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은 무사히 제국의 포위망을 벗어 날 수 있었다.
중심부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산 아래쪽 경계는 생각보다 허술했다. 게다가 사냥개를 위쪽으로 전부 몰아넣은 덕에 유황 냄새가 가셨을 당시에도 쫒기지 않은 채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포위망을 벗어난 쿤은 그대로 숲길을 따라 페오닐 마을로 향했다.
혹시 모를 추격을 피하기위해서 잠시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과거 같은 용병단에서 활동하던 루카스라는 친구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몸이니 일단은 믿을 만 했다.
쿵쿵쿵.
늦은 밤. 쿤은 친우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안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이 열렸다.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과 조금은 늘어진 얼굴. 3년 만에 보는 친우의 얼굴은 조금 낯설었다.
“쿤! 쿤 아닌가!?”
“하하. 오랜만이다, 루카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벨토드 원정 전투에서 만나고 난 뒤 3년 만이었다. 당시 서로의 상처를 지켜주며 피 흘리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던 만큼 다시 만난 기쁨은 적지 않았다.
루카스가 한참이나 쿤의 얼굴을 더듬다 문 옆으로 길을 열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날이 차다고.”
“사양하지 않지.”
루카느는 데운 양젖과 말린 고기를 내 왔다.
오랫동안 인적을 피해서 도주해 온 쿤은 마다 할 생각이 없었다. 입에 우겨넣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그나저나 꼴이 이게 뭔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말도 말라고. 이상한 의뢰에 엮여서 아주 죽을 고생 중이니까.”
“어디서 귀족가 영양이라도 납치하라 하든가?”
“하하.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낫지. 상회에 서신 하나 전달하는 의뢰였는데, 알고 보니 반란군 밀서지 뭔가. 간신히 빠져나와서 꾸역꾸역 도망 다니는 중이야.”
바닥이 보이는 빈 그릇을 할짝거리며 쿤이 툴툴거렸다.
중간에 ‘서 준경’이라는 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목숨을 구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제국이 얼마나 악독하던가. 잡혀갔으면 죽음보다 못한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내 사정이 그러해서 그런데, 며칠만 이곳에서 숨 돌리게 해 주게. 가는 길에 몇 푼이나마 보태주면 더 좋고.”
“하하. 낯짝 두꺼운 건 여전하구만.”
“이 마당에 얼굴에라도 철판 깔아야지 않겠나. 어때, 사정이 괜찮겠어?”
아무리 격 없이 지내왔어도 신세지는 건 조심스럽다.
쿤이 농담 섞어 묻자, 루카스가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마침 의뢰가 잘 끝나 돈도 충분하니 큰 도시까지 갈 수 있게 넉넉히 품도 챙겨 주겠다 말을 하며.
“내가 그래도 완전히 죽을 팔자는 아니야.”
“그런 소리는 이미 넉넉히 들었네. 목숨 빚이 있으니 이렇게나마 갚으면 좋은 거지.”
“하하. 빚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챙겼던 거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다 루카스가 무언가 생각 난 듯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게 아니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 없어서야 쓰나? 내 밖에 가서 좀 사가지고 오겠네. 집처럼 편안히 있게나.”
“사양하지 않겠어. 안 그래도 몸이 몸 같지 않아서 말이야.”
“금방 다녀오지.”
친구 하나는 잘 두었다.
쿤이 희게 웃었다.
#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거나하게 술을 들이켰다.
어느 정도는 안전한 지역으로 나왔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쿤은 평소보다 조금 모자란 주량에 백기를 내걸고는 잠자리를 청했다. 옷도 다 벗지 못한 채, 낡은 침대에 몸을 걸쳤다.
이음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그대로 잠에 빠졌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급하기 들이부운 맥주 탓인지 쿤은 요의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멍 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뒷간을 가기 위해 비적비적 걸음을 옮겼다.
“……습니다.”
“응?”
그런데 1층 현관 부근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은 친우인 루카스의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모르는 사람의 것이다. 창밖으로 달이 떠 있으니, 날이 샌 것은 아닐 터. 이런 시간에 누가 찾아왔을까 싶어 의아했다.
“돈은 확실히 주시는 거죠?”
“그렇다니까. 뒤로 물러나 있어라.”
“아,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묘하다. 난간에 몸을 걸친 채 아래쪽을 살폈다.
긴장 때문인지 그리 급하던 요의도 쏙 들어갔다.
“너희 둘은 뒤쪽으로 가라. 남은 셋은 날 따라와. 포위망에서도 도망친 놈이다. 확실히 잡을 수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쿤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아래쪽에 있는 놈들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지난 며칠간 죽어라 도망쳤던 놈들 아닌가. 바로 제국의 정찰대다.
‘루카스 네놈이!’
상황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친구라 믿어 몸을 의탁했는데, 그놈이 배신을 때린 것이다. 보아하니 대대적으로 수배전단까지 뿌린 모양이다. 겨우 서신 하나 전달했을 뿐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끼익……
하지만 신세한탄을 길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래쪽 정찰병들이 하나씩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쿤이 뺨을 세게 꼬집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발자국 소리로 봐서 적은 전부 다섯. 뒤로 둘이 빠졌다면 앞에는 셋뿐이다.’
셈을 빠르게 하고 황급히 움직였다.
지금 손에 무기는 없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쓸 만 한 것을 찾았다. 방구석에 쇠로 된 망치 하나가 보였다. 못이나 겨우 박을 만치 작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감지덕지였다. 손에 꾹 쥔 채 문 뒤에 몸을 숨겼다.
덜컹.
그리고 곧바로 문이 열리고 정찰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선은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쿤이 순식간에 입을 틀어막고 머리통을 망치로 찍었다. 퍽 소리와 함께 핏물이 튀었다.
정찰병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대로 몸을 받친 채 뒤로 당겨 침대 옆으로 숨겼다. 아직 일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옆방을 거쳐서 둘이 더 다가왔다. 나름대로 신중을 기한다고 한 거 같은데, 그것이 악수가 되었다.
끼익.
나무 바닥이 우는 소리. 문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 둘이 모여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쿤이 소리 없이 문을 밀어 차 한 쪽으로 열고, 당황하는 한 놈의 목을 망치로 후려쳤다. 뽀각! 하는 소리와 함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이 놈이……!”
문에 밀렸던 놈이 바닥을 짚으로 황급히 일어나 검을 찔러왔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기세다. 날래게 피한 뒤 안면을 망치로 찍었다. 우그러지는 얼굴을 보니 조금은 미안하다. 하지만 살자고 하는 짓 아니던가. 다시 망치를 수습해서 머리통을 찍었다. 피가 얼굴로 튀었다.
“하아……하아.”
숨도 못 쉬고 움직였더니 호흡이 가빴다. 황급히 이를 수습하고 다른 쪽을 살폈다. 마지막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급히 올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망치의 피를 대충 닦아내고는 죽은 놈들의 짐을 뒤졌다. 제국에서 발행한 동화와 단검 두 자루가 나왔다. 품 안에 우겨넣고는 조심스레 밖을 살폈다.
문 뒤로 돌아가 대기하던 둘이 보였다.
위에서 처리 할 거라 생각했는지 그리 긴장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그대로 참문 너머로 뛰어 내렸다.
“뭐……컥!!”
“이 새끼, 어디에서!!”
떨어지는 충격으로 한 놈의 목이 꺾였다.
남은 하나가 다급히 외치며 단검을 찔렀다. 역시나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착지 할 때 발목을 조금 다쳤는지 피하는 자세가 어정쩡했다. 어깨가 스치고 아릿한 고통이 몸을 저몄다. 이를 악물고 남자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바닥으로 넘겼다. 쾅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내리꽂힌 남자가 컥 하며 신음을 토했다.
기회를 놓치는 건 있을 수 없다.
쿤이 챙겨 두었던 단검으로 목을 쑤셨다. 그르륵 거리며 피거품이 올라왔다. 죽은 걸 확인 한 뒤 다시 뽑아서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이제 끝인가?’
몸을 수습하며 쿤이 생각했다.
퍽—!
하지만 그때, 아래쪽 현관 너머에서 화살이 하나 날아와 어깨에 틀어박혔다. 정찰병이 사용하는 아기살이다. 분명 다섯을 잡았거늘.
‘한 놈이 더 남아 있었나!?’
쿤이 이를 악물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파파팍. 하며 있던 위치로 화살이 연달아 날아와 꽂혔다. 연사하는 솜씨가 상당했다. 어설프게 단검 휘두르던 놈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이놈이 대장이군.’
발걸음이 겹쳤던 모양이다. 쿤이 전문 도적도 아니고, 그걸 완벽하게 맞추는 건 무리가 있었다. ‘셈 틀려서 화살이라니. 손해가 막심하군.’ 잇소리를 내며 창 아래쪽으로 몸을 굴렸다. 틈 사이로 화살이 한 대 스쳐갔다.
“도망 칠 수 없다!”
“좆이나 까 잡숴!”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허리춤에 넣어 두었던 단검을 던졌다.
보고 던진 건 아니다. 대충 거기 있겠거니 하면서 뿌린 것이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흔들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찍었는데 맞은 모양이다.
피싯!!
하지만 기뻐하긴 일렀다.
바닥을 다시 구르는 틈에 날카로운 단도가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적도 근접전을 예상했는지 활을 버리고 단검을 들었다. 겨우 몸을 수습해서 고개를 들어 올리니 가죽 갑옷을 입은 정찰병이 떡하니 앞에 서 있었다.
“새끼!!”
챙. 단검끼리 부딪혔다.
쿤이 이를 악물었다. 화살을 맞은 어깨가 아려왔다. 오랜 여정의 피로에 술까지 먹은 몸이라 힘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부상의 여파까지 생각하면 오래 버틸 만 한 건 분명 아니었다.
“퉤!!
침을 얼굴에 뱉은 뒤 단검을 찔렀다.
‘더러운 새끼!!’ 정찰병이 소매로 눈을 훔쳐내며 몸을 뺐다. 거리가 좀 멀어 베지 못했다. 대신 틈은 제대로 만들었다. 남은 단검을 마저 뽑아 그대로 던졌다. 자세가 흐트러져서인지 상대는 피하지 못하고 허벅지에 맞고 말았다.
“하!”
짧게 호흡하며 뛰어 들어가 단검을 질러 넣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숨이 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턱하니 풀리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대로 상대를 안은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우에에에엑!!!”
그러고 나자 전날 먹은 술이 올라왔다.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는 시체에 구역질을 했다. 고인 모독인가 싶지만, 알게 뭔가 싶었다. 속이 깨끗하게 비도록 아주 거하게 토악질을 했다.
“어, 어떻게?”
그때, 현관에서 루카스가 들어왔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쿤이 정찰병들을 당하지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사실 그게 맞다. 대장격인 남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급조해 때운 병사라 해도 수적인 차이가 분명하다. 그가 아는 쿤의 실력으로는 이들을 모두 당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보는 바와 같았다.
그가 ‘어……’하고 신음을 흘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개새끼. 친구를 배신해?”
“자, 잠깐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좆까는 소리 하지 마.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를 어떻게 저버릴 수가 있냐!?”
토사물을 닦아내며 쿤이 다가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멱살을 잡아 당겨 올렸다. 루카스는 눈만 데굴데굴 굴릴 뿐 전혀 반항도 하지 못했다. 마치 짚단을 잡아 올린 거 같다.
쿤이 거칠게 외쳤다.
“뭐야, 이건!? 3년 동안 술에 찌들었던 거냐!?”
“어, 어쩔 수 없다고. 나는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어.”
“뭐”
의외의 말에 쿤이 잡았던 멱살을 툭 놓았다.
루카스가 비적비적 흔들리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짓말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왕년에는 힘 좀 쓰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뒷방 늙은이만 못한 모습이었다.
“나라고 좋아서 그런 건 아니야. 검도 못 잡는 용병이 뭘 하겠어? 빚도 산더미고……이대로 있다가는 어머니마저 노예로 끌려가게 생겼다고.”
“그래서 친구를 팔았다?”
“미, 미안하게 됐어. 나도 그만 눈이 멀어서……하, 한 번만 용서해 줘. 그래도 우리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구 사이잖아. 응?”
“그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구.”
“그러니까……커억!!”
쿤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드는 루카스의 목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살려 줄 거라 믿었던 것이다. 쿤은 잔정이 많은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흥.”
바로 특기.
냉정한 사고는 합리적인 판단을 도왔고, 분노는 평소보다 월등히 강한 전투력을 불러왔다. 이것이 특기의 위력이다. 쿤은 정신없이 싸우느라 눈치 채지 못했으나, 그의 손등은 이미 붉은 색으로 활성화 되고 있었다.
“기분 더럽군.”
피 묻은 단검을 털어내며 쿤이 중얼거렸다.
※작가의 말
댓글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 쿤이 공물로 준경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준경이 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장면도 계속 나올 겁니다.
* 본래 쿤의 무력은 정식 정찰병 하나보다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