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헉!”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부서진 신상이 있는 동굴 안이 아니었다. 게이트. 삼곡 아파트 근처에 나타났다는 게이트 앞이었다.
쿤 타이에서 서준경으로 돌아온 것이다.
“삼촌 괜찮아요? 갑자기 뛰어나가서 놀랐잖아요.”
“어, 어?”
“어휴, 개척자가 아니면 게이트에는 반응하지 않는다니까요. 그게 그렇게 확인하고 싶었어요?”
“내가 지나친 건가?”
“네. 그냥 휙 하고 지나쳤어요. 그보다 이제 슬슬 돌아가요. 조금 있으면 팀원들 올 시간인데 계속 머무르다가는 걸리겠어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임시로 설치해 둔 막사 주변이 바빠지고 있었다. 게이트에 관련된 작전을 시행하려는 거겠지. 계속 서성이다가 한 소리 듣는 것보다는 피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서율과 함께 막사 뒤편으로 돌아왔다.
“아, 이제는 정말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렇지. 응. 일이 있는데 내가 잡고 있으면 안 되겠지.”
“삼촌,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게이트를 앞에서 봤더니 놀랐나봐.”
“하긴 그럴 만 도 해요. 워낙 느낌이 이상하잖아요. 사람들 중에는 거부감 느끼는 경우도 빈번하게 있대요.”
별의 별 공포증들이 다 있지 않은가?
에둘러 한 변명에 서율이가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삼촌 핸드폰은 있어요? 예전 번호는 막혔던데.”
“아, 응. 새로 하나 개통했어. 그러니까 번호가……”
아직 익숙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머니를 뒤지며 허둥거리자, 그녀가 킥 웃고는 핸드폰을 뺏어서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그리고 통화. 걸려온 번호를 확인 한 뒤 ‘준경 삼촌’이라고 이름을 저장했다.
“일 끝나고 연락 할게요.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요.”
“응.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인사를 마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바리게이트 너머로 데리고 왔던 남자가 나갈 때도 안내해 주었다. 별 다른 말없이 차만 운전하는 모양새가 전직 군인인가 싶기도 하다.
“들어가십시오.”
쿨하게 인사하는 모습도 딱 그렇다.
“하아.”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찬 물로 세수를 한 뒤 소파에 누웠다.
아직도 정신이 멍멍해서 어떻게 돌아온 건지도 잘 모르겠다. 물을 한 컵 마시고 눈을 감은 채 10분 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쿤……이었지.”
기억이 난다.
나는 쿤으로 다시 제단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것을 다루던 것은 내가 아니다.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쿤의 기억은 모두 나지만 당시 쿤이 한 선택은 행동은 지금의 나와 다르다.
차라리 그냥 쿤이라는 사람의 기억을 내가 이어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단검. 그래, 단검!”
그러다 마지막 순간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성 점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옛 친구에게 받은 단검을 꺼내서 제단을 올려 두었었다. 당시 쿤이 보았던 스텟창이 나의 것과 거의 흡사하니, 이 또한 영향을 줬을 확률이 높다.
단걸음에 화장실로 가 거울을 살폈다.
***
이름 : 서준경 / 쿤 타이(Lv1) 종족 : 인간
힘 : 12 민첩성 : 10
체력 : 15 지능 : 12
스킬 : None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냉정한 사고
신성 포인트 : 150
***
예상대로 포인트가 올라가 있었다.
쿤이 바친 공물이 점수로 치환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게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응?”
그런데 그때 유리창의 한 부분이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단의 작은 부분이 파란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거나 아이템을 얻으면 상태창의 일부가 반짝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손가락으로 툭 쳐 봤다.
***
이름 : 벨포드의 단검
가치 : 100
***
사각형 박스가 촥 열리더니 그 가운데에 단검 아이콘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슥 집으니 짤막한 설명도 떴다. 이건 딱 인벤토리다. 스텟창에 이어서 인벤토리도 만들어진 것이다.
“혹시……”
잠시 멍하니 보다 아이콘을 잡아서 손으로 당겼다.
그러자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쿤이 제단에 바쳤던 바로 그 단검이다. 색과 모양. 심지어 짙은 쇠 냄새도 같았다.
손에 들고 살펴보니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났다.
항상 사용하던 무기인 것처럼.
“미치겠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기억과 스텟창도 감당이 안 되는 마당에 쿤이 있던 세계의 물건까지 덜컥 넘어오고 말았다. 전혀 다른 곳. 완전히 다른 세계의 물건이 제단을 통해서 건네진 것이다.
마치……
“게이트와 같잖아?”
생각해보니 그렇다.
서율이의 말에 따르면 개척자들은 다른 세계로 넘어가 그곳의 재화들을 이곳으로 옮겨온다고 한다. 단검도 재화는 재화이니 하는 일은 같다. 게이트를 그냥 통과했다는 말에 일단 생각을 접었었는데, 이렇게 공통점이 나타나자 다시금 헷갈린다.
“음……”
하지만 여전히 알아 낼 방도가 내게는 없다.
잠시 생각하다 포기를 하고 말았다. 대신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고미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신성 포인트.
150점. 공물로 넘긴 단검 덕에 100점이 추가된 것이다.
가치가 100으로 표현되었으니, 가치가 1:1로 점수로 치환된다는 것. 이 점은 꽤나 보기 편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점수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다.
고민할 것도 없이 포인트를 손으로 눌러 보았다.
***
하급 화술 - 100
하급 처세술 - 100
하급 법률 지식 - 100
……
***
그런데 나오는 것이 쿤 때와는 다르다.
화술이나 처세술. 법률 지식 등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이것들은 사람을 상대하거나 손해 본 일을 만회하기 위한 도구들. 전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들이군.”
일단 나는 직장도 잃고 아내는 이혼소송을 건 대다가, 딸은 가해자와 결혼을 한 상태다. 이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나열된 능력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회피술이나 은신술 같은 게 아니라.
“흐음.”
하지만 선뜻 어느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당장 고르는 항목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냉정한 사고처럼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에 도움을 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나에 관한 이야기다. 저쪽 세계의 나. 즉, 쿤은 아주 위험한 위기에 처해있다. 도움이 없다면 바로 죽을 지도 모른다.
그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답은 모르지만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게다가 이쪽으로 넘어온 단검과 획득한 신성 포인트. 쿤이 행동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나에게 피드백으로 돌아오고 있다. 지금 손에 들린 단검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고물상에만 팔아도 몇 만원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도 계속 가능하다면?
“일단은 그를 살려야 해. 그래야 그가 나를. 서준경이라는 이름을 계속 신으로 생각 할 거야.”
신에게 바친 공물로 힘을 얻었다면 쿤은 또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금이나 다이아몬드. 값비싼 공물을 내게 건넬지도 모른다. 그쪽에서는 길가의 돌과 같지만 여기서는 매우 가치 있는 물건이 있을 수도 있다.
공물은 즉시 신성 포인트가 되고, 이 포인트는 그를 더욱 강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강해진 쿤은 다시 내게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이클인가!
생각이 정리되자 눈이 번쩍 뜨였다.
쿤과 나. 이상한 스텟과 인벤토리 등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당장 무언가 뚜렷하게 대박이다! 라고 외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다 싶을 정도의 커다란 기회다.
나라고 박봉의 봉급쟁이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나라고 아내 말에 절절 매며 월급이나 따박따박 보내는 현금 인출기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전부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
먹고 살아야 하니까. 금 같은 딸년 먹이고 입혀야 하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어쩌면 하늘이 내 용기 있는 행동에 감복해서 이런 기회를 줬는지도 모르겠다.
나를(쿤을)키우고, 신에게(나에게)공물을 바쳐서 나를(쿤을) 살찌우는 것이다.
이건 내 인생을 건 게임이다.
#
나는 하루를 고박 고민한 후에 하급 은신을 찍었다.
쿤은 제국군에 의해서 포위된 상황. 빠져나갈 길이 있다면 걸리지 않고 피할 수 있는 은신술이 유일하다. 어설프게 전투 쪽의 스킬을 찍어 봐야 지금에서는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신성 포인트 100을 소모하여, 스킬을 하나 얻고 나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다시 쿤이 될 수 있지?
처음에는 차에 치였고, 두 번째에는 게이트에 접촉을 했다.
환생버스도 아니고 또 다시 차에 뛰어드는 건 미친 짓. 그렇다면 두 번째의 방법인 게이트 밖에는 남지 않는다. 다만, 이 경우도 문제가 있다. 뉴스에 의하면 게이트는 현재 민간으로 개방을 막는 추세. 초기에 개방되었던 것들도 전부 막을 친 채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무작정 돌진해서 게이트를 만질 수 없는 노릇.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그 뒤는 철컹철컹만 남을 뿐이다.
“서율이.”
몇 번을 고민해도 그것밖에는 답이 안 나온다.
그녀는 게이트를 지나 갈 수 있는 개척자. 어제 본 바에 의하면 임사 막사도 그렇고, 주변에 동원되는 사람이 꽤 많다. 근처로 접근 할 수 있게끔 관리자직 정도로만 취업 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쿤이 있는 곳으로 이동이 가능할 것이다.
이건 분명히 그녀를 이용하는 일.
하지만 그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머뭇거릴 정도로 내 상황이 느긋하지가 않다. 바로 연락을 할까. 아니면 일단 문자나 보내 볼까.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우우우웅.
아내의 번호로 전화가 왔다.
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받으라고 재촉하는 거 같아서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아내가 할 말이라고는 이혼에 대한 독촉이 전부 일 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겠다 마음을 먹었음에도 굳이 그 목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안 받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이렇게 안 받아?”
첫 마디가 그것이다.
입술을 살짝 씹고는 묵묵히 있었다.
“저번에 준 서류에 서명했어? 오늘 받으러 갈 테니까 이따 만나.”
“……꼭 그렇게 해야겠어?”
미련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존심이었다.
어차피 사랑이라 말 할 정도의 마음이 남아있던 것도 아니고, 깨어난 뒤 보여준 모습으로 가지고 있던 정도 떨어졌다. 하지만 마치 옷에 묻은 먼지 털듯 털어버리는 그녀의 모습은 내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혔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고 했지? 각자 갈 길 찾아가면 되는 일이야. 이제 와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나한테 좀 너무하다는 생각은 없는 거냐?”
“너무하기는 무슨.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당신이 남긴 게 뭐가 있어? 내가 이 나이에 나가서 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남은 돈으로 쪼개서 생활해야 했다고. 다행히 운이 좋아 미소가 그쪽 집안과 이어져서 다행이지……”
“다행? 지금 미소가 그쪽 남자와 결혼한 걸 다행이라고 말 하는 거야?”
“다행이지 그럼! 대출금에 애 학비까지 어떻게 충당하라고? 미소도 아르바이트나 전전하면서 살 뻔 했던 걸 다행이 구제받아서 지금은 편안히 학교 다니잖아. 이걸 보고 욕 할 수 있겠어?”
뒷목이 팍 하고 아려왔다.
분노와 냉정한 사고가 동시에 켜 지는 느낌이다.
참, 나는 잘도 저런 여자와 살았다 싶다. 쿤 덕에 소심함이 걷히니 내가 살 부대끼고 살아온 여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고 있다.
더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젊은 날의 나를 볼 수 있다면 한 방 후려쳐 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것에 매몰돼서 흔들리고 싶지는 않다. 인생에 한 번 온다는 특별한 기회를 잡았지 않은가.
헤어져 달라고?
내가 원하는 일이다.
“……루빅에서 한시에 봐.”
루빅은 옛적에 잘 가던 카페 이름이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알았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잠시 들고 있다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갈 길 가자 그래.
말리지 않는다.
#
오랜만에 찾은 루빅은 예전과 같았다.
미소가 태어나고 난 뒤. 가끔 가족끼리 식사를 한 뒤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찾았었다. 조금은 낡은 내장과 오래된 취향의 음악들. 당시에는 취향에 딱 맞는다면 좋아서 웃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서류 줘.”
냉막한 얼굴로 이혼 서류를 원하는 아내는 전과 달라져 있고, 그것을 보며 담담이 받아 넘기는 나도 분명 전과는 다르다. 말없이 바라보다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시원한 커피를 시켰다. 냉수로는 속이 다 식지가 않는다.
“우리가 담소나 나누러 모인 건 아니잖아. 그냥 서류만 주고 가.”
“이혼은 해 줄 수 있어.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해결 되어야만 해.”
“조건?”
“미소. 이혼을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 애의 아버지야. 당신은 피해를 주지 말고 떨어져 있으라고 했지만 그건 납득 할 수 없어.”
사고기록이야 어차피 기대도 안 한다.
당시 내가 혼수상태였다면 법적으로 대리인이 되는 건 아내. 부모님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게 맞을 것이다. 합의를 하고 병원비를 받은 선택에서 지금의 내가 끼어 들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그 과정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끼어있다 한들.
하지만 미소는 다르다.
그녀는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사고를 낸 집안의 아들놈이 정신을 차려서 잘 대해 준다지만 그걸 내가 믿을쏘냐. 적어도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당신, 내가 한 말 다 흘려들은 거야? 지금 당신이 등장해서 미소 결혼이 어떻냐고 따져 봐. 잘 살고 있는 애들 꼴이 어떻게 되겠어? 게다가 그쪽 집안 식구들은? 안 그래도 상황이 엄한 덕에 마음고생이 심한 아이한테 그런 일까지 시켜야겠어?”
“그래도 난 내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어. 그전까지는 이혼 해 줄 수 없어. 소송? 하고 싶으면 해? 어차피 이제는 잃을 것도 없는 나야. 같이 죽자면 말리지는 않아.”
눈에 힘을 주고, 악 바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제야 내 모습이 전과 다름을 눈치 챘는지, 아내가 조금은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별 거 아니지 않나? 그냥 좀 기 센 아줌마일 뿐. 내가 왜 쫄아서 버벅거렸는지 의아할 뿐이다.
“……미소 아빠. 우리 솔직하게 말 해 보자. 지금 미소아빠가 미소를 보러가서 남는 게 뭐가 있겠어? 설마 미소가 아빠 왔다고 막 반겨주고 이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 애도 다 컸어. 자기 앞가림 하면서 살아간다고. 이제 와서 초친다고 누구 하나 즐거워하지 않아.”
“내가. 내가 싫어. 미소가 싫어한다고?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쳐. 하지만 지금껏 먹여주고 키워준 건 나야. 사고로 2년 반 동안 누웠다 일어났더니, 이제 와서 연 끊고 살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쾅!!
테이블을 손으로 내려쳤다.
거칠게 울리는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에 쏠렸다. 아내가 당황해서는 손짓을 하며 나를 만류했다. 부끄럽다기 보다는 후련했다. 왜 이런 걸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이렇게 속이 시원한데.
“두 번 안 말해. 미소랑 만나서 그 애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겠어. 그때가지는 절대로 이혼서류에 도장 안 찍어 줄 줄 알아.”
“미소 아빠……!”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침 주문했던 냉커피가 나왔다.
그대로 받아서는 한 번에 마셨다. 속이 시원해졌다. 머리가 띵 하고 울리지만 그건 그냥 악물어 참았다.
“당신 꼴. 지금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 꼴이 멋지다 생각하면 오산이야. 아주 구역질나. 어울리지 않는 명품에, 화장에, 말투에. 차라리 수더분한 화장으로 악쓰던 2년 반 전의 당신이 훨씬 예뻤어. 그건 좀 알아 두라고!”
“뭐, 뭐야!? 당신 지금 말 다했……”
“다했어!! 그러니까 똑똑히 들어! 당신이 직접 미소한테 얘기를 해서 날 보러오게 만들던가, 아니면 내가 찾아내서 직접 깽판을 놓겠어! 알아서 선택 하라고!”
쾅. 다 먹은 잔을 세게 내려놓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아직 아프다. 이빨을 콱 깨문 채 씩씩거리는 아내를 두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커피 값? 안 냈다.
열 좀 받아 보라지.
#
시원하게 지르고 나오니 하늘이 좀 맑아 보였다.
평소 잘 걷지 않던 길도 소리 나게 걸어 보았다. 빵빵거리는 차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전과 달리 그리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쿤의 삶.
그의 기억과 경험. 첫 사랑과 첫 좌절. 친구의 죽음. 지금의 삶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경험하고 났더니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고 살았다면 지금처럼 궁색한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후회 역시도.
“후.”
됐다. 지금 와서 궁상맞게 후회해 본들 뭐하겠는가.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다. 남들은 가지지 못하는 비밀 하나를 얻지 않았던가.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 거리며 뛴다. 옛 게임을 몰래 잡았을 때 느끼던 두근거림과 비슷하다. 어떤 게 나올까. 어떤 이야기가 기다릴까. 쿤과 나의 게임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미칠 거 같았다.
김서율.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막 오후 두 시를 지나가고 있을 무렵.
전화를 하면 그녀는 과연 받아 줄까.
걱정을 품에 안은 채, 그녀의 번호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가의 말
오늘은 길게 한 편 갑니다.
그나저나 추천에 대해서 아주 난리가 났군요.
안 그래도 친구가 공모전 한다니까 추천 해 줄까 해서 고사했는데,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있는게 제일인거 같네요.
즐겁게 보고 가세요~