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준경 씨죠?”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다.
박소향. 서율이의 보조팀을 관리하고 있는 인물이다. 서율이가 위쪽에 건의하여 면접을 보게 되어 이렇게 만나게 됐다. 첫 만남에 악수를 하고 난 뒤는 계속 이런 시선으로 나를 보는 중이다.
“사정은 대충 들었어요. 서율이가 은혜를 갚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던데……”
“착한 아이니까요.”
“맞아요. 요즘 세상에 찾기 힘들 정도로 착한 아이죠. 그래서 영 내키지가 않네요. 그쪽 사정이라는 게 꽤나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걸로 우리 서율이한테 달라붙는 건 곤란해요. 마음의 빚이 있는 이상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 테니까요.”
안경을 슥 올리고 말 하는 모양새가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느낌이다.
그녀의 걱정은 나도 이해를 한다. 갑자기 다 늙은 중년 남자 하나 꽂아 달라고 부탁을 하면 탐탁지 않게 볼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물러 날 수 없는 이유가 내게는 분명히 있다.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대꾸했다.
“이 이상 피해주지는 않을 겁니다. 잡무든 뭐든……마다하지 않고 할 테니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나이에 다른 직장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이대로 손을 놔 버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으음.”
“사고 당하고 깨어나 보니 마누라는 이혼서류를 내밀고, 직장에서는 퇴직 처리가 돼 있었습니다. 뭔가 하나라도 잡아서 매진 할 거리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부탁드리니 부디 매정하게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아, 그 저기……알았으니 이 손은 좀 놔 주시죠.”
손까지 부여잡고 호소하니,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 네가 제법 강단이 세다고 하지만 나도 가릴 것 없는 몸이라 이거야. 이런 사정에 이런 늙은이가 호소하는데 매정하게 쳐 낼 거냐?
“크흠. 사정이 딱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율이가 특별히 부탁 한 것도 있으니……일단은 수습으로 팀에서 일 하게 해 드릴게요. 하지만 괜히 어설프게 일하거나 이상한 생각 가지고 서율이한테 접근하는 게 보이면 바로 잘라낼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사람 하나 구한 일이 될 겁니다!”
“아, 알았어요. 거, 다가오지 좀 마세요. 흠흠.”
또 다시 얼굴 붉히며 손사래 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인다.
나이가 몇일까? 서른? 서른하나?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니 자기 커리어를 위해서 매진해온 타입 아닐까? 의외로 순진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 생각을 조금 더 받쳐 주었다.
“됐으니까, 이 서류나 마저 작성하시고 동식 군 찾아가세요. 동식 군이 그쪽 바로 윗선임이니 가서 일을 배우면 됩니다.”
“아, 그렇죠. 알겠습니다.”
그녀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드니, 흥흥 거리며 자리를 털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엉덩이가 몸매도 꽤 좋은 거 같다. 여자는 역시 골반이 좋아야 매력적이다. 흔들흔들 거리는 움직임에 내 가슴도 흔들흔들 거린다.
“주책인가……”
서율이를 볼 때도 그러더니 어째 몸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기분이다.
역시 쿤 때문일까. 나이에 안 맞게 발정 난 것처럼 두근거리는 게 어색하다. 남자로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가슴을 툭툭 쳐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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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밑으로 하나 들어온다고 하더니 그게 아저씨에요?”
“하하. 미안하게 됐네. 늙어서 할 일을 찾다보니까.”
“아오. 아저씨 몇 살이에요?”
“올해 마흔 여섯이네.”
“아이고야. 우리 아빠랑 동갑이네.”
동식 군이라 설명한 남자는 겨우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었다.
내 나이가 많다보니 함부로 하지 못해 꽤나 약이 오르는지 계속 콧김만 내쉬었다. 그래도 하는 모양새를 보니 경우 없이 후배라고 막 대하는 성격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아저씨. 우리 일이 마냥 편해 보여도 힘쓰는 경우도 많고, 다치는 일도 빈번해요. 정말로 그 나이에 버틸 수 있겠어요?”
“어쩌겠나. 못 버티면 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든 버텨봐야지 않겠나?”
“으. 진짜. 알았어요. 저기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 따라 와요.”
파란 색 청소부 옷 같은 걸 가리켰다.
나름대로 정복도 있는가 보다. 가서 들어보니 대충 사이즈는 맞았다. 구석진 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자,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고.”
“걸레? 청소부터 하는 건가?”
“당연하죠. 우리가 하는 일의 기본은 청소! 개척자 분들이 불쾌하지 않도록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게 첫 번째 일이랍니다. 그러다 의상이 들어오거나, 장비 세팅 할 때가 되면 가서 돕는 거죠.”
“연예인처럼 코디나 스타일리스트도 있는 건가?”
“보통은 그렇게까지 두지는 않는데, 서율 누나는 따로 사람들이 있어요. 서울시에서 특별히 붙여 주었잖아요. 얼굴마담이라는 이유로.”
말을 듣다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이 게이트는 과연 누가 관리하는 것일까. 일단 군과 경찰이 보이기는 하는데, 지금 보조팀이라 모인 사람들을 보면 이건 분명 민간 계약이다.
동식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다, 궁금한 점을 물었다.
“게이트요? 게이트야 당연히 국가에서 관리하죠. 다만, 개척자들이 모두 공무원이 아닌 이상에야 관리를 전부 국가 귀속으로 다룰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민간 사업체와 계약을 해서 관리를 하고 있죠.”
“관리팀을 담당하는 회사가 있는 건가?”
“그렇죠. 아저씨야 아직 정식 사원이 아니니 그냥 임시 계약으로 일하지만, 나중에 확정되면 회사랑 따로 계약 할 거예요.”
일종의 연예 기획사 같은 거다.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였던 거 같다. 하긴, 돈이 되는 거라면 어디든 손을 뻗는 게 인간이니 그냥 두었을 리 없다. 마담이다 뭐다 해서 이상한 이름이 붙었나 싶었는데, 기획사의 손이 닿았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다.
“자, 그럼 군소리는 그만 하고 일 하시죠. 아저씨는 그쪽 끝에부터 닦아요. 제가 여기부터 올라 갈 테니까.”
“……”
“뭐해요? 시간 없어요. 빨리 해야죠.”
그렇게 동식을 따라간 나는 의외의 장소에 도착했다.
바로 게이트 앞. 놀랍게도 그가 걸레를 든 채 닦으라고 지시하는 건 게이트였다. 아니, 이 세상 물건이 아닌 게이트를 그냥 막 걸레로 닦아도 되는 건가?
“아, 진짜 촌스럽게. 아저씨 그냥 팍팍 닦아요. 세제 좀 묻힌다고 안 망가지니까.”
“정말 괜찮은 건가?”
“그렇다고요. 이미 별별 실험을 다 해 봤어요. 뭘 가져다 대도 반응하지 않으니 걱정 하지 마세요. 미관상 관리하는 것뿐이니까, 빨리 닦아요.”
“하.”
작게 웃음이 나왔다.
서율이를 따라서 보조팀에 들어간다 해도 그 뒤에 어떻게 게이트에 접근을 해야 하나 싶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린다. 어쩐지 서율이 따라 게이트에 접근 할 때 신경 쓰는 사람이 없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슥. 동식이가 고개를 숙일 때 슬쩍 앞으로 나갔다.
일렁이는 게이트의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쿤 타이. 다시 만날 시간이다.
#
“허……”
쿤 타이는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현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친우의 단검을 제단에 올리는 순간 바로 연기가 되어 흩어져 버린 탓이다. 신에게 공물을 바쳐서 그 힘을 받는 자들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목도하는 것은 처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등의 문양을 두드렸다.
***
이름 : 쿤 타이 / 서 준경(첫번째 단계) 종족 : 인간
힘 : 12 민첩성 : 10
체력 : 15 지능 : 12
스킬 : 없음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 하급 은신
신성 점수 : 50
***
다른 건 모두 같지만 한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하급 은신.’ 쿤이 끝자락에 써져 있는 글씨를 읊조렸다. 분명 기억하기로는 100의 점수가 필요했던 능력이다. 하지만 점수에는 변동이 없다. 공물을 바쳤기 때문에 바로 얻었거나, 공물이 100의 점수를 대신해 주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얘기였다.
“감사합니다, 서 준경 신이시여.”
쿤이 일단 제단에 무릎을 꿇어 인사를 했다.
은신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기술. 만약 이 위기를 벗어 날 수만 있다면 이건 온전히 신의 은총이라 봐야 옳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사용하느냐 인데……’
은신이라 쓰여 있지만 당장 어떻게 변했다는 느낌은 없다.
신관 전사나 탑의 마법사들처럼 무언가를 외쳐야 발동이 되는 건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아니면 단순히 있는 것만으로 발동이 되는 걸까.
컹컹컹컹!!!
하지만 그걸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보였다.
동굴 위쪽에서 사냥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목표를 노린 채 바로 다가오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그대로 걸릴 것이 뻔하다.
‘어쩔 수 없지.’
결심을 한 쿤이 동굴 밖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컹컹 거리는 사냥개의 울음소리는 안개 속을 헤매듯 주변을 메아리 치고 있었다. 주변은 황무지. 돌과 돌 사이를 밟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스슥. 스스슥.
발걸음 소리가 가깝다.
쿤이 숨을 참은 채, 돌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림자가 내려와 얼굴을 가렸다. 찬바람이 피부 위를 스쳐가고 옅은 목소리가 위에서 맴돌았다.
두근 두근.
다가오는 기척에 심장이 더욱 거칠게 뛰었다.
바로 위쪽으로 누군가 스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컹! 컹! 하는 사냥개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걸렸다. 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당장 움직일 방법은 없었다. 숨을 참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뿐.
“이쪽으로 온 게 맞아?”
“주변을 다 뒤져도 안 보이잖아. 유황 냄새 때문에 사냥개들이 찾지 못하는 지역은 여기 밖에 없다고.”
“젠장. 시답지 않은 놈이 고생을 시키는군.”
그 순간, 병사 중 하나가 계단 진 돌을 내려와 쿤 앞으로 스쳐갔다.
거리는 한 족장 정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쿤의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이 날뛰었다. 단검은 공물로 바친 상황. 당장 싸움이 벌어지면 방어 할 수단이 없었다.
“쯧. 이쪽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저 위로 넘어가 보자.”
하지만 병사는 주변을 한 번 휘 둘러본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시선이 쿤의 몸을 스쳐갔음에도 발견하지 못했다. 돌 그늘 때문에? 비록 날이 어둡기야 하지만 제국 정찰병들이 그 정도를 놓칠 수준은 아니다.
‘맙소사. 준경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급 은신의 효과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보아하니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알아서 적용이 된다.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한 족장 거리의 시야를 빗겨 날 정도라면 포위망을 벗어나기에는 충분한 능력이다.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도와주시기를.’
손등에 새겨진 신의 문양이 입을 맞춘 뒤 쿤이 다시금 몸을 움직였다.
방향은 남쪽. 정찰병이 올라간 곳과 반대쪽이었다.
※작가의 말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다른 건 전부 블라인드다 보니 댓글에 일희일비하는군요 ㅎㅎ;
분량은 공모전 기간을 생각해서 천천히 조절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두 편 정도 올릴 수 있도록 노력을 해 보겠습니다 ^^;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