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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메이커-12화 (12/240)

쿤은 집을 죄다 뒤져서 돈이 될 만 한 것들은 모두 챙겼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마을을 벗어나, 다시 숲길로 이동했다. 루카스의 보고를 받은 정찰병들이 단독으로 움직였다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적었다. 아마 보고는 올려 두었을 터. 선발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병력을 충원해서 보낼 것이 분명했다.

작은 산 하나를 더 넘어, 보르도 경계 지역까지 이동했다.

이대로 쭉 서진하면 테베스 공국이 나온다. 제국과는 일단 적대적인 국가이니 추격을 피해서 몸 숨기기에는 좋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이 꽤 멀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추격이 느슨해질 기미가 안 보이는 상황.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막연히 도망가다가는 덜미를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웬델 마을까지 가서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나으려나?’

서쪽에 위치한 상업마을 웬델은 바에른 호수를 이용해서 공국과의 무역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사업차 공국으로 가는 배는 검문을 당하지 않는다. 돈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인데, 덕분에 밀항을 해서 넘어가는 이들도 상당하다. 쿤이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방법.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죽은 사람 품 뒤지고, 집을 싹 털어서 얻은 거라고는 제국 동화 몇 푼과 은화 하나. 이걸로는 아무리 맘 좋은 상인을 만나도 건너가기 어렵다.

‘서 준경 신이 돈이라도 팍 뿌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힘들면 결국 신을 의지하게 된다.

쿤이 조금은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손등을 살폈다. 한 번 도움을 주었으니 혹시 이번에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었다.

‘……그럴 리 없지.’

하지만 보기만 한다고 뭐가 나올 리 없다.

신이라고 땅 파서 장하사하는 건 아닐 터. 뒷머리를 긁적인 뒤 일단 걸음을 옮겼다. 자세한 것은 웬델 마을에서 정하자. 그리 마음을 먹으며.

#

웬델 마을은 과연 상업도시답게 북적거렸다.

가판이 깔려 갓 잡은 고기나 야채. 무두질한 가죽 따위를 거래했다. 뒤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제련하여 전시하고, 힘 좋은 장정이 나와 날카로움을 뽐냈다. 가끔은 삼삼오오 모인 이들이 손뼉을 치며 이 노름에 동전을 던져주기도 했다.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었다.

“자자! 돈 놓고 돈 먹기!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때, 사람 꽤나 모인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주사위 노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쿤이 할 일이 있음에도 혹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왕년에 주사위 좀 만졌고, 지금도 구르는 소리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같은 대에 있던 친구들은 의뢰에서 죽기보다, 도박으로 목 걸어 날리는 게 빠를 거라 농담을 하곤 했었다.

“거기, 총각! 한 번 걸어 보실랑가?”

“저, 저요? 저는 이런 거 잘 못하는데.”

“하하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 번 해 보라고.”

“그래, 그래! 남자 새끼가 배짱이 있어야지. 그러다가 훅 떼 간다?”

가판을 놓고 주사위를 놀리는 남자가 앳돼 보이는 청년을 가리켰고, 그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짓궂은 농담 따위를 던졌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청년이 잠시 망설이더니 ‘에잇! 그래 까짓것 죽기야 하겠습니까!?’라며 도전을 청했다. 사방에서 ‘오오~!’ 라며 화호성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굴러 갑니다!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짠! 과연 통 안의 주사위 합이 십 보다 클까요, 작을까요!?”

주사위 세 개를 가지고 돌리는 노름이다.

총 합은 18이고, 노름꾼이 지정하는 숫자를 시점으로 크고 작음을 고르면 끝이다. 어떤 수작을 쓰던 결국 반반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이 혹하기 쉬운 게임이다.

청년이 잠시 고민하다 크다에 돈을 걸었다.

동화 다섯 개다. 생각보다 큰 배팅에 주변의 환호성이 더 커졌다. 일찌감치 손을 떼고 있던 노름 꾼이 청년에게 고개 짓을 했다. 직접 열어보라는 뜻이다.

“열어 봅니다.”

“자자, 보다시피 손을 놓고 있습니다. 완전히 공정한 게임. 여시죠.”

“그럼 엽니다……어! 어!! 십 일! 내가 이긴 거죠!?”

“으악! 그게 맞다니!”

청년이 환호하고, 노름 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기본적으로 배당은 세 배. 동화 다섯 개를 걸고 열 다섯 개를 따 가는 것이다. 주변에서 부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번에 세 배의 돈을 버니 혹하는 것이다.

‘그러다 손을 대면 당하는 거고.’

노름이라면 빠삭한 쿤이다.

손을 떼고 물러난 노름 꾼이 바닥에 잇는 장치를 살짝 건드려 주사위의 위치를 바꾸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즉, 청년도 노름 꾼과 한 패라는 뜻이다. 돈 버는 모습을 보여주고 손님을 끌어오는 수법.

‘수법. 수법이라……’

보고 있던 쿤이 턱을 쓰다듬었다.

노름 하는 모습을 보니 한 가지가 떠오른 것이다. ‘서 준경’ 신은 포위에 갇혀있을 때 하급 은신이라는 특기를 주어 몸을 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밀항을 하기 위한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서 또 무언가를 내어 주지 않을까?

‘공물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쿤은 아주 단순하게 이해했다.

서 준경 신은 공물을 바치면 필요한 능력을 내려 준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점수로 환산되어 구매 할 수 있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골자는 분명 그러했다.

‘그렇다면 어떤 공물이 가치가 높은지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쿤이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일전의 단검은 100점 정도의 가치를 발휘했다. 그리 질 좋은 검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상당히 높은 점수를 부여해 주었다. 하급이라는 이름을 단 특기들이 모두 100점이니 그 숫자가 분명 낮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내게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서 점수가 높게 나온 것일까?’

생각을 해 보니 꽤 말이 된다.

신에게 금이나 은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애정 어린 물건이나 오래 사용한 도구들. 이런 것들이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런 물건은 없어. 그렇다면 타인의 것도 그와 비슷하게 통용될지도 모르겠군.’

생각을 정리한 쿤이 장터를 가로질러 사람을 살폈다.

그러다 늙은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을 발견했다. 나무와 짚을 엮어 짠 그릇을 팔고 있었다. 투박한 모양이라 그런지 사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쿤이 그 앞으로 걸어가서는 낡은 그릇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할멈. 혹시 이거 파는 겁니까?”

“……응? 뭐라고?”

“이거 파는 거냐고요.”

그가 들어 올린 건 가판에 놓인 게 아니라, 돈을 담은 통. 꽤나 오래되고 손때가 잔뜩 묻어있는 물건이었다. 딱 봐도 가판에서 물건 살면서 연명하는 노인. 평생을 들고 다니며 썼을 것이다. 애장품이라 여긴다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여겨졌다.

“동화 다섯 개에 파쇼.”

“다섯 개에……? 좋지. 좋아. 언능 가져가라고.”

노인은 쓸모도 없는 그릇을 팔아 좋은 모양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돈과 그릇을 교환했다.

‘좋아. 이제는 실험을 해 볼 때군.’

쿤이 짙게 웃은 뒤 들어 올 때 보았던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맞다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

아아아아아악!!!

이 머저리! 병신! 등신! 돌대가리!!!

입을 막지 않았다면 내 입에서 이것들이 전부 쏟아져 나갈 뻔했다. 혼자서 입 막고 버둥거리는 내 모습에 동식이가 의아한 얼굴로 봤다. 손을 쭉 뻗고 스트레칭 하는 시늉을 해서 그 시선을 벗겨냈다.

정확하게 5초 전.

쿤은 봐 둔 여관으로 갔고, 조용히 문을 닫고 공물을 바쳤다. 손등을 쳐 창을 연 채 물 한 접시를 떠 놓은 상태로 평평한 단을 만들어 그곳에 접시를 올린 것이다. 굳이 대단한 제단 없이도 공물은 바칠 수 있는 모양. 하지만 그 좋은 소식과는 다르게 내가 넘겨받은 건 쓰잘때기 없는 그릇 하나였다.

낡고 허름한 이 그릇을 대체 어디에 쓰란 말인가?

나보고 적선하라고?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놈이 또 있을까싶다. 공물이면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한 걸 바쳐야 할 거 아닌가? 정 모자라다 싶으면 은화라도 바치면 전당포에 팔아서 돈이라도 몇 푼 손에 쥘 텐데!

후우. 진정하자.

여기가 중요한 파트다. 이대로 그냥 두면 멍청한 쿤은 이게 신의 의도라 생각하고 또 다시 그릇 같은 걸 바칠게 될 것이다. 반드시 이 상황을 정정해 주어야 한다.

“아이고, 동식 군. 나 잠깐만 화장실 갔다 올 수 있겠나?”

“아이 거 참. 일 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요?”

“긴장을 했는지 아랫배가 살살 아파서. 내, 금방 갔다 올 테니 사정 좀 봐 주게나.”

“어휴. 내가 진짜 아빠 같아서 참는 줄 알아요. 빨리 다녀오세요!”

진짜로 같이 일하는 동식이가 착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랫배를 잡은 채 엉거주춤 달려서 근처에 설치 된 간이 화장실로 이동했다. 겉모양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개척자들이 쓴다고 내부는 훌륭했다.

인벤토리.

거울을 보며 반짝이는 창을 열었다.

예상대로 낡은 그릇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까 더 열이 받는다. 꺼내다 팽개칠까 하다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

이름 : 노인의 낡은 그릇

가치 : 0

***

기본적으로 쿤이 공물을 바치면 신성점수가 늘어나고, 그것으로 특기를 구입 할 수 있다. 물론 그 영향은 나도 받지만, 쿤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의 위업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잘못 된 공물을 바쳤을 때 신이 내리는 벌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보통이라면 벼락같은 게 떨어지겠지만, 나는 무리.

대단하지 않더라도 티를 낼 수 있는 것. 나는 이 공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표시를 할 수 있는 것이면 족하다.

예를 들어 몸에 작은 상처를 낸다든지……

욱씬!

그때, 갑자기 어깨가 아려왔다.

마치 오래 된 상처가 쑤시는 것 같았다. 넘어지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의아해 하며 셔츠를 풀러 거울에 어깨를 비춰봤다. 시커멓게 든 멍이 그곳에 있었다.

“멍. 여긴 화살 맞은 자리잖아.”

쿤의 경험으로는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

좋은 회복력으로 상처는 아물었지만 아직 고통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고스란히 지금 나에게 넘어 온 것이다. 황급히 셔츠를 당겨 올려서 옆구리를 보자, 그곳에도 희미하게 흔적이 있었다. 단검에 베인 자리.

“서로의 육체가 영향을 받는구나.”

혹시나 했던 것인데, 명확하게 증명되었다.

머리가 조금 울렸다. 쿤이 죽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만약, 쿤이 그 싸움에서 죽었다면?

오싹.

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젠장. 아주 제대로 엮였구나.”

거울에 손을 댄 채 얼굴을 살폈다.

조금 삭아 보이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굉장히 불쌍해 보인다. 참 형편없이도 늙었나 싶었다. 그러자, 작게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늙어가는 마당에 잡은 기회.

이 정도의 리스크가 없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주사위 노름만 해도 재산을 탕진하느니 마느니 하는데, 이 정도는 내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냉정한 사고 덕분인지 빠르게 흥분이 가라앉았다.

고개를 끄덕인 뒤 거울에서 물러났다.

“……어쨌든 이걸로 벌은 정해졌네.”

내가 영향을 받는다면 반대도 분명히 적용이 된다.

필요 한 것은 쿤이 잘못 된 것을 알아 챌 정도의 징벌. 그 어떤 것보다 고통보다 확실한 각인은 없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화장실 벽에 머리를 받았다.

쾅!!!

아프다.

이게 신벌이다.

※작가의 말

공물! 공물을 다오!

댓글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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