 때의 물 한 잔이 더욱 귀한 것처럼, 가치를 매긴다면 당장 이 순간에 필요 한 물건이 제일이다.
“서 준경 신이시여. 이것을 공물로 바치겠습니다.”
쿤이 남은 돈을 모두 쓸어 제단 위에 올렸다.
#
“아저씨 다 닦았으면 이제 내려가요.”
“아, 이제 된 건가?”
자연스럽게 답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쿤의 감각이 실 같이 흐르다 사라졌다. 몇 번 오갔다고 바뀌는 순간을 어느 정도 감지 할 수 있었다. 게이트를 넘어가는 것도 완전히 다 몸을 뻗지 않아도 되니, 주의만 한다면 이상한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될 거 같다.
동식이를 따라 앞서 애기했던 곳으로 이동했다.
보조팀 일원이 사용하는 휴게실이라고 한다. 다른 팀원들이 일 끝나고 들어 올 테니 그때까지 잠시 쉬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쉴 때인가. 화장실 간다는 말로 빠져나왔다.
***
이름 : 제국 동화
가치 : 10 * 2
이름 : 제국 은화
가치 : 50 * 1
***
인벤토리를 열어보니 쿤이 넣어 둔 돈들이 들어 있었다.
손가락을 집어 꺼냈다. 차갑고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은과 동. 물론, 완전히 순은과 순동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빈 그릇 보다는 확실히 가치가 높았다. 게다가 둘을 합쳐서 전부 70의 가치가 산출되었다.
***
이름 : 서준경 / 쿤 타이(Lv1) 종족 : 인간
힘 : 12 민첩성 : 10
체력 : 15 지능 : 12
스킬 : None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 하급 은신
신성 포인트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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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텟창을 확인하니 예상대로 신성 포인트가 70점 늘어나 있었다.
쿤의 생각대로 그 순간의 가치 있는 물건이 높은 포인트를 구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무언가를 찍을 수 있는 점수 정도는 되었다.
100점이 기본적으로 하급 능력을 올릴 수 있는 하한선이다.
지금 쿤에게 필요 한 능력이 뭐가 있을까?
돈을 다 투자했으니, 쿤은 이제 알거지다.
밀항을 해서 빠져나가자는 계획 자체를 신(서준경)에게 맡긴 꼴이 된 것이다. 이건 반드시 해결을 해 주어야 한다. 지금 그의 처지를 개선시켜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런 식의 행위를 안 할 가능성도 있다.
많은 믿음과 많은 공물.
이것이 나를 살찌우게 할 방향이다.
“돈. 밀항할 돈이 필요해. 하지만 지금 자본금은 0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데……”
쿤의 상황을 놓고 생각해봤다.
가장 단순한 건 소매치기를 하거나 누군가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 하지만 웬델 마을은 무역이 활발하고 이방인들이 많이 들어오는 만큼 자경단의 활동이 활발하다. 기본적으로 자유 경제 활동에는 손을 안대지만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면 무사하기 어렵다.
하급 손재주, 하급 범죄 감각, 하급 자물쇠 분석……
혹시나 해서 범죄 쪽으로 생각하고 특기를 열어보니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소매치기 기술이 따로 있었다면 그것을 찍어 볼까도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직접 실행해야 하는 것이니 스킬로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범죄로 얻기 어렵다면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는 말인데. 당장 팔 만 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울을 보며 세면대를 톡톡 쳤다.
뭔가 막 해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제한점이 많았다. 일단 포인트가 한정적이고 얻을 수 있는 특기도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이건 마치 구식 RPG게임과 같다. 한 번 스텟이나 스킬을 잘못 찍으면 망캐가 되어 버리는 그런 시스템.
“음.”
게임으로 치자면 이것은 이제 막 모험을 떠난 시점이다.
상황이 조금 막장이기는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서 포인트를 사용 할 필요성이 있다. 바탕에 깔 수 있고, 지금 상황에서도 이득이 되는 것.
“……행운.”
순간 번뜩이며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게임의 주인공이면 뭐니뭐니해도 보정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굳이 풀자면 무엇이겠는가. 바로 행운이다. 주인공만 가질 수 있는 행운.
“있나? 있어? 아! 있다!”
***
하급 행운
소유주의 모든 일에 낮은 수준의 행운이 깃든다.
***
설명은 간단했지만 내용을 잘 보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모든 일에……’ 바로 이 구절이다. 행운은 어떤 행위를 함에도 그 영향을 미치는 특기다. 그리고 이는 쿤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영향을 주게 될 터. 하급 은신같이 말년 병장이 쓸 만 한 특기가 아닌, 현실에서도 최적의 효과를 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능력이 쿤의 상황을 해결 해 줄 수 있느냐.
“……당장에 있어서는 행운 만 한 게 없어.”
사실 확신은 없다.
운이 좋아진다. 말 그대로 쿤의 일을 운에 맡긴다는 것. 하지만 몇 번을 곱씹어 생각을 해 봐도 행운 보다 지금 상황에서 어울리는 특기는 없어 보였다.
“내 감을 믿자.”
남자 아닌가.
이 한번 꽉 물고,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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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장 그 효과를 확인 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에 접근 할 수 있는 일과가 일단 끝났기 때문이다. 손을 대충 닦고 후다닥 휴게실로 돌아왔다.
“아저씨, 뭐하다 왔어요!? 빨리 이쪽으로 와요!”
휴게실 안쪽에 처음 보는 사람 둘이 더 있었다.
하나는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 다른 하나는 30대 초입의 여성이었다. 동식이가 조금 어려워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들이 아마 보조팀의 선배인 듯싶었다.
“그쪽이 이번에 들어왔다는 그 사람이에요?”
“아, 네. 서 준경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반가울 거 없네요.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딸 뻘인 여자한테 부탁해서 낙하산으로 들어 왔다면서요?”
“서연 누나……”
뭐지 이년은?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말 하는 모양새가 불길한 느낌을 자아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대충 이 사람이 본성은 착한데 상황 때문에 모질게 하는지, 아니면 그냥 성격이 더러운 건지를 알 수 있다.
지금 내 앞에서 삐딱하게 말 하는 30대의 여성은 후자의 것이다.
앙칼지게 올라간 눈매하며 틀어진 하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보이는 적대적인 자세. 이것은 전형적인 마녀 타입의 여성이었다. 노처녀 히스테리로 생리 불순에 시달려서 일단 시비부터 트고 보는 타입이다.
화사에 있었을 당시에도 이런 사람을 만나면 일단 피하고 봤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 뜨끈하게 쓰려오는 속을 다독이며 간신히 웃은 얼굴을 만들었다.
“소문이 벌써 퍼졌군요. 이해는 합니다. 갑자기 나이 많은 인간이 뚝 떨어지면 나라도 기분 나쁠 테니까요.”
“알면서도 계속 다닐 생각이에요? 우리가 뒤나 닦는 업종에 있다고 우습게 보여요? 이쪽 일은 그냥 막 대충 꽂으면 들어와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연 누나, 좀 진정 해 봐. 저기, 서 준경 씨? 저는 윤 남규라고 합니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누나가 신경이 예민해요. 이해해 주세요.”
“야! 남규! 누가 예민하다고 그래!? 내가 이 나이까지 결혼 못 한 게 내 잘못이야!?
아, 적중했다.
역시 결혼 못 한 노처녀였다.
난 분명 행운에 투자를 했는데, 만난 게 이런 인물이라니. 혹시 이번 선택은 꽝이었던 걸까?
우우우웅……!
그때, 바락바락 외치던 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잡고 늘어지는 남규의 팔을 뿌리치고는 핸드백에서 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면서도 나를 계속 노려보는 것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어? 도진 씨?”
그런데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갑자기 서연의 얼굴이 봄 날 뙤약볕에 놓인 삽살개마냥 늘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변했다. 철판을 긁는 것처럼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물엿을 늘여놓은 것 마냥 부드러워졌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던가. 눈앞에서 보고 있자면 이건 한 편의 공포영화와 다를 바 없었다.
“으아, 다행이네요. 누나 남자친구가 출장에서 돌아왔나 봐요. 운이 좋았어요. 그냥 두었으면 별별 거 가지고 다 시비를 걸었을 텐데.”
남규가 가까이 와서는 히죽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도 서연의 패악 질이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달궈진 짱돌 같은 서연에 비해서 그는 그래도 성격이 무난해 보였다.
“아저씨, 정말로 운이 좋은 거예요. 저도 처음 들어왔을 때 얼마나 시달렸는데요. 으……”
이번에는 동식이가 와서 옆구리를 찌르며 말 했다.
벌써 두 번이다. 같은 말을 한 것이.
하급 행운.
잘못 찍은 거 같지는 않다.
※작가의 말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도 행운이!!
반짝반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